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8화
나는 두 주먹을 불끈 쥐고 에쉬를 향해 비장하게 물었다.
“국경을 넘는다 해도 또 황궁을 둘러싼 그 높은 성벽을 타고 올라가야 하는 건가요?”
“국경만 넘으면 나머지는 어렵지 않습니다. 성벽을 조용히 건너는 방법이 따로 있으니 걱정 마십시오. 드레스가 엉망이 될 수도 있습니다. 그건 각오를 하셔야 할 겁니다.”
드레스가 걱정이 되는 건 아니었지만, 몰래 입성하는 것이니 만큼 만만치 않은 일일 것이다. 살다 살다 제국 국경을 몰래 넘게 되는 날이 올 줄이야.
“에쉬 당신을 만나면서 참 별일을 다 해보네요. 본가 월담조차 단 한 번도 해보지 못했는데.”
마차 안에서 드레스를 갈아입으며 터지는 웃음을 주체할 수가 없었다. 재미있어서가 아니라 그냥 지금 이 상황이 조금 어이가 없어서. 에브린이라면 이런 모험을 상당히 즐거워했을 텐데. 나는 아직 간덩이가 그만큼 붓지도 않았단 말이다.
괜히 이 일에 걸림돌이 될까 봐 걱정이 크다. 어차피 국경을 몰래 넘다가 걸린다 해도 에쉬가 황제이기 때문에 조용히 풀려날 가능성이 크다지만. 그랬다가는 어떻게든 에쉬를 끌어내려는 이들에게 약점이 잡히는 거니까.
심각한 나와 다르게 에쉬는 그저 해맑기만 했다. 조금 더 편한 드레스로 갈아입고 나오는 내게 입을 맞추고 흐트러진 머리카락까지 정리해주는 여유를 보이고 있었다.
“너무 걱정하지 않아도 됩니다. 우리에겐 아주 예민하고 정확한 감지기가 있으니까.”
“감지기요?”
그가 턱짓으로 마차를 이곳까지 끌고 와 말고삐를 풀어내 주는 카시안을 가리킨다. 그 말의 의미를 바로 깨달았다. 과거 에쉬가 황궁에 혼자 잠입하여 황제궁을 쉽게 장악할 수 있었던 것은 카시안이 있었기 때문이리라.
그래서 마음이 푹 놓였다. 적이라면 상당히 골치 아프겠지만 아군이니까.
두 필의 말 위에 카시안과 에쉬가 올라탔다. 그리고 나는 에쉬의 도움을 받아 그의 등 뒤에 올라탔고, 두 사람은 천천히 말을 몰아 조용히 움직였다.
어제는 그렇게 밝던 하늘이었는데 오늘은 구름이 잔뜩 껴서 어제와는 대비되는 암흑이 내려앉았다. 둥근 달의 끄트머리가 보일락 말락, 연신 구름에게 잡아먹혀 사라지길 반복한다.
우리가 제국 국경을 몰래 넘는다는 것을 하늘이 알고 도와주는 걸지도.
숲길을 지나자 낯선 길이 계속 이어졌다. 신중하게 말을 모는 에쉬가 주변을 경계하고 있어서 괜히 나도 숨 쉬는 것조차 조심하게 되었다.
곧 저 멀리 높은 성벽이 드러나기 시작했고, 어느 정도 가까워진 이후에 말을 멈추어 함께 내렸다.
“이쪽에 대대로 황제들만 비밀스럽게 출입이 가능한 숨겨진 입구가 있습니다. 아바마마께서 내게만 알려주신 출입구였지요.”
“……황제만 아는 출입구를 내가 알아도 되는 거예요?”
“어차피 인장이 없으면 문을 열 수가 없습니다. 위치를 안다고 해도 무소용이지요.”
“황자의 난이 발발할 때, 그렇게 해서 제국을 무사히 빠져나올 수 있었군요.”
그의 황금빛 검. 선황께서 하사하였다는 황제의 인장이 담긴 그것이 그의 목숨을 살린 것이다. 선황께서는 이런 것도 전부 예상하고 있었을까? 그렇지 않고서야 인장이 담긴 검을 아무리 어여삐 여긴 아들이었다 해도 쉽게 넘길 수는 없는 것일 텐데.
선황이 당한 일을 떠올리면 참 씁쓸하여 가슴이 먹먹해졌다. 본디 제왕의 자리는 그 어떤 것 하나 자신의 뜻대로 이룰 수 없는 위치라 하였으니.
씁쓸함에 입맛을 다시며 에쉬의 손을 잡고 고요한 성벽을 향해 걸었다. 카시안이 두 필의 말에게 무어라 중얼거리자 놀랍게도 말이 알아들었다는 듯 머리를 끄덕거리고는 반대 방향으로 다시 가버렸다.
“에쉬. 지금, 카시안과 말이 대화한 거예요?”
“무슨 문제라도 있습니까?”
아무렇지도 않게 되묻는 에쉬의 물음에 이제 완전히 이해가 되었다. 어제의 그 뱀도, 카시안이 동물과 소통이 가능해서 해결할 수 있었던 거다. 그럼에도 내게 좋지 못한 감정을 품어 직접 손을 쓰지 않았던 것임을 깨닫기도.
정말 그가 인간이 아니라는 걸 다시 한번 느끼게 되는 순간이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카시안은 우리를 뒤따라오면서 주변을 경계하였고, 우리도 으슥한 풀숲을 거침없이 헤치며 전진하자 까마득히 높은 벽이 눈앞에 나타났다.
“주군. 성벽 위에 기사가 지나갑니다.”
누가 있다는 말에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그러나 에쉬는 그저 뒤로 한발 물러나 나무 아래 서서 성벽 위를 물끄러미 바라보기만 했다.
정말 누군가 지나가는 것을 증명하듯 횃불의 일렁거림이 얼핏 보였다. 두근두근, 바로 아래쪽을 보거나 혹여 나뭇가지를 밟아 소리가 날까 봐 그 자리에 바짝 굳었다.
숨소리도 죽여 가며 펄떡거리는 가슴을 손바닥으로 꾹꾹 눌러 침착함을 되찾으려고 애를 쓰는 사이.
“야, 너 들었어?”
성벽 위에서 기사의 목소리가 들려와 나도 모르게 힉, 숨을 들이켰다. 너무 긴장하고 있었나 보다. 놀란 나와 다르게 에쉬는 한 팔로 내 어깨를 감싸서 당겨 안아주었고, 카시안은 비웃듯 키득키득 코웃음을 쳤다.
아직도 어제 삐친 것이 남아있는 모양이다. 속도 좁지.
다행히 성벽 위의 기사들이 내 목소리를 듣지는 못한 듯 대화를 이어갔다.
“뭘 들어?”
“새 황제 폐하께서 승하하신 선황 폐하의 진짜 혈육이 맞다고 소문이 자자하더라고.”
“진짜 혈육이라니?”
나는 두 눈을 동그랗게 뜨며 에쉬를 올려다보았다. 분명 선황께서 친자확인을 위해 검사를 진행했고, 그 검사 결과가 세상에 드러나기도 전에 사망하여 완전히 묻힌 것으로 알고 있는데.
그 소문이 어떻게 퍼졌냐는 눈빛으로 물었으나 에쉬는 그에 대한 내용을 입도 뻥긋하지 않았다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어떻게 된 일일까 싶었는데.
“선황 폐하께서 그렇게 여색을 밝히는 분이라더니, 지금 황제 폐하께서도 만만치 않다던데? 최근 가벨론 공작가에 황제 폐하께서 몰래 드나들고 있다는 걸 공작가의 사용인들이 몇 번 봤대. 그 공작가 막내 영애하고 그렇고 그런 사이라더라.”
“황제 폐하께서 그 공작가와 사이가 좋지 않다던데?”
“표면적으로는 그래도 실질적으로는 아닌가 봐. 귀족들이 다 그렇지 뭐. 그래서 얼굴을 반쯤 가렸대. 워낙 미모가 출중하신 분인지라 그렇게 가린다고 가려질 외모가 아니지. 그러니까 바로 들켰고.”
순간 머리가 차갑게 식어버렸다. 나도 모르게 싸늘한 눈빛으로 에쉬를 노려보았고, 에쉬는 저도 놀랐다는 듯 당황한 기색으로 두 눈꺼풀을 빠르게 팔랑거리면서 고개를 휘휘 저었다.
머릿속으로는 이미 알고 있었다. 가벨론 공작가에 드나든다는 황제 폐하는 에쉬가 아니라 그 유령이라는 것을. 가장 엮이기 싫은 가문에 스스로 들어갈 에쉬가 아님을 알기 때문에.
그럼에도 불구하고…… 화가 난다. 그저 소문일 뿐인데 뱃속에서 거대한 불꽃이 소용돌이치는 느낌이다. 저런 헛소문이 돌게 한 그 유령이 너무도 밉다. 어머니의 배 속에서 에쉬를 살려낸 은인이긴 하지만, 유령 주제에 우리 둘째 언니의 목숨을 탐내고도 내 어머니에게 복수를 하겠다며 나를 향해 칼날을 벼르고 있다는 것도 밉고.
“흠, 그 소문 진짜야? 비엔트 왕국의 백작 영애와 국혼을 앞두고 있는데?”
“그러니까 씨도둑은 못 한다는 뜻이지. 결국 하고많은 영애들 중에서 고작 백작가의 여식을 황후로 들이는 이유도 그런 거 아니겠어?”
“원하는 상대를 침소에 들여도 문제가 없기 때문에?”
“그렇지. 에휴, 수많은 정부로 인해 황후궁에서 홀로 눈물을 흘리고 있을 그 영애가 참으로 안타깝구만. 그 예비 황후 폐하가 되실 분께서 그리 미인이라던데. 결국 이렇게 이용당하고 버려지게 될 줄 누가 알았겠나. 나라도 위로해드리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은데 말이지.”
그 위로라는 단어를 뱉어내며 낄낄거리는 것이 좋은 의미는 아닌 것 같았다. 불쾌감이 스멀스멀 피어오른다. 말로 농락당하는 것이 이런 것일까?
“그런데 이상하지 않아? 만약 그게 사실이라면 가벨론 공작의 영애와 국혼을 치르면 되지, 왜 굳이 다른 왕국의 보잘것없는 가문을 택하셨을까?”
“으이구, 이 멍청아. 머리가 있으면 생각을 해. 딱 보면 모르냐? 그만한 권력을 가진 이를 옆에 앉혀놓으면 또 선황 폐하 시절처럼 분란이 생기기 마련이니까. 황제 폐하께서 아주 비상한 머리를 가지셨다더니 이런 쪽으로도 손색이 없으신 것 같은데?”
잠시 멈춰서 대화를 나누던 그 기사 두 명의 목소리가 점점 멀어져갔다. 그리고 나와 에쉬는 그들이 완전히 사라지고도 한참 동안 침묵 속에서 허공만 노려보았다.
에쉬는 에쉬대로, 나는 나대로 분노를 삭이는 중이었다.
“주군, 안 가십니까? 곧 다른 기사들이 순찰을 올 겁니다.”
“……알았다.”
카시안의 말에 대답하는 에쉬의 목소리에 짜증이 묻어나 있었다. 만약 내가 이 자리에 없었다면 아까 그 기사를 잡아다가 계속 지껄여보라고 으름장이라도 놓을 태세다.
대체 그 유령의 목적이 무엇이기에? 가벨론 공작과 결탁한 건, 복수를 위해서일까? 가벨론 공작은 그 유령에 대한 사실을 어느 정도 알고 있을지.
여러모로 생각이 많아지는 이야기다. 아예 모르는 것보다 이렇게라도 듣게 되어 조금은 다행이라는 생각도 든다. 모르고 당하는 것보다 알고 대처를 준비하는 것이 더 나을 테니.
기분은 아주 불쾌하지만.
곧 에쉬가 아무도 없는 성벽으로 걸어가 검 손잡이에 담겨진 인장을 꺼냈다. 어느 돌 하나에 인장의 크기만큼 파인 작은 홈이 있었고, 그곳에 인장을 끼워 맞추자 소리 하나 없이 작은 개구멍이 생겼다. 딱 한 사람씩 기어서 출입할 수 있을 만한 구멍이었다.
그래서 드레스가 엉망이 될지도 모른다는 거였구나.
“슈아. 제가 먼저 들어갈 테니 바로 넘어오십시오.”
“네.”
에쉬는 많이 해봤다는 듯 아주 자연스럽게 엎드려 낮은 포복으로 쉽게 통과하였다. 아주 비좁은 곳인데도 이렇게 저렇게 몸을 비틀면서 지나가길래 별거 아니다 싶었는데.
“윽……!”
분명 내 어깨가 더 좁은데도 불구하고 똑바로 들어가니 껴버린다. 어릴 때로 돌아간 기분이기도 하다. 나무에 잘 오르던 에브린을 보고 나도 잘할 수 있겠지라는 생각에 따라 올랐을 때, 이만큼 힘들었다. 요령이 없는 거겠지.
“어깨를 비스듬히. 대각선으로 세우고 한 팔을 먼저 이쪽으로 꺼내세요. 그게 편할 겁니다.”
혼자 끙끙거리며 안절부절못하고 있으려니 에쉬가 웃으며 내게 손을 내밀었다. 해서 나는 그의 말대로 몸을 비틀어 한 손을 먼저 꺼내 그의 손을 잡았고, 그가 끌어주어 겨우 그 구멍을 빠져나올 수 있었다.
“이런 좁은 곳을 대체 어떻게 쉽게 빠져나갈 수 있는 거예요?”
“요령껏? 황궁에도 이런 개구멍이 있거든요. 그곳을 자주 이용했던지라.”
그리고 이어서 카시안이 아주 쉽게 통과하여 오는 것을 보고, 문제는 유연하지 못한 내 몸뚱이라는 것을 새삼 다시 느끼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