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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만의 비밀스러운 꽃 (94)화 (95/113)

94화

하지만 당장 사라진 형님과 르슈아를 찾아내는 건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머리끝까지 차올랐던 흥분이 차츰 가라앉았다. 아무리 대가리가 비어 있는 멍청한 유령이라도 차기 황후에게 해코지를 가하지는 않겠지. 그녀의 목숨을 빼앗는 것만이 복수는 아닐 테니.

“카시안.”

“싫습니다.”

명령을 하달하지도 않았는데 심드렁하게 대꾸하는 카시안을 노려보았지만, 녀석은 새끼손가락으로 귓구멍을 파내면서 딴청을 피웠다.

“뭐가 싫다는 거냐.”

“아가씨를 찾아오라는 거, 딱히 좋은 생각은 아닌 것 같습니다만. 아시다시피 그 유령의 행방을 찾아내기란 여간 쉬운 것도 아니고, 얼마나 걸릴지 모를 일이며, 그간 주군의 곁에서 떠나있어야 하는데. 이게 그들의 계략일지 어떻게 압니까? 유령이 그 공작과 내통했다면서요.”

지난번, 내가 카시안에게 황제의 대리인을 보좌하라는 명령을 남기고 르슈아의 곁에 머물렀던 일로 그는 한동안 나를 괴롭혔었다. 계약을 잊은 거냐고, 지키지도 못하게 할 거면 멀리 떠나 있지 말라고 말이다.

사실 카시안과 내가 맺고 있는 계약은 피의 계약으로, 내가 다치면 카시안도 똑같이 부상을 입게 되어서 내 목숨이 그의 목숨과 직결되어 있기도 했다. 한마디로 내가 죽으면 카시안도 죽는다. 그렇기 때문에 나와 떨어지게 되거나 내가 위험에 처하는 것을 극도로 꺼리고 있었다.

내 목숨이 귀한 것이 아니라, 제 목숨이 소중하여 저렇게 까탈스럽게 구는 것이다.

“내가 그리 쉽게 죽을 것 같으냐?”

“스스로를 맹신하지 마십시오. 죽을 뻔했던 경험이 있잖습니까. 그때의 고통을 다시는 겪고 싶지 않습니다, 주군.”

나를 살해하기 위해 따라붙던 암살자들에 의하여 크게 부상을 입었던 그때도 카시안이 나를 지켜 주지 못한 이유이기도 했다. 그래, 그 말이 맞다. 내가 나를 너무 맹신하였기에 그런 일이 벌어진 것을 알고는 있다.

아무리 대단한 검술 실력을 가졌다 하나, 열 명을 한꺼번에 상대하기는 무리라는 것을 그때 깨달았으니.

“그때와는 다르다. 그때는 내 위치가 공고하지 않았고, 쫓기는 입장이었으나 이제는 그 누구도 나를 쉽게 해칠 수가 없어.”

“선황도 그랬습니다. 똑같은 말을, 그 아들이 하는군요. 그러니 인간이 한심하다는 겁니다. 악순환의 반복을 왜 만드는 겁니까? 멍청하게.”

“그래서 지금 나더러 슈아를 저리 위험에 빠지도록 두란 뜻이냐?”

“살의가 없었습니다. 또한 현재 아가씨는 깊은 잠에 빠진 것일 뿐이고, 그 유령의 말로는 아가씨를 죽일 생각이 전혀 없다고 했습니다. 죽일 거면 진작 죽였다고.”

형님이 없는 말을 지어내진 않는 성격이긴 하지만, 정말 카시안 저 녀석에게 없는 정도 더 떨어질 것 같았다. 르슈아가 유령과 재회할까 매일 마음을 졸이며 불안해했던 것을 알면서도, 대면을 눈치채고도 놔 두었다니. 상종 못할 쓰레기 같으니라고.

나는 떨리는 두 주먹을 더욱 꽉 말아 쥐며 침착하게 호흡을 다스렸다.

“좋다. 만일 르슈아에게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각오해라. 나 역시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을 테니.”

“그깟 여자 하나에 그 모든 것을 다 포기하겠다는 겁니까?”

“르슈아가 아니었으면 황제의 자리에 오를 일도 없이 이미 죽은 목숨이었다. 아쉬울 것도 없지.”

처음 생사를 넘나들며 죽음의 문턱에서 만난 어머니가 아직은 때가 아니니 돌아가라며 내 등을 떠밀었던 그때, 꿈인지 생시인지 분간이 되지 않는 상태에서 르슈아를 봤을 땐 그야말로 천사를 마주하는 기분이었다. 감각이 반쯤 사라진 내 손을 꼭 잡고 살아 주어 고맙다는 말을 전하며 감격의 눈물을 보이던 그 모습이 아직도 잊혀지질 않았다.

그녀가 나를 살리기 위해 무척이나 애를 썼고, 내가 이만큼 사람 구실을 할 수 있게끔 재활을 열심히 도와주었기 때문에 이렇게 멀쩡히 살아있는 것.

그것이 카시안의 목숨도 살려낸 거나 마찬가지인 것을. 평생 감사해야 할 은인이 제 말에 반박 한 번 하였다고 저렇게 냉대하다니.

나는 멀뚱거리며 서 있는 카시안을 흘겨보다가 재빨리 머리를 굴렸다. 형님이 가벨론 공작과 손을 잡았다는 사실은 그의 측근이 발설했다던 서류에도 적혀 있었다. 그렇다면 르슈아를 납치해 간 것은 인질로 잡아 두기 위함일 터.

하지만 나를 겁박하기 위해 국혼을 앞두고 있는 예비 황후를 납치해 갔다는 건 가벨론 공작 측에서도 크게 이득 될 것이 없을 텐데. 만일 그 소문이 번진다면 황족 시해 미수로 처벌을 피해 가기 어려울 테니.

대체 무슨 계략을 꾸미고 있는 건지. 일단 우리 측에 붙겠다는 공작의 측근을 만나 봐야겠다.

바로 휴게실을 빠져나온 뒤, 소파에 앉아 어리둥절해하는 라이온 백작에게 명령을 하달하였다.

“라이온 백작. 공작의 측근과 조용히 대면할 수 있도록 자리를 만들도록.”

“……아, 예!”

“대화는 일단 백작이 주도하는 것으로 하고, 나는 조용히 숨어 있겠다. 나가도 될 자리라 판단되면 모습을 드러내는 것으로 할 테니 그리 알도록.”

“직접, 말씀이십니까?”

“적어도 내 앞에서는 발설에 대한 조건 따위 내걸지 않겠지. 이번 일을…… 조금 빨리 처리해야 할 이유가 생겨 버려서.”

빠른 시간 안에 정리하여 르슈아를 데려간 곳을 알아내는 것이 급선무다. 만일 형님이 르슈아를 공작에게 떠넘긴다면……. 그것만큼 최악의 상황은 없을 것이다. 공작이 절대 르슈아를 가만히 두진 않을 테니까.

‘제발 형님, 간곡히 부탁하건대 내 여자에게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마십시오. 내가 형님을, 평생 증오의 대상으로 여기지 않게 해 달라는 뜻입니다.’

왕국이 위험하다 하여 르슈아를 보호하고자 황궁에 숨겨 두었는데, 제국이나 왕국이나 위험한 건 매한가지. 마르엘 백작을 볼 면목이 없군.

르슈아가 붙잡혀 간 이후로 아무 것에도 집중할 수가 없었다. 처리해야 할 일이 점차 산더미처럼 늘어나고 있음에도 초조하여 손에 잡히질 않는다. 지켜 주겠다고 약속하였는데. 이런 위험이 언제든 도사리고 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그녀를 황궁으로 끌어들이고 싶지 않았던 것이건만.

“라이온 백작은 아직 소식이 없는 건가?!”

집무실 구석구석을 서성거리다가 극도의 불안감을 이기지 못하고 큰 소리가 절로 터졌다. 그러자 내 일을 돕는 보좌관 두 명이 식은땀을 줄줄 흘리며 서로 눈치만 보기 급급했다.

제위에 오른 이후로 이렇게까지 화를 내 본 적이 없었건만. 속에 불꽃이 피어오르는 것처럼 활활 타오르는 기분은 참으로 오랜만이었다. 어느새 해가 뉘엿뉘엿 지기 시작하여 붉은 하늘이 점차 어두워져 가는 것이 꼭 내 마음과도 같았다.

차라리 악몽을 꾸는 것이었으면 좋으련만.

“왔습니다, 주군.”

구석진 벽에 등을 기대고 눈을 감은 채로 숨소리 하나 내지 않던 카시안이 오랜만에 입을 열었다. 동시에 노크 소리가 들려왔고, 시종장이 들어와 묵례하였다.

“폐하, 라이온 백작으로부터 도착한 서찰입니다.”

나는 그 서찰을 빼앗듯 집어 황급히 펼쳐 읽어 내렸다. 내 다급한 마음을 안다는 듯 오늘 밤, 달이 떠올라 산등성이 위에 걸쳐지는 때에 제국 수도의 가장 후미진 주점에서 만나기로 했다는 내용이 적혀 있었다.

이만큼 시간을 끌다니. 내 이 공작의 측근이라는 놈을 언젠가는 꼭 요절을 내 주겠다.

최대한 침착함을 유지하며 서찰을 꾸깃 말아 쥐어 벽난로 속으로 던지고는, 보좌관들을 향해 옅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

“오늘은 피곤해서 더는 일을 진행할 수 없으니 이만 돌아들 가 보거라. 내일 다시 모이도록 하지.”

“예? 오, 오늘 아무것도 진행하지 못하였사온데…… 아, 네! 내, 내일 다시 오겠습니다, 폐하!”

눈치도 없는 것들 같으니라고. 당장 돌아가지 않는다면 목이 붙어 있지 못할 것이라는 눈빛으로 노려보자, 보좌관들이 후다닥 서류를 정리하여 집무실을 도망치듯 빠져나갔다. 나는 혀를 끌끌 차며 시종장에게 조용히 환복할 옷을 가져오라 명하였고, 그는 내가 잠행을 시도한다는 것을 눈치챈 듯 어두운 색감의 평범한 의복을 가져왔다.

눈치는 빨라서 참 마음에 드는군.

“잠시 자리를 비울 테니 시종들 입단속 철저히 시키도록.”

“예, 폐하.”

서두른다 하여 해결되지 않음을 알면서도 마음이 급했다. 자꾸 눈앞에 아른거리는 르슈아의 마지막 모습에 심장이 찢어지는 기분이라서.

황궁의 비밀 통로를 통해 카시안과 함께 조용히 황성을 빠져나와, 골목을 이용해 약속 장소로 향하였다. 아직은 해가 떠 있는 시각이라 골목이어도 다니는 이들이 제법 되었다. 전 같으면 그냥 돌아다녀도 괜찮았겠지만, 이제 내 얼굴을 아는 귀족들이 제법 되다 보니.

“아직도 삐지셨습니까, 주군?”

“닥쳐. 재수 없는 자식.”

비웃는 카시안을 날카롭게 노려봐 주었으나 그런다고 타격을 입는 녀석이 아님을 알기에, 괜한 감정 싸움에 휘말리고 싶진 않았다. 이제 저 녀석이 무어라 농락해도 못 들은 척 무시하려 하였으나.

“아가씨는 멀리 계신 것 같지 않습니다. 수도 내에서 마력의 힘이 느껴지고 있습니다. 그 유령 말입니다.”

카시안이 그저 나를 안심시키기 위해 거짓을 토로할 이가 아님을 안다. 그 말 한마디에 긴장했던 어깨가 살짝 풀어졌다.

“어디쯤에서 마력이 운용되고 있지?”

“정확히 어디인지는 잘 모르겠습니다만. 공격이 아닌 방어 마력인 걸 보니 아가씨를 봉인이라도 해 둔 것 같군요.”

봉인이라. 차라리 그리하면 다행이다. 적어도 르슈아가 안전할 가능성이 크다는 뜻이니.

카시안이 협조만 해 줘도 좋겠지만, 나와 절대 떨어지지 않을 생각인 것 같고. 위치만 확실하면 좋으련만.

“예의 주시하고 있어. 위치를 파악해 봐. 네 능력을 최대한 발휘해서.”

“노력하고 있습니다.”

노력이라는 말을 믿을 수는 없지만, 일단 공작의 측근부터 해결해 놔야겠다. 해서 나는 조금 더 빠른 걸음으로 약속 장소인 허름한 주점을 찾아 안으로 들어갔다.

주점답게 코를 찌르는 술 냄새가 진동한다. 오래된 주점이어서 단골이 제법 많은 곳이었다. 또한 내가 황자였던 시절, 친한 귀족들과 몰래 만났던 장소이기도 했다.

카운터에 앉아 있던 주점 주인이 내 얼굴을 기억하고는 턱짓으로 2층을 가리켰다. 내가 그저 적당히 부유한 귀족이라 여기고 있을 터.

해서 그저 가볍게 묵례를 하고는 카시안과 함께 2층 복도의 가장 끝 방으로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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