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0화
딱 하나 부러운 것이 있다면 저 둘이 부부 사이라는 거다. 내 주위의 부부들 대부분 사이가 좋아서 행복에 겨운 모습을 자주 보다 보니 나도 빨리 정식으로 결혼을 진행해 저 대열에 합류하고 싶은 욕심이 샘솟았다.
후작 부부를 심드렁하게 바라보던 에쉬가 카시안을 향해 마차에 묶여있는 말들을 턱짓으로 가리켰다. 그러자 카시안이 자연스럽게 마차에 묶인 말 줄을 풀어내며 정리하는 사이, 그가 내게 조금 더 가까이 붙어서는 흐뭇하게 웃으며 귓가에 작게 속삭였다.
“그리 부럽습니까? 비엔트 왕국에서도 왕비의 회임소식에 상당히 부러워했다던데. 아이를 바라고 있을 줄은 몰랐습니다.”
“……회임을 부러워했다기보다는, 저렇게 행복한 가정을 꾸리는 이들이 부러워요. 워낙 어릴 때 사이가 좋지 않아 불화가 생기는 귀족들 이야기를 많이 듣다 보니 결혼에 대해 딱히 긍정적인 생각을 가지진 않았었거든요.”
“내 아바마마께서 내 어머니를 사랑했던 것처럼, 내 온 마음과 몸을 바쳐 당신을 사랑할 겁니다. 세상 모든 이들이 당신을 부러워할 만큼.”
예전에는 그가 이렇게 말하면 그저 기분이 좋아지곤 했는데, 이제는 조금 겁부터 난다. 이 달콤한 속삭임이 그저 상대를 홀리기 위한 입에 발린 말이 아님을 알기 때문에. 황제가 여자에 미치면 나라의 근간이 어지러워진다는 이야기가 있던데, 그게 에쉬가 될까 봐 걱정이 되어서.
“폐하께서 그리 애틋하게 바라보는 상대가 생길 줄이야. 조금 질투가 나네요. 승하하신 선황 페하께서 이 장면을 보셨으면 꽤나 흐뭇해하셨겠습니다.”
기분 좋게 웃는 후작 부인의 얼굴에 인자한 미소가 가득하다. 후작과 마찬가지로 후작 부인 역시 에쉬와 친분이 있는 걸까? 황실과 제법 친분이 있는 것 같은데.
그러나 에쉬는 삐딱하게 웃으며 카시안이 끌고 오는 두 마리의 말 중 하나에 나를 올려 태우면서 심드렁한 어조로 대꾸하였다.
“누가 보면 후작이 너를 냉대하는 줄 알겠구나. 욕심도 많기는. 널 구제해준 네 남편에게 평생 감사하고 살아.”
“그럴 생각입니다. 폐하께서는 그 집착 좀 적당히 하시지요. 듣기론 아주 민망할 정도라던데. 그러다가 영애께서 기겁하며 도망이라도 가버리면 어쩌려고요.”
“별 걱정을 다 하고 있군. 관둬라. 네 일이나 신경 쓰고.”
어째 대하는 태도가…… 파빌리엔에게 대하는 것과 비슷한데. 설마 같은 황족인 건가?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몰라 눈동자만 데굴데굴 굴리다가 후작 부인과 눈이 딱 마주쳤다.
그러자 생글생글 더 환하게 미소를 짓는 후작 부인이 내게 가볍게 목례를 하였다.
“처음 뵙습니다. 리리안이라고 불러주세요.”
“……반가워요. 저는 르슈아예요, 부인.”
아직 서로 이름을 부르기에는 초면인지라 조심스러웠다. 그러자 이름을 불러주지 않아 조금 서운하다는 듯 눈썹 끝을 축 내려서 조금 미안하기도 했고.
“조만간 정식으로 찾아뵙겠습니다. 아마 출산 이후가 되어 시일이 조금 걸리겠지만요. 부디 그때까지 황궁을 잘 지켜주시길 바랍니다.”
“네. 노력해보겠습니다.”
나쁜 의도는 없어 보였다. 만약 그랬다면 에쉬가 상대도 하지 않았을 테니까.
그 이후로 우리는 그 자리에서 바로 말을 출발시켜 사람들의 눈을 피해 한적한 숲길을 요리조리 달렸다. 후작 부인에 대해서 묻고 싶었으나 빠르게 달리는 말 위라서 입도 뻥긋하지 못했다. 그랬다가는 혀를 깨물려 크게 다칠 수도 있을 테니.
확실히 제국의 지리를 잘 알고 있는지 길이 아닌 숲길을 이용하는데도 거침이 없다. 너무 빨라서 눈을 제대로 뜰 수도 없었다. 게다가 안장도 없어서…… 엉덩이뼈가 이대로 부서지면 어쩌나 걱정이 되려던 찰나.
“다 왔습니다. 제국 수도 성문만 지나면 황궁까지는 그리 멀지 않으니 금방 도착할 수 있을 겁니다.”
에쉬가 말을 멈춰 세워 천천히 몰았다. 이제 좀 제대로 숨을 쉴 수 있는 기분이어서 대답도 하지 못하고 호흡을 고르기만 했다. 이렇게 오래 말을 타고 달려본 적이 없다 보니.
진짜 별 경험을 다 하는구나 싶어 웃음이 나기도 했다.
조금 더 가니 수도를 둘러싸고 있는 높은 성벽이 나타났다. 황궁을 둘러싼 성벽까지 총 세 개의 성문이 굳건하게 지키고 있으니 전쟁이 발발해도 쉽게 함락당하진 않을 것이다. 우리 왕국은 고작해야 수도를 둘러싼 성벽 하나가 고작인데.
이번에도 외진 성벽 근처에서 말을 세우고 내려 아까와 똑같은 방법으로 인장을 이용해 개구멍을 열고 그 안으로 들어갔다. 두 번째인데도 여전히 낯설고 너무 비좁았다.
“대체 얼마나 자주 다녔으면 그렇게 자연스러워요? 나는 드레스가 이렇게 다 엉망이 되는데, 당신은 너무 깨끗해요.”
“자주 해 봤으니까요. 귀족가의 비밀문은 서서 지나갈 수 있는 크기라고는 하지요. 하지만 제국을 지키는 성벽에 그런 큰 비밀문을 만들면 마법사들이 그것을 노리고 이용할 테니 최대한 작게 만들었다고 합니다.”
“그렇네요. 뭐, 이번이 아니면 또 이곳을 이용할 일이 있을까 싶기도 하고.”
“글쎄요? 과연? 앞으로도 꽤 자주 이용하게 될 것 같은데.”
가지런한 치아가 드러날 정도로 음흉하게 웃는 에쉬의 생각을 단번에 파악할 수 있어서 또 속이 화끈거렸다. 그 비밀문을 통과한 이후, 우리는 조용한 수도에서 사람들이 다니지 않는 으슥한 골목길을 이용해 황궁으로 향했다.
“텐부르크 후작 부인 말이에요. 혹시, 황녀 전하인 거 아니에요?”
“맞습니다. 첫째 황녀였지요. 그 위로 어렸을 때 죽은 황녀들이 굉장히 많았습니다. 병이며 사고며 전부 죽어 나가 무사히 자라난 황녀는 리리안과 레이니드 둘뿐이지요.”
역시 황녀였구나. 하나도 닮은 구석이 없는 걸 보니 황실 명부에 올라간 이름뿐인 황녀겠고, 실상은 황족이 아닐지도 모른다. 어차피 황녀라고 해봐야 결혼하는 상대에 따라 작위가 달라지니 친자검사에서 배제되었을 것이고. 힘없는 가문에 시집을 보내버리면 그뿐이라 여겼을 터.
“당신하고 사이가 좋았나요?”
“그저 그랬습니다. 있는 듯 없는 듯. 둘째 형님과 남매였는데 둘 사이도 그리 좋지 않았고, 그냥 모든 황족들과 데면데면했었지요. 워낙 성격이 소극적이었던지라 겁이 많다고 해야 할지. 결혼하고 많이 좋아진 겁니다.”
“아까 듣기로 후작이 구제를 해주었다 하였는데, 무슨 일이라도 있었던 거예요?”
에쉬는 바로 대답해주지 않고 정면을 응시하며 생각에 잠겼다. 말하기 어려운 일이라도 있었던 걸까? 보통 구제라고 하면 수렁의 구렁텅이에 빠졌을 때 누군가 구해준 뜻으로 하는 말이니까. 별일 아니었다면 바로 대답을 해주었을 텐데. 역시 어려운 가족사라서?
“그래도 둘째 형님이 형제들 중 그나마 인간적이었던 거였을 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때는 다 똑같은 머저리라고 생각했는데.”
간혹 에쉬의 입에서 저런 과격한 단어가 나올 때마다 심장이 흠칫한다. 그가 온실 속의 화초로 자라온 건 아니었음을 느끼게 해주기도 했고.
“이제 와 그런 생각이 드는 거예요?”
“곱씹어보니 그렇군요. 그래도 혈육이라고 제 여동생을 움직이는 살덩이로만 보진 않았던 것 같습니다. 황태자가 죽기 전에 리리안을 겁탈하려던 것을 당시 후작의 후계자였던 루엔이 막아주었고, 그것을 둘째 형님이 중재해주었지요.”
“……맙소사.”
그 황태자가 정말 미친 사람이구나 싶다. 그때 보았을 때도 영 께름칙하더니. 그래도 같은 황족인데 황족끼리 그 무슨…….
“설마, 황녀라는 지위 때문인가요?”
“무슨 생각으로 그리했는지는 모릅니다. 당사자만이 알겠지요. 추측으로는 그것도 가능성이 충분하다 여겨집니다. 그러고 나서 둘째 형님이 황태자를 독살하게 되었거든요.”
복수였구나. 황태자는 황제를, 그리고 2황자는 방심한 틈을 타 황태자를. 모든 일에는 그만한 원인이 있다고는 하지만, 그런 엄청난 일이 숨어있을 줄이야.
“여러모로…… 황실이 혼란스러웠네요.”
“사실 저는 둘째 형님이 끝까지 잘해주길 바랐습니다. 하지만 역시 귀족의 도움을 받아 황위를 찬탈하면 그들에게 끌려다니게 되는 건 어쩔 수 없나 봅니다. 역사적으로도 그렇고.”
그의 깊은 한숨에 많은 의미가 내포되어 있음을 안다. 이런 상황에서 내가 도와줄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어서 그게 조금 슬펐다. 할 수 있는 것이 위로밖엔 없으니까.
힘내라고, 나도 옆에서 최대한 많이 힘이 되어주겠다는 뜻으로 그의 팔뚝을 조심스레 잡고 어깨에 머리를 기대려는데.
‘응?’
갑자기 내 허리에 팔을 감은 에쉬가 강하게 당겨 건물 옆의 좁은 골목으로 잽싸게 들어간다. 얼떨결에 벌어진 일이라 정신이 하나도 없어서 상황을 파악하기도 전.
우리가 걸었던 그 길 맞은편에서 천천히 다가오는 말발굽 소리와 함께 두 사람의 대화가 들려왔다.
“황제 폐하께서 어제부터 보이질 않았다는 말, 진짜인가?”
“예. 황궁 내부에서 쉬쉬하고 있지만 심어둔 시종의 말에 의하면 하루 꼬박 황제궁에서 갈아입은 의복이나 사용한 침구들이 나오지 않았다고 하더군요. 목욕시중을 드는 일도 없었다고 했습니다.”
“이 시국에…… 이 또한 계략인 건지 모르겠군. 오늘 새벽에 놈들을 시켜 황궁으로 보내. 황제가 자리를 비운 것이 진짜인지 확인을 해봐야겠다.”
“예, 저하.”
……오늘 참 여러모로 별의별 이야기를 다 듣는구나. 에쉬에 대한 소문도 모자라 이번에는 황궁에 암살자를 보내겠다니.
저하라고 부를 만한 사람이라면 공작위를 가진 이인데. 워낙 목소리가 작아서 잘은 모르겠지만.
무리해서 오늘 입궁한 것이 천만다행이다. 아니었으면 저들의 수작질에 황위가 또 빼앗길 뻔하였으니.
말발굽 소리가 멀어져 들리지 않을 때까지 우리는 그 자리에 가만히 있다가 동시에 한숨을 크게 내쉬었다.
“그 사람인 거죠? 가벨론 공작.”
“텐부르크 후작에게 공작위를 내릴 일도 머지않았군요. 일단 조금 서둘러 입궁하겠습니다. 카시안, 너는 먼저 입궁하여 상황을 살펴보도록.”
“예, 주군.”
카시안이 먼저 사라졌고, 나와 에쉬는 느긋한 마음을 접은 채로 황궁을 향해 거의 뛰다시피 걸음을 재촉하였다. 발바닥에 불이 나도록 걸어 도착한 황궁 성벽에서도 똑같이 개구멍을 만들어내 그 사이로 들어가 몰래 입궁하는 일을 성공리에 끝마쳤다.
이제부터 시작이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