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3화
내가 알기로는 분명히 이 유령은 가벨론 공작과 손을 잡았고, 그들과 결탁하여 에쉬를 끌어내리기 위한 물밑 작업을 하고 있었을 것이다. 국혼을 앞두고 공작 영애와의 밀회를 증거 삼아 정부로 앉힐 생각이겠지. 그리고 황태후가 했던 방법을 이용해 어떻게든 회임을 하고 아이를 낳아, 황태자로 세우려 들 것이다.
아마도 그러기 위해서는 황후의 자리에 앉아 있을 내가 아이를 가지지 못하도록 갖은 방법으로 위협을 하겠지. 내게서 후사가 태어나지 않아야 할 테니.
인간적으로 어떻게 그런 일을 할 수 있을까 싶지만, 황태후가 지금껏 해 온 짓을 생각하면 절대 가능성이 없지는 않다.
아무튼 지금 저 유령이 하는 말을 전부 믿을 수는 없지만, 일단 그에게서 얻어낼 수 있는 정보를 조금이라도 더 털어놓게 해 봐야겠다.
“조금 더 자세하게 말해 줄 수 있나요?”
“왜, 내 소중한 동생에게 이런저런 일이 있었다고 다 불려고?”
너무 티가 났나 싶어서 얼굴이 화끈거렸다. 이런 쪽으로는 은근히 눈치가 있구나. 참 의외네.
“그것도 그거지만, 굳이 여기까지 찾아와 내 앞에서 그런 이야기를 주저리주저리 털어놓았으니 제 입장에서는 당연히 궁금하지 않겠어요? 해칠 생각도 없다면서요. 말해 줄 거 아니면 당장 나가요. 아니면 소리라도 질러 버릴 거예요.”
어차피 유령은 실체화를 오래 할 수 없다고 하였으니 다시금 내 눈앞에서 사라질 것이다. 마력을 사용한다 해도 둘째 언니가 내게 준 루비 팔찌가 한 번쯤은 그 마력을 막아주겠지. 그 이후에는 카시안을 믿어 보는 수밖에.
나는 팔찌를 손으로 매만지며 미간을 바짝 좁혀 그를 빤히 노려보았다. 그럼에도 유령은 짓궂은 미소를 유지한 채 눈동자를 슬쩍 굴려 방문을 훑어보았다.
“저 황제의 자리라는 것이, 그저 앉아만 있으면 모든 것이 저절로 해결되는 자리인 줄 알았다. 지금껏 그 자리에 앉았던 이들이 그렇게 해 왔으니. 하지만 결과적으로 모든 것이 진흙탕 싸움이었음을 직접 이 두 눈으로 확인하고야 말았지.”
갑자기 어울리지 않게 진지한 이야기라니. 정말 이 유령의 머릿속엔 뭐가 들었는지 더 궁금해진다. 대체 어떤 생각을 하고 있으면 이렇게 제멋대로인 건지.
“내가 직접 복수를 해야 할 상대를 빼앗기는 건 사양인지라. 나의 소중한 동생이야 그 목숨을 지켜 줄 대단한 검이 한시도 떨어지지 않고 있지만, 너는 아니라서.”
“……제 목숨을 노리면서 걱정까지 해 주십니까?”
“목숨을 노리다니. 나는 너를 죽일 생각이 처음부터 없었는데? 죽일 생각이었다면 진작 죽였겠지. 살해에 예고가 존재하던가?”
생각해 보면 저 유령이 나를 죽이겠다 협박한 적은 없었다. 그저 복수를 운운할 뿐이었지. 그래서 당연히 내 목숨을 위협할 거라고 생각했다. 나의 부재가 에쉬를 고통스럽게 할 것이라 하였으니.
“그럼 당신이 생각하는 복수가 무엇인지…… 물어봐도 대답해 주지 않겠지요?”
“알고 싶나?”
당연한 걸 묻다니. 알고 싶지 않으면 물어보지도 않는다는 걸 모르는 걸까? 정말이지 공감 능력이 현저하게 떨어져서 대화하기에 너무 피곤한 상대다.
“알고 싶기 때문에 물어보는 거예요. 인간은 궁금한 것이 있으면 그것에 대한 답이 나올 때까지 불안해해요. 그게 일반적이고요.”
“호오? 그거 아주 솔깃한 내용인데? 여러모로 재미있는 고문이 될 수도 있겠어.”
“……당장 내 눈앞에서 사라져요. 그러지 않으면 소리를 질러 버릴 거예요.”
에쉬의 얼굴을 하고 저런 비아냥이라니. 저 유령 때문에 자꾸 에쉬에 대한 내 안의 이미지가 깎이는 느낌이다. 서로 다른 존재이긴 하지만, 정말 닮아도 너무 똑같이 닮아서.
나의 협박에도 불구하고 유령은 눈 하나 꿈쩍하지 않았다. 오히려 꿍꿍이가 너무도 잘 엿보이는 해사한 미소를 보이면서 내게 얼굴을 들이밀었다.
“왜, 왜 이래요?”
“알고 싶다며. 내 생각을.”
하여간 저 변덕이 얄미워서 미간을 확 좁히는데, 그가 더 가까이 붙어서는 고개를 비스듬히 숙이고 귓가에 작게 속삭였다.
“내가 생각하는 복수는…….”
말끝을 길게 늘이는 유령의 목소리가 끊일 듯 이어지며 순간적으로 머리가 핑 돌았다.
‘……어?’
그리고 순식간에 초점이 어긋나기 시작하는 순간, 나는 보았다. 그 유령의 입꼬리가 호선을 그리며, 에쉬와 똑같은 연갈색 눈동자에 묘한 이채가 감돌기 시작하는 것을.
“너를 영원히 깊은 잠에 빠지도록 만드는 것이지.”
당했다. 완전히. 끝까지 방심하지 말았어야 했는데, 설마 이렇게 공격을 해 올 줄이야.
잔잔한 연못에 커다란 돌을 던진 것처럼 세상이 온통 흔들거리면서 새까만 어둠이 내려앉았다. 차마 거부할 수 없는 졸음이 쏟아졌다.
그렇게 정신을 잃기 직전, 유령의 마지막 목소리가 서서히 멀어졌다.
“잘 자거라, 귀여운 아이야.”
***
“폐하? 폐하!”
달콤한 쾌락에 젖어 있던 르슈아의 표정을 떠올리며 흐뭇하게 웃고 있는데, 라이온 백작의 외침에 산통이 깨져 버렸다. 아쉬운 마음에 절로 얼굴이 구겨진다.
“다 듣고 있다. 계속해.”
“……방금 이 이야기만 세 번째 하는 겁니다. 오늘따라 영 집중을 못 하시는 것 같습니다만.”
웃는 표정이나 그의 손에 든 서류가 점점 구겨지는 것을 보니 화가 잔뜩 났군. 중요한 대화 중이라는 걸 알면서도 자꾸 집중이 휴게실로 향해 있어서, 그런 나의 태도가 상당히 재미있고 기가 찼다.
르슈아가 황궁으로 오기 전까지만 해도 참 재미없는 하루가 지속되는구나 싶었는데. 최근 들어 삶의 질이 크게 상승하는 만큼 집중력이 현저하게 떨어지는 것을 스스로도 잘 느끼고 있었다.
조금 전까지 내 품에서 바르작거리며 끙끙 앓던 르슈아의 야릇한 표정이 연신 눈앞에 아른거렸다. 혹여나 휴게실 밖으로 목소리가 새어 나갈까 봐 꾹 참으면서도 내 손길을 피하지 않던 어여쁜 내 사랑.
지금쯤 책을 읽거나 낮잠에 빠져 있으려나.
르슈아의 걱정대로, 그녀에게 흠뻑 빠져 국정에 등을 돌릴 가능성이 아주 커 보였다. 물론 르슈아가 그렇게 내버려 두진 않겠지만.
“알았다. 집중하지. 그래서 가벨론 공작의 측근이 붙잡힌 첩자에 대해 증언하겠다고 몰래 찾아왔다 하였나?”
“그것 보십시오. 그 질문만 세 번째입니다. 방금도 설명해 드렸는데, 대체 왜 그러시는 겁니까? 설마 이것 역시 또 새로운 장난이시라면……!”
“딴 생각한 건 인정하겠다. 그러니 그만 화 내고 다시 설명해 봐. 이번엔 제대로 들을 터이니.”
라이온 백작은 안면 근육을 파르르 떨며, 하고 싶은 말은 많지만 꾹 참겠다는 듯 내면의 깊은 분노를 긴 한숨으로 토해 내었다. 나는 모른 척 라이온 백작의 손에 들린 서류를 낚아채 그가 조사한 내용들을 훑어보며 이어지는 말에 귀를 기울였다.
“그 증언하겠다는 이가 가벨론 공작의 오른팔입니다. 지금껏 공작에게 충성을 다하던 측근이 갑자기 배신하려는 저의를 믿을 수가 없습니다.”
“……이 서류의 내용이 그 공작의 오른팔이라는 녀석에게서 나온 거라 하였나?”
“그렇습니다. 그가 누설한 그 내용은 극히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고 하였습니다. 아마 알고 있겠지요. 우리 쪽에서 그 말을 전부 믿어 주지 못할 것이라는 사실을 말입니다.”
서류에 적힌 내용이 흥미로웠다면 솔깃했겠지만, 아쉽게도 이미 모두 짐작하고 있는 것들이라 딱히 동하지는 아니하였다.
그렇기 때문에 그자의 의도가 상당히 궁금해진다. 가벨론 공작이 실패하였다는 것을 직감했기 때문에 내게 조금이나마 면책을 받고 싶어서인지, 아니면 이 또한 그들의 계략인지.
‘정말 지겹군. 황태후의 측근들은 전부 박쥐 같은 간사한 놈들밖에 없는 건가.’
가능한 스스로 자멸하길 바랐는데 참으로 질긴 생명력이다. 이런 오합지졸로 제국을 집어삼키려 했다니. 생각할수록 웃음만 나오는 상황이다.
“그자를 직접 만나 봐야겠다. 가벨론 공작의 오른팔이라던.”
“직접 만나시는 건 위험합니다. 함정일지도 모를 일 아닙니까?”
“걱정 마라. 쥐도 새도 모르게 잠시 대면하고 오겠다.”
나는 휴게실 쪽을 힐끔 살피며 내 옆에 서 있는 카시안과 시선을 마주하였다. 지난번에 르슈아에게 장난을 걸다가 뒤통수를 제대로 맞은 일 때문에 아직도 꽁해 있었다. 녀석에게 사내의 넓은 아량을 바라는 건 무리이므로 내버려 둘 생각이지만.
“카시안. 안쪽은 별문제 없나?”
“살의를 가진 이는 없습니다, 주군.”
“……무슨 뜻이지, 그건?”
“꽤 흥미로운 대화를 나누고 있는 것 같아서 내용에 집중하고 있었습니다만.”
순간 얼음물을 뒤집어쓴 듯한 충격을 느꼈다. 숨이 턱 막히는 기분에 앞뒤 가릴 것도 없이 그 자리에서 일어나 휴게실을 향해 빠르게 걸었다.
“폐하?”
가슴이 서늘해진다. 대화라니. 대체 누가 그 비밀스러운 장소를 들락날락한다는 것인가. 황제 이외에는 그 누구에게도 발설하지 않은 곳이건만.
만약 르슈아에게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상상만 해도 끔찍하여 정신이 아찔해진다. 그녀의 안전을 위해 그 험난한 길을 헤치고 무사히 내 곁에 두었는데, 제발 별일 없기를!
집무실 서재의 책장 사이로 성큼성큼 걸어 들어가 가장 얇은 책을 살짝 빼냈다. 곧 소리 없이 책장이 뒤로 밀리고 나는 그 틈새로 들어가 굳게 닫힌 방문을 벌컥 열었다.
“슈아!”
분명 그녀가 앉아서 책을 읽고 있던 소파가 비어 있다. 침대에도, 테이블 의자에도, 휴게실의 내부에는 르슈아의 머리카락 하나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뛰어난 경관을 자랑하는 창문이 딱 하나 활짝 열려 있었고, 그 창문 너머의 허공을 보자마자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슈아……!”
정신을 잃은 듯 깊게 잠이 든 채로 둥둥 떠 있는 르슈아와, 그 옆에서 나를 향해 삐딱하게 웃고 있는 나의 형님. 머릿속이 새하얗게 변한다. 형님이 르슈아를 이용해 복수를 꿈꾸고 있음을 알기 때문에. 단 한 번도 내게 적의를 보인 적이 없었기에 내게도 버려졌다는 배신감을 가지고 있을 줄은 전혀 예상도 하지 못했었다.
설마, 나를 향한 복수를 이제 와 르슈아를 통해 저지를 생각인 것인가.
“그러지 마십시오, 형님. 슈아의 손끝 하나라도 건드린다면…… 나는 내가 형님께 무슨 짓을 할지 장담할 수 없습니다.”
분노가 턱 끝까지 차올랐다. 고작 그런 이유로 죄 없는 이에게 해코지를 하다니. 그것도 내가 가장 아끼고 사랑하는 이를!
그러나 형님은 코웃음을 치면서 나를 향해 손바닥을 흔들어 보이기까지 하였다.
“카시안!”
당장 르슈아를 데려오라는 명령을 하달하기도 전에, 형님과 르슈아가 눈앞에서 순식간에 사라져 버리고 말았다. 순간적으로 이성을 잃을 뻔하였다. 생각지도 못했던 일이 벌어졌고, 르슈아가 위험에 처하였음을 직감했기 때문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