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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만의 비밀스러운 꽃 (89)화 (90/113)

89화

나는 흙과 풀잎으로 엉망이 된 드레스를 손으로 털어내며 나를 도와 치맛자락을 정리해 주는 에쉬에게 물었다.

“그래서 이제, 황궁까진 어떻게 가요?”

“황궁으로 가기 전에 잠시 들를 곳이 있습니다.”

“어딘데요?”

“음……. 말을 훔치러?”

“후, 훔쳐요?!”

황제라는 사람이 말을 훔친다니. 이제는 그가 황자 시절 때 무슨 짓을 하고 다녔는지 궁금해졌다. 말을 훔친다는 것이 이렇게 자연스러울 일인가 싶어서 혼란스럽기도 하고.

“그보다, 아까 그 대화는 신경 쓰지 마십시오. 신경이 안 쓰일 수 없는 내용이긴 하지만 원래 다 그런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저 자기들이 상상하기 좋은 방향으로 생각하고 그걸 진실로 받아들여 즐기는 것처럼.”

솔직히 나보다 그가 더 분노하는 것 같았는데. 잔뜩 굳어있던 표정은 어느새 말랑하게 풀어졌고 싸늘하던 눈빛에 다시금 활기가 돌았다. 워낙 어두워서 또렷하게 보이는 건 아니었지만.

“이래서 주목받는 것도 좋은 일만은 아니라고 생각해요. 그냥 조용히 살고 싶은데…… 아니, 그렇다고 국혼을 후회한다는 건 아니에요. 오해하지 말아요.”

“오해 안 합니다. 저 역시 같은 생각인지라. 그 마음이 충분히 이해가 됩니다.”

서로 같은 마음. 그도 조용한 삶을 원했기에 황위를 욕심내지 않았으나 그를 죽이려는 자들이 어떻게든 그를 찾아내 위협하여 곤혹스러웠을 터. 그가 어떤 마음으로 황좌를 찬탈하였는지 알기 때문에. 나는 조금 울적해지는 마음에 한숨을 푹 내쉬며 그의 품에 답삭 안겼다.

“끝까지 뜻을 함께하기로 약속했으니 앞으로 나약한 소리를 하지 않을게요. 나는 당신을 믿어요, 에쉬. 그 어떤 허무맹랑한 소리에도 절대 흔들리지 않도록 노력할 거예요.”

“내가 더 잘하겠습니다. 행여 누가 이 가슴에 대못을 박는다면 숨기지 말고 말해주세요. 그래야 그 같잖은 놈 모가지를 끊어놓든 야비한 혓바닥을 잘라내든 벌을 내릴 수 있으니까.”

진짜 그럴 것 같아서 아주 조금 겁이 나긴 했다. 그가 무서워서가 아니고 그런 상황이 벌어진다는 상상을 하니까 조금 끔찍해서.

그런 우리를 보며 또 콧방귀를 뀌는 카시안 때문에 둘만의 분위기가 파스스 깨어졌다. 이번에는 좀 살벌한 분위기여서 다행이라면 다행이랄지.

“이쪽으로 갑시다.”

에쉬가 내 손을 꼭 잡고 어디론가 인도하였다. 혹여 성벽 위에서 누가 우리를 발견할까 봐 긴장을 늦추지 않으며 그와 보폭을 맞추려 노력했다. 

“국경지역인데, 여기는 누구 관할이에요?”

“텐부르크 후작령입니다. 여기서 멀지 않으니 조금만 서두릅시다.”

멀지 않다는 건, 그 텐부르크 후작령에서 말을 훔치겠다는 건지. 남의 귀한 말을 훔치는 건 범죄인데. 이래도 되나 싶어 마음이 불편해졌다. 물론 나중에 다 충분히 변제하겠지만 그래도.

에쉬를 말려야 할까 싶었다가도 이 밤이 지나기 전에 황궁으로 들어가 몸을 숨기는 것이 먼저이긴 해서.

언덕과 숲으로 이루어진 길은 꽤나 험난하긴 했다. 사람이 다닐 수 있는 길목처럼 바닥이 평평하지도 않았고, 어둠에 가려진 바닥은 보이지도 않아서 발에 걸리고 치이는 것이 전부 풀 아니면 돌부리였다. 몇 번 넘어질 뻔한 것을 에쉬가 잡아주었고, 땀은 삐질삐질. 어제부터 제대로 씻지 못해 몸에서 냄새가 날 것만 같았다.

“주군. 길목에 마차가 한 대 옵니다. 후작가의 문양이 얼핏 보이는데요.”

뒤따라오던 카시안이 그 자리에 우뚝 멈춰 섰고, 에쉬도 카시안이 바라보는 곳을 빤히 바라보며 명령을 하달하였다.

“가서 확인해봐. 안에 누가 타고 있는지.”

“예.”

대답과 동시에 폴짝 뛰어오른 카시안이 그 거대한 체구와 다르게 날렵함을 자랑하며 아주 가뿐하게 나무를 탔다. 시야에서 금세 사라져버린 카시안이 신기해서 그 자리를 물끄러미 올려다보고 있었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나타난 그가 우리 앞에 착지한다.

“텐부르크 후작과 후작 부인입니다. 외출했다 돌아가는 듯합니다.”

보고를 받은 에쉬가 씩 웃으며 눈썹을 휙 들어올렸다.

“영지까지 가지 않아도 되겠군요. 일이 잘 풀리겠습니다.”

“……후작을 만나려는 거예요? 아니, 지금 후작가 마차의 말을 훔치려는 것?!”

상당히 경악할 노릇이다. 하지만 에쉬는 딱히 걱정될 것도 없다는 듯 어깨를 으쓱거리고는 카시안에게 턱짓을 보였고, 말하지 않아도 이해했다는 듯 다시 아까 사라진 방향으로 빠르게 향한다.

그리고 에쉬와 나는 카시안이 떠난 방향으로 걸음을 옮겼다. 대체 이게 다 무슨 영문인지. 불안함에 손바닥에서 식은땀이 배어 나오기까지.

“보면 알 겁니다. 그리 걱정하지 않아도 되는 상대임을요.”

“황제파인가요?”

“그렇다고 볼 수 있지요. 오래된 친우 중 한 명이기도 합니다.”

텐부르크 후작이 에쉬의 친우라. 그럼 훔치지 않고 빌릴 수도 있다는 건가. 그렇다면 그나마 다행이긴 한데.

그래도 마음이 영 놓이질 않아 아랫입술을 가볍게 깨물며 앞으로 나아갔다. 곧 어두운 숲길 너머에 조금 넓고 평평한 길목이 드러난다. 사람이나 마차가 다니는 길인 것 같았다.

그 길목 위로 고급스러운 마차가 서 있었고, 그 주변에 기사로 보이는 장정 여섯 명이 전부 바닥에 쓰러진 채였다.

“……이게 대체.”

분명 카시안의 짓이겠지.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어떻게 이런 짓을 저지를 수 있는 거냐는 눈빛으로 에쉬를 보려다가 마차 문이 열리길래 다시 숨죽여 정면을 살폈다. 마차 안에서 나온 젊은 귀족 남자가 나와 에쉬를 보고는 상당히 난감하다는 듯 설핏 웃었다.

“폐하. 이번에는 또 무슨 일을 저지르신 겁니까. 정말이지, 지난번과 너무 똑같은 패턴이라 이제 놀랍지도 않지만. 가문의 기사들이 노이로제 걸리겠습니다.”

진짜 아는 사이라는 듯 친근하게 대하는 그 남자가 에쉬를 향해 정중히 묵례를 하였다. 진짜 황제파의 사람이긴 한 것 같은데.

‘어디서 본 것 같기도 하고…….’

너무 어두워서 잘은 모르겠지만 확실히 눈에 익은 얼굴이었다. 사람 얼굴을 잘 기억하지 못하는 편이라서 자신은 없지만, 지난번 연회장에서 보았던 얼굴들을 머릿속으로 천천히 나열하며 하나씩 판별해보았다.

“그런데, 폐하? 같이 계신 그분은 누구십니까?”

그 남자의 눈동자가 나를 향하자마자, 머릿속을 배회하는 수많은 얼굴 중 하나가 그 남자와 겹쳐진다.

그래, 맞아. 그때 연회장에서, 제국의 귀족 중에서 가장 마지막으로 에쉬와 인사를 하던 그 남자. 에쉬가 믿고 국무를 맡기어 지금껏 음지에서 고군분투하며 에쉬의 복귀만을 기다렸던 그 귀족.

그런데 왜 나를 몰라보지? 그때 분명히 한번 눈을 맞추고 인사까지 했는데. 설마 나처럼 사람 보는 눈이 흐린 건가?

“아, 후작은 처음 보겠군. 이쪽은 비엔트 왕국의 마르엘 백작 영애, 곧 제국의 황후가 될 나의 소중한 이다.”

처음 봐? 나를?

텐부르크 후작의 눈이 크게 당황한 듯 떨리는 것이 내 눈에도 보인다. 그러더니 황급히 허리를 숙여 내게 인사를 건넸다.

“초면에 실례가 많았습니다. 텐부르크 후작입니다. ……그런데 어쩌다가, 두 분이 이렇게 월담을 하신 겁니까?”

“예비 황후를 노리는 위험한 인물이 있어서. 왕국이 위험하다 판단하여 내가 직접 데리고 오는 길이다. 내 곁이 더 안전할 테니까.”

“누굽니까? 감히 국혼을 앞둔 예비 황후 폐하를.”

“일전에 말했던 나의 대리인. 인간이 아닌 자기 자신의 복수를 위해 나의 가장 소중한 이를 노리고 있지.”

텐부르크 후작도 그 유령의 존재를 알고 있나 보다. 그만큼 에쉬가 믿고 있다는 뜻이겠고.

해서 나는 목을 가다듬으며 후작에게 되물었다.

“저……. 지난번 연회에서 저와 한번 마주치지 않았던가요?”

“연회라 하시면 어떤……? 아, 건국기념일에 열린 그 연회 말씀이십니까?”

“네.”

“그때 저는 폐하의 은밀한 명을 받아 제국을 떠나있었습니다. 아마 그날 마주한 이는 제가 아니라 제 동생일 겁니다.”

형과 동생이 그렇게 닮을 수 있나 싶었는데, 옆에서 에쉬가 궁금증을 바로 풀어주었다.

“저쪽도 쌍둥이거든요. 동생 쪽이 라이온 백작으로 제 수하가 되어 일하고 있는 녀석이지요.”

그제야 모든 것이 아주 쉽게 이해가 되었다. 어쩐지 너무 닮았더라니. 이쪽도 쌍둥이였어.

“제국에는 쌍둥이가 참 많네요.”

“많다기보다는 쌍둥이라서 쌍둥이를 잘 이해하는 편이랄까요? 그 계기로 빠르게 친해졌습니다.”

성향이 너무 다른 나와 에브린이 친해진 것처럼, 저들도 그런 것일까? 에쉬에게 믿고 의지할 수 있는 친구가 있어서 마음이 더욱더 놓였다.

“아무튼 사정이 이러하여 말 두 필을 좀 빌려야 할 것 같은데.”

“꼭 지금이어야 했습니까? 영지에 도착한 후에 말하셨어도 얼마든지 드렸을 텐데요.”

“오늘 밤중으로 황궁에 도착해야 해서 마음이 급했다.”

“제 부인이 임신 중인 거, 아시면서 이렇게 나오시면…….”

“루엘 님. 저는 괜찮으니 폐하께 말을 내어주세요.”

마차 안에 있던 여자, 텐부르크 후작 부인이 제법 나온 배를 팔로 감싸면서 카시안의 에스코트를 받아 마차에서 내렸다.

후작 부인은 성인이 된 지 얼마 되지 않은 듯 나와 또래로 보였다. 깨끗하고 순박한 인상과는 다르게 조금은 매서워 보이는 눈빛은 태생부터 귀족이었음을 여실히 드러내고 있었다.

그나저나 저 부른 배로는 오래 걷기도 힘들어 보이는데. 여기서 영지까지의 거리가 얼마나 될지는 모르겠지만.

“부인, 하지만 영지까지 걷기에는 무리입니다. 차라리 같이 마차를 타고 영지까지 함께 가는 것이…….”

“폐하께서 몰래 움직이신다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조용히 영지를 지나쳐 가시려면 말을 타고 가시는 것이 더 낫겠지요. 저는 정말 괜찮습니다. 오랜만에 루엘 님과 함께 걷고 싶어요.”

후작 부부의 사이가 제법 좋은 것 같았다. 후작 부인이 해사하게 웃으며 조곤조곤 이야기하자, 후작의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오르면서 어쩔 줄을 몰라 하는 것이 꼭.

‘처음 연애해보는 순진한 남자 같네.’

에쉬도 저렇게 풋풋할 때가 있었지 싶어 괜히 웃음이 났다. 본성은 순진과는 거리가 상당히 먼 남자였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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