95화
주점의 2층은 아무나 올라올 수 없는 곳이었다. 1층은 곡물을 발효시켜 만든 저렴한 술을 파는 넓은 홀로 된 구역으로, 아무나 출입하고 즐길 수 있었다. 2층은 주점에서 자체적으로 여관을 운영하고 있었으나, 훗날을 대비하여 텐부르크 후작이 비밀리에 사들였다.
바로 오늘같이 비밀스러운 만남을 꾀하는 일에 사용되는 장소로.
과거 여관의 외형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는 복도 끝의 이 방이 가장 컸다. 또한 안쪽에 또 하나의 방이 있기도 하고, 숨어서 엿들을 장소도 꽤 있어서 비밀리에 염탐하기는 아주 좋은 곳이다.
물론 그 장소들은 나와 쌍둥이들만 알고 있다.
응접실로 꾸며 둔 내부를 가로질러 안쪽 방을 가장 먼저 구석구석 살폈다. 혹시 모를 염탐꾼이 존재하는지, 대화를 도청하는 마법 도구가 있는지.
“없습니다, 주군. 설령 있다 해도 살아 나갈 수 없다는 거, 잘 아시잖습니까.”
“그런 녀석이 형님이 르슈아를 납치해 가는 상황을 그저 듣고만 있었나?”
“죽일 생각도 없고, 본인도 공작과 손잡았던 것을 후회하는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어떻게 나오는지 지켜본 겁니다. 그 유령이 멍청하리만큼 순수하다는 것, 주군께서도 잘 아시잖습니까.”
가벨론 공작과 손잡았던 것을 후회한다, 라.
“그 또한 공작의 계략일지도 모르지.”
“흐음……. 여자에 푹 빠진 남자가 이성적인 판단을 할 수 없다던 말은 사실이었나 보군요. 주군답지 않게 바보 같은 소릴 다 하십니다.”
히죽거리며 실실 웃는 녀석을 진지하게 노려봐 주었다. 그런다고 눈 하나 깜짝할 녀석이 아니지만.
“또 목이 잘렸다가 붙고 싶은 거냐?”
“그 유령이 남의 계략에 순순히 따르고자 하겠습니까? 알 만한 분이 왜 그걸 모르시나?”
그 말을 듣자마자, 목구멍이 바짝 타는 느낌이었다. 내가 형님을 보통 인간으로 생각하고 있었다니.
카시안의 말처럼 형님은 절대 누구의 손도 잡지 않을, 아주 독보적인 자유분방함을 가지고 있다. 내가 그저 혈육이었기 때문에, 나를 지켜야 한다는 사명감만 있다 보니 나를 직접적으로 해치지도 못했다.
생각해 보면 아주 단순한 성향인데, 내가 이십 년이 넘도록 봐 온 형님은 절대 누군가의 편에 설 위인은 아니었다. 재미있겠다 싶어 잠깐 그들과 어울리긴 했겠지만 단지 거기까지. 아마 공작은 형님의 성향을 전혀 모를 테니 자신들이 그를 이용한다 생각할 것이다.
“그래서 네 말은…… 형님이 르슈아를 공작에게 넘길 일은 없을 것이다, 이런 뜻인가?”
“자신의 복수를 위해 아가씨와 주군을 떨어트려 놓으려는 속셈이지, 절대 두 분의 목숨을 해치진 못한다는 걸 아시잖습니까. 우리와 다르게 누구의 생명을 거둬 본 적이 없기도 하지요. 그 대단한 마력을 가지고서도 말입니다.”
“하지만 장담할 수는 없으니 안심하기는 이르다. 바뀔 지도 모르는 게 사람 마음이니.”
“사람이 아니기 때문에 바뀔 일은 없다고 장담합니다.”
인간이 아닌 무언가로서 인간들 틈에서 자라난 카시안의 말이라 그나마 조금 믿음이 생긴다. 인간으로서 자라온 내 상식으로는 둘 다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것들이지만.
그 말대로 르슈아가 그저 안전하기만 하면 아무래도 좋았다. 르슈아가 공작의 손에 넘어가지만 않길 진심으로 바랄 뿐이다.
“도착했나 봅니다. 라이온 백작은 아닌 것 같은데, 그 공작의 측근이라는 놈 같은데요.”
드디어 왔군. 과연 무슨 말을 지껄일지, 어떤 속내를 드러낼지. 아니, 드러내지 않고 숨기면서 거짓을 고할지도 모를 일이니 쉽게 단정 지을 수는 없다.
“주시해. 무슨 짓을 저지를지 모를 상대다.”
“예.”
응접실의 안쪽 방에 다시 들어가 방문을 닫았다. 워낙 오래된 문이라 방음이 그리 좋지 않은 건 참으로 다행이었다. 옆방에서의 대화 소리도 들릴 만큼 허술하게 지어 놓은 건물이라서.
곧 묵직한 발소리가 복도에 울렸고 바깥의 방문을 노크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러나 안쪽에서 아무런 대답도 없음을 확인하고는 조심히 방문을 여는 듯했다.
긴장한 듯한 남자의 조심스러운 발소리로 실내에 들어왔음을 짐작할 수 있었다.
“아무도, 안 계신 겁니까?”
돌아오는 답이 없자 남자는 중앙에 놓인 소파에 앉아 깊은 한숨을 크게 내쉬었다. 꽤나 긴장하고 있는 듯 무어라 혼잣말을 중얼중얼했다.
아마도 라이온 백작을 상대로 할 말을 정리하는 것 같았다. 카시안이라면 다 들었겠으나 내 귀로는 어림도 없을 만큼 작은 목소리였다.
한참의 시간이 흐르고 나서야 복도에 울리는 빠른 발소리가 들려왔다. 라이온 백작이었다.
“먼저 와서 기다리고 있을 줄은 몰랐군요. 약속 시간이 되려면 아직 멀었는데.”
“제 목숨이 걸린 문제입니다. 여유작작하게 기다릴 수는 없는 일 아니겠습니까.”
“일단 앉으시오. 천천히 이야기를 들어 보지요.”
나는 문으로 더 가까이 다가가 착석한 두 남자의 대화에 귀를 기울였다. 단 한 문장이라도 놓치지 않겠다는 생각으로.
“당신이 가벨론 공작을 배신하고 우리 쪽으로 붙는 것에 대한 조건을 제시하겠다고 했지요. 일단 그 조건부터 들어 봅시다.”
“크게 바라는 건 없습니다. 비밀 엄수, 그리고 제가 제국을 떠나 조용히 살 수 있는 도피 자금과 죽을 때까지 저를 황실에서 보호해 주겠다는 서약을 진행해 주십시오. 그리하면 가벨론 공작이 꾸미고 있는 일에 대해 모두 증언하도록 하겠습니다.”
증언하는 것치고 조건이 터무니없진 않았다. 그 모든 건 증인을 보호하는 일에 있어서 필수적인 조건들이었으니 말이다.
정말 가벨론 공작의 계략에 죄책감을 느낀 건지, 아니면 이 또한 저들의 수작인 건지.
“그게 다입니까?”
“……저는 오래 전, 선황 폐하의 은덕을 받아 목숨을 구제 받았습니다. 가벨론 공작이 황제파를 이끄는 수장이었기 때문에 그분께 충성을 다했던 것입니다. 하지만 현 황제 폐하께서 즉위하신 이후부터 황위를 넘보려는 가벨론 공작을, 더는 지켜볼 수가 없었습니다.”
“황위를 넘보고 있다면, 반역을 꾸미고 있다는 말씀입니까?”
“조건부터 서약해 주십시오. 그리하면 저들의 행각을 낱낱이 털어놓겠습니다.”
반역이라……. 결국 이런 비극적인 결과를 낳게 된 것인가.
“좋습니다. 황제 폐하의 이름으로 당신의 안전과 이후의 안위를 보장해 드리겠습니다. 또한 상황이 최악으로 치달아 그들의 계략에 당하게 되더라도, 저 또한 지금의 일을 목숨 걸고 함구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러나…… 우리 쪽에서도 당신의 증언이 진짜인지 확인할 증거가 필요합니다.”
“모든 건 이 안에 담겨 있습니다. 이 모든 것이 증언이며 증거이자, 가벨론 공작은 물론이고 황제 폐하 다음으로 가장 높으신 분의 인장이 찍힌 서류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황제 폐하 다음으로 가장 높으신 분이라면…….”
“저들은 상상 이상의 악독한 짓을 꾸미고 있습니다. 그 모든 준비가 거의 다 마무리 단계에 있으니, 하루속히 만반의 대처를 하시어 황제 폐하께서 승리의 패를 거머쥐길 바랄 뿐입니다.”
황태후가 그 모든 일의 조력자일 것이다. 결국 이런 사달이 벌어지게 되나 싶어 소리 없는 한숨이 절로 흘러나왔다.
“왜 이렇게까지 하는 겁니까? 만일 가벨론 공작이 반역에 성공한다면 당신이 얻는 것은 이보다 더 클 텐데요.”
“말씀드렸듯, 죽더라도 선황 폐하께 떳떳한 모습을 보여 드리고 싶습니다. 당신께서 살리신 이 비루한 목숨, 황실의 안녕을 위해 내가 가진, 또한 내가 가질 수 있었던 부와 권력을 모두 버렸다고.”
“……설마, 당신?”
“잊어 주십시오. 저에 대한 과거는 전부 다 잊었습니다. 다만 받은 은혜를 갚길 바랄 뿐인, 그저 한 명의 제국민일 뿐입니다.”
라이온 백작이 저 남자의 얼굴을 기억하고 있다면, 귀족인 건가? 멸문한 귀족을 아바마마께서 거두신 것일지도 모른다. 자식에게도 별 관심 없으시던 아바마마께서 참 속으로는 유난을 떨었구나 싶어 픽 웃음이 나와 버렸다.
그래도, 당신께서 재위 기간 동안 해온 모든 일들이 헛되지는 않았나 봅니다. 덕을 베푸는 만큼 언젠가는 돌아오기 마련이라 입이 닳도록 말씀하셨었지요. 그때가 이때인 모양입니다.
아직은 하늘이 우리를 버리지 않았음에 감사해하던 차에, 갑자기 방문이 열리고 라이온 백작이 내게 묵례를 건네어 흠칫 놀랐다.
“다 들으셨지요, 폐하? 어찌 하시겠습니까?”
……이 녀석, 분명 일부러 이러는 것이다. 하여간 제 형인 텐부르크 후작과는 상반되는 성격이라 파빌리엔과도 죽이 잘 맞더니 이런 깜찍한 짓도 아주 자연스럽단 말이지.
라이온 백작의 어깨 너머로 나를 본 남자가 두 눈을 휘둥그레 뜨며 황급히 고개를 푹 숙이고 어깨를 바짝 좁힌다. 안절부절못하는 것이 이런 상황을 조금도 염두에 두지 않았나 보다.
처음 보는 얼굴인데, 워낙 스치듯 지나간 귀족들이 많기도 했고 일일이 얼굴을 전부 기억하고 있지는 않아서 이럴 때는 좀 불편하기는 하다. 라이온 백작이 아는 얼굴이라면 더더욱.
“폐하?”
나는 공작의 측근이라는 이의 창백해진 옆통수를 빤히 바라보며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그러자 남자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바닥에 무릎을 꿇은 채로 납작 엎드렸다.
아까는 그리도 당돌하게 떠들어 대더니. 나를 직접 대면하고 싶진 않았던 것이로군.
“하나만 묻지.”
“하, 하문하십시오.”
“가벨론 공작이 최근 나를 닮은 이를 곁에 두고 있다던데. 반쯤 불에 그을린 얼굴을 가면과 천을 둘러 가리고 있다던. 사실인가?”
“……그 마법사를 아십니까?”
그냥 마법사로 소개했나 보다. 하긴, 유령이라 하면 미친 사람 취급할 테지. 형님도 과거에 유령으로서 르슈아의 언니인 로안트 후작 부인에게 접근했다가 큰 화를 당했던 적이 있으니 그 정도는 교육이 되었을 것이다.
“그래. 안다. 꽤 오래 알고 지낸 사이지. 해서 다시 묻겠다. 그 마법사가 가벨론 공작의 반역에 협력하기로 하였던가?”
“그건 아닙니다. 그 마법사는 그저 소문을 퍼트리기 위한 목적으로 이용당했을 뿐, 공작은 그를 믿지 않았습니다.”
저 말이 사실이라면 결국 형님도 이용당했다는 것이군.
“그 소문이라는 것이 무엇이지?”
“그, 그것이…….”
“내가 국혼 전부터 정부를 품었다던 그 소문인가?”
가벨론 공작 영애와 내가 밀회를 하고 있다는 그 소문은 들어서 알고 있다. 그 외에도 나의 여성 편력에 대한 이야기가 돌고 있다던데. 대수롭지 않은 소문이긴 하나 르슈아의 귀에 들어가게 되어 참 신경이 쓰이던 것들이라.
“그보다, 더한 소문입니다.”
“더하다니?”
“……공작 영애가 황족의 씨를 잉태하였다는 소문을 퍼트리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