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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만의 비밀스러운 꽃 (91)화 (92/113)

91화

늦은 밤의 황궁은 아주 고요하였다. 인기척 하나 느껴지지 않아서 까치발을 들고 걷는 나와 에쉬의 발소리가 크게 들릴 정도다. 어두컴컴한 길을 한 치의 고민 없이 익숙하게 가르며 걷는 에쉬가 불빛 하나 없는 건물의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여긴 내 어머니께서 머물던 별궁입니다. 돌아가신 이후부터 줄곧 비어있던 곳이어서 아무도 없습니다.”

“일부러 비워둔 건가요?”

“아바마마께서 향후 백 년간 비우라 명하셨답니다. 해서 황제 이외에는 누구도 얼씬거릴 수 없는 구역이기도 하지요. 가끔 청소하는 시종들 몇 명 정도?”

지난번 에쉬 어머니의 사유지였던 그곳처럼 이곳도 사람의 온기는 느껴지지 않지만 그 저택보다는 더 깨끗했다. 그만큼 선황이 아끼고 사랑했다는 증거겠지. 백 년간 추모를 하고 싶은 그 마음이 얼마나 애틋했을지 알 것만 같았다.

에쉬가 현관 근처의 촛대에 불을 붙이고 그것을 든 채로 나를 2층으로 안내하였다. 그럼 앞으로 나는 국혼이 성사되기 전까지 이곳에서 머물게 되는 걸까?

“카시안이 황제궁에 당신이 머물 비밀 장소를 준비하고 있을 겁니다. 믿을만한 이들을 추리고 저들이 심어둔 심복들을 찾아내는데 시간이 조금 걸릴 것이라.”

“아, 그래서 카시안을 먼저 보낸 거군요.”

여기도 그리 안전한 곳은 아니기 때문에 나를 황제궁에 머물도록 하려는 거겠지. 나는 여기 머무는 것이 개인적으로 편하긴 하겠지만, 언제 유령이 내 앞에 나타날지 모르니까.

“일단 잠시 이곳에서 대기합시다. 편하게 앉아요.”

2층에서 어떤 방으로 들어간 에쉬가 온통 하얀 천으로 덮인 것들 중 하나를 거둬냈다. 그러자 멀쩡한 소파가 모습을 드러냈고, 나를 그곳에 앉힌 뒤에 촛불을 끄고 내 옆에 나란히 앉았다.

그래도 황궁에 들어오니 조금 안심이 되어 어깨가 축 늘어졌다. 잠도 거의 못자고 씻지도 못한 상태라 고단하기도 하고. 진이 빠져버려서 소파에 그대로 녹아내렸다.

“이런 기분이군요. 적들이 사방에 깔려 조금의 긴장도 늦추지 못하는 기분.”

“저들은 아직 발톱을 드러내지도 않았습니다. 시작도 하지 않았습니다만.”

“……그, 그렇지요. 이제 첫발을 들여놓은 셈인 거지요?”

내가 그동안 얼마나 편안한 삶을 살아왔는지 또 뼈저리게 느낀다. 황족이라는 위치가 부럽게 느껴지겠지만, 호시탐탐 노리는 자들로 항상 두려움 속에서 살아야 한다는 것을 아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물론 현 제국의 형세가 워낙 불안정하다 보니 더 그렇게 느끼는 것일 테지만.

시무룩한 나를 그가 한 팔로 감싸 안아 자신의 어깨에 기대게 하였다. 그리고 내 머리에 뺨을 가져다 대며 설핏 웃음을 흘렸다.

“복잡하게 생각할 것도 없습니다. 이번 일만 잘 정리되면 그저 영지 하나 꾸린다 생각하고 편안하게 내정을 관리하세요. 황태후까지 그 자리에서 끌어내리면 황궁에 남아있는 황족은 우리뿐일 겁니다. 그러니 더 수월할 지도요.”

그 과정이 가장 어려운 거 아닌가? 황태후의 폐위를 손바닥 뒤집듯 너무 쉽게 입에 담아서 현실감이 떨어졌다. 당연히 승리를 거머쥘 수 있는 강한 패를 지니고 있기 때문에 이렇게 확신하는 거겠지.

“큰일을 치르기 전에 저한테도 미리 언질 좀 해줘요. 매번 놀라서 심장이 무사하질 못하다니까요?”

“저도 그때그때 상황에 따라 패를 꺼내기 때문에 가능할진 모르겠지만, 최대한 노력은 해보도록 하겠습니다. 그 전에 잠깐 눈을 좀 붙여두세요. 카시안이 돌아올 때까지.”

워낙 잠귀가 밝아 마차에서도 잠을 제대로 자지 못했다. 그래서 그의 다독거림을 받으며 조용하고 푹신한 소파에 자리하고 있으니 점차 나른하여 졸음이 쏟아지는 건, 어떻게 보면 아주 당연한 결과였다.

그렇게 깊은 잠에 빠졌다가 개운하게 눈을 떴을 때에는 낯선 침실의 침대 위였다. 상당히 어두워서 아직도 밤인가 싶었으나 저 멀리 닫힌 커튼 사이로 강렬한 빛줄기가 쏟아져 들어오고 있었다.

‘분명 소파에서 잠들었는데. 언제 침실로 온 거지?’

침대 위에는 나뿐이었고 에쉬가 머물렀던 흔적도, 온기도 남아있지 않았다. 그래서 설마 이 모든 것이 꿈은 아니겠지 싶어 볼을 살짝 꼬집어보았다.

“아야…….”

아픈 걸 보니 현실은 현실인데. 입고 있는 드레스도 어제 그 엉망인 드레스 그대로였다.

도톰하니 포근한 이불을 거둬내고 푹신한 침대에서 내려와 주위를 슬쩍 둘러보니 제법 화려한 실내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지난번 내가 황궁에 묵었던 그 거처만큼 대단히 수려하였다. 온통 우아하면서도 고풍스러운 분위기에 주눅이 들 정도다.

앞으로 국혼이 성사되면 내가 지내게 될 황후궁도 이렇게 휘황찬란하겠지. 분위기에 압도당하면 안 돼. 그럼 에쉬의 옆에 나란히 설 수도 없을 거야.

나는 두 눈을 질끈 감으며 손바닥으로 양 뺨을 찰싹찰싹 소리가 나도록 때렸다. 이제부터라도 마음을 굳게 먹어야 하므로. 편안하고 안락하길 원했던 삶은 버리기로 했으니까.

“일어났습니까, 슈아?”

그때 닫혀있던 방문이 달칵 소리를 내며 열렸다. 그리고 열린 문틈 사이로 근사한 제복을 차려입은 에쉬가 환한 미소를 지으며 들어왔다.

지난번처럼 왕관은 없었지만, 군청색의 각이 딱 잡힌 제복 하나로도 번쩍번쩍 빛이 나는 것 같았다. 의복 하나가 사람의 위치를 새로 만든다더니. 이게 에쉬의 원래 모습이겠지.

그래서 내가 입고 있는 후줄근하고 엉망인 드레스가 너무 비교되어 선뜻 그에게 다가가질 못했다. 하지만 그런 걱정을 하기도 전에 그가 성큼성큼 내게 다가와 나를 와락 껴안아 주었다.

“여기는 내 집무실 바로 옆에 붙어있는 휴게실입니다. 원래 침실 옆방에 마련하려고 하다가 여기가 덜 눈에 띌 것 같아서 준비를 다시 하게 했지요.”

“당신 휴게실을 제가 빼앗아버렸네요.”

“아니지요. 더욱더 편안하고 기분 좋은 휴식을 할 수 있게 되었다고 생각했는데. 꽤 깊이 잠들었었나 보더군요. 당신이 완전히 잠들어서 이동 중에도 깨지 않았다길래 나는 무슨 일이라도 생긴 줄 알았습니다.”

“……나를 누가 여기로 옮겼는데요?”

“카시안이 당신을 안고 건물 외벽을 타고 올라와 이곳까지 안전하게 모셔왔지요.”

건물 외벽을 타? 그런데도 내가 깨지 않았다고?

“깨지 않은 것이 천만다행이었네요.”

하마터면 트라우마가 생길 뻔했다. 높은 곳을 좋아하지 않아서. 피곤했던 건 신의 한 수였을지도.

내 말에 기분 좋게 웃는 에쉬와 한참을 껴안고 있다가 문득 내 드레스 상태를 떠올렸다.

“의복 더러워져요, 에쉬.”

“갈아입으면 그뿐, 괜찮습니다. 조금만 더 당신을 느끼고 싶어요.”

“밤새 무슨 일 있었어요? 그들이 새벽에 확인 차 황궁에 사람을 보낸다고 했잖아요.”

“호위 기사들을 잠복시켜 붙잡아 감옥에 가둬놓았습니다. 혀를 깨물어 자결하려기에 조금, 난폭한 방법을 써야 했지만요.”

내가 잠들어있는 사이에 큰일이 벌어졌구나 싶어 심장이 펌프질을 하듯 격렬하게 뛰었다. 우리가 미리 들어 알고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겠지.

“공작은 당연히 사실을 부인하겠지요?”

“뻔뻔한 낯짝을 하고 자신을 몰아간다고 오히려 큰소리를 칠 가능성이 크겠지요. 해서 이번에는 그냥 조용히 있어 보려고 합니다. 제 발이 저려 본성을 드러낼 때까지.”

지난번 연회 때처럼 한 번에 물어뜯을 생각인 모양이다. 황궁에 첩자를 보내는 일이 마치 놀러 가는 일처럼 쉬운 공작에게 크게 한 방 먹일 수 있기를 바랄 뿐이다. 가장 좋은 방법은 황제암살미수 건으로 가문을 몰락시키는 거지만.

“아무튼 당분간 국혼날까지는 이곳에서 지내야 하는데, 괜찮겠습니까? 밖에 나가는 것도 밤늦게나 가능할 겁니다.”

“저는 괜찮아요. 읽을 책이나 자수만 있으면 며칠 몇 달도 버틸 수 있어요. 괜히 밖에 돌아다녔다가 누구 눈에 띄기라도 하면 기껏 숨어들어온 보람이 없을 테고. 약점 잡히는 건 딱 질색이에요.”

특히나 황궁에는 보이지 않는 적이 어디든 숨어있을 것이다. 황태후의 사람도 위험하다. 방심했다가는 내 뒤통수를 가격할 테니.

가만히 내 대답을 듣던 에쉬가 내 몸이 부서져라 더욱 꽉 끌어안아 주고는 팔을 풀고 씩 웃었다.

“그러고 보니 아직 커튼을 닫고 있었군요. 창밖의 풍경도 제법 볼만할 겁니다.”

말하면서 창가로 다가가 빛을 막고 있는 커튼을 확 쳤다. 빛이 얼마나 강렬한지 어두운 방을 한순간 밝혀주어 눈이 부셨다. 겨우 빛에 적응하고 나서 창밖을 바라보다가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우와…….”

한 폭의 그림처럼 아름다운 자연의 경관이 펼쳐졌다. 일반적으로 좁은 아치형의 창문이 아니라 거의 한쪽 벽 전체가 전부 다 유리였다. 밖으로 나갈 수 있는 발코니도 굉장히 크고 넓어서 가슴이 탁 트인다고 해야 하나.

그 유리창 너머로 거대한 산과 깨끗한 계곡이 한눈에 들어왔다. 가을이라 알록달록한 옷을 입기 시작한 나무들의 풀 내음이 절로 나는 기분이었다. 게다가 무지개가 드리워진 아름다운 폭포수까지.

“이 휴게실로 들어오는 입구는 대대로 이 집무실을 사용하는 황제들만이 알고 있는 비밀 통로와 이어져 있습니다. 책장으로 가려져 있거든요. 오래전 아바마마께서 제게 따로 알려주셨지요. 아마 다른 형님이나 동생들은 모를 겁니다.”

업무에 지치면 이곳에 들어와 이 장관을 보고 번다한 마음을 가라앉혔겠지. 여기 있기만 해도 여행을 온 기분을 만끽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너무, 아름다워요.”

“개인적으로 겨울에 눈이 소복이 쌓인 자연이 가장 아름다웠습니다. 올겨울엔 당신과 함께 볼 수 있겠군요.”

그가 작년 여름에 크게 다쳐 두 계절 동안 치료에 전념했었다. 그때는 그가 장담할 수 없는 자신의 미래로 인하여 적당한 벽을 세워서 조금 섭섭해했던 기억이 있다. 모든 것을 정리하고 돌아온 이후부터는 상당히 급작스러운 관계 발전이 있기는 했지만.

“정식으로 국혼을 치르면…… 당신과 계절마다 추억을 남겨두고 싶어요. 평생 절대 잊혀지지 않을 추억으로.”

내 말에 그의 두 눈이 기묘하게 반짝거린다. 밝은 햇빛 때문일까? 어쩐지 조금 목구멍이 타들어 갈 정도로 강렬한 연갈색의 눈동자에 담긴 불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게 되어버려서.

왠지, 터지면 안 되는 폭죽에 불을 붙인 느낌인데. 괜찮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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