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7화
에쉬와 함께 도착한 호수는 연못이라 하기엔 좀 크고 호수라고 하기엔 작은 애매한 물가였다. 한밤중이어서 온통 새까맣긴 한데 오늘 뜬 보름달이 무척이나 밝아서 그 달빛이 수면에 반사되어 시야가 트이긴 하였다.
호숫가 앞에 나를 내려놓은 그가 갑자기 신발을 벗고 바지를 벗길래 순간 반사적으로 고개를 휙 돌렸다.
“에, 에쉬? 바지는 왜…….”
“보기만 했지, 들어가 본 적은 없어서 깊이가 얼마나 되나 확인해봐야겠습니다.”
이제 와 그의 탈의에 놀라다니. 아직도 적응이 안 되는 건 여전해서 눈 둘 곳이 없다. 하의는 물론 상의까지 전부 벗은 그가 호수 안쪽으로 천천히 걸어 들어갔다.
오늘따라 구름 한 점 없는 맑은 하늘에 뜬 화사한 달빛의 영향일까? 그가 수면을 가르고 지나갈 때마다 잔잔한 호수에 생긴 파동이 신비롭게 반짝반짝 빛났다. 그 위로 언제 봐도 근사한 에쉬의 뒤태가 시야에 들어와 입술이 바짝 마른다.
쩍쩍 갈라진 등 근육과 떡 벌어진 어깨, 그리고 잘록한 허리와 곧게 뻗은 척추 아래의 단단하고 둥근 엉덩이. 그가 움직일 때마다 전신의 근육들이 군무를 추듯 아름답게 일렁거렸다.
그의 나체를 몇 번 보기는 했지만, 볼 때마다 늘 똑같은 느낌이었다. 가슴이 저릿해지고 온몸이 간질거리는 감각. 아랫배가 뜨거워지면서 신경이 예민하게 곤두세워진다.
“생각보다 깊지는 않은 것 같습니다. 이쪽으로 들어오세요, 슈아. 치맛자락 젖지 않게 잘 정리하고.”
무릎 깊이에서 멈춘 그가 갑자기 몸을 돌려 나를 부르면서 손을 내민다. 하늘의 천사가 강림하여 내게 손을 내밀면 이런 모습일까? 말로 다 표현할 수 없는 아름다운 이가 내 사람이라니.
나는 홀리듯 그를 향해 물가로 걸어갔다. 드레스가 젖는다는 사실은 중요하지 않았다. 이미 생각보다 몸이 먼저 반응을 보였다. 아니, 고민도 되지 않는 지극히도 자연스러운 행동이었다.
하늘에서 천사가 현신하여 내 앞에 나타난 것처럼 황홀한 저 광경은 그 누구도 속수무책으로 빠져들게 할 테니까.
그가 호수로 들어가는 나를 맞이하기 위해 내게 다가왔다. 경사는 완만했으나 제법 깊어 몇 걸음 걷지도 않았는데 무릎까지 잠겼다.
고인 물이 아니라는 듯 그렇게 미끄럽진 않았다. 어두워서 더러운지 깨끗한지는 모르겠지만 비릿한 물 냄새가 제법 산뜻하여 그렇게 거부감이 들지 않았다. 차갑고 시원한 물에 완전히 들어가 몸을 담그고 싶을 정도로 기분이 좋았다.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그가 이미 젖어버린 치맛자락을 들어 올려 물기를 꾹꾹 짜서는 내 손에 쥐어주었다.
“드레스가 젖으니 잘 정리하고 들어오라 하지 않았습니까?”
“지금 달빛이 드리워진 당신의 모습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신이 있다면 이런 모습이지 않을까 싶었어요. 나도 모르게 발이 먼저 나가버렸다고요.”
은근히 구박하는 그를 향해 입술을 삐죽 내밀고 투덜거리면서도 시선은 그에게서 떠나질 못했다. 달빛 아래의 그가 너무 근사했다. 침실에서의 느낌과는 사뭇 다른 고귀함과 경건함에 사심이 가득 담겼던 더러운 내 마음이 깨끗하게 정화되는 그런 기분이기도 했고.
내 말에 잠시 회로가 멈춘 듯 두 눈을 끔뻑거리는 그가 청아한 웃음소리를 터트렸다. 넓은 호수에 그의 웃음소리가 메아리처럼 작게 퍼졌다.
“오래전부터 제국의 황제는 신격화되어 숭배하는 이들이 있다던 그 말이 떠오르는군요. 설마 슈아 당신에게 그런 말을 들을 줄이야.”
“숭배할 만해요. 만약 에쉬가 정식으로 사람들 앞에 모습을 드러내면, 아마 그 숭배자가 우후죽순으로 늘어날걸요? 지난번 건국기념일 연회 때도 제국 귀족이며 타국에서 온 손님들로 보이는 이들까지 에쉬를 보는 눈빛이 남달랐다고요.”
“보답할 수 없는 마음까지 신경 쓸 여력 따위 없습니다.”
딱 잘라서 대답한 에쉬가 치마를 전부 정리하고는 이미 엉망으로 찢어지고 너덜거리는 속바지와 속옷을 벗겨내 주었다. 도저히 손쓸 수도 없을 속바지의 상태를 보니 마차 안에서 그와 저질렀던 아찔한 기억이 떠올라 다리가 절로 바르르 떨린다.
그걸 에쉬가 봤는지 소리 없이 웃으며 내 앞에 쪼그려 앉는다.
“조금만 참으세요. 단지 씻겨내기만 할 겁니다.”
말하면서 수면의 물을 손으로 살짝 퍼 허벅지 사이에 끼얹어서 퍼뜩 놀랐다. 물이 제법 차서. 아니, 다리 사이가 너무 뜨거워서 차갑게 느껴지는 걸지도 모르겠지만.
조심스럽게 다리에 들러붙은 이물질을 닦아내는 그의 손길이 상당히 부드러웠다. 담백하게 씻어내는 일에만 집중하는 그의 시선이 내 다리에 꽂혀있어서 그런지 묘하게 긴장이 되었다.
그의 속마음이 어떨지는 모르겠지만.
찰박, 찰박, 물소리와 멀리서 울리는 풀벌레 소리만 뒤섞여 울리고 있었는데.
“주군. 뒤.”
찰랑거리는 수면이 맞닿은 뭍 너머에서 카시안의 목소리가 나직하게 울렸다. 동시에 에쉬가 멈칫하더니 눈빛이 서늘하게 가라앉는다.
무슨 일이라도 생긴 건가 싶어 심장이 철렁 내려앉는 순간, 카시안이 에쉬를 향해 자신의 황금빛 검을 던졌고 그것을 받아낸 에쉬가 검을 뽑아내지도 않은 채 뒤로 휘둘렀다.
퍽!
무언가 검집에 맞는 둔탁한 소리와 함께 가느다랗고 길쭉한 것이 옆으로 날아가 풍덩 빠졌다. 사람은 아닌 것 같았다. 해서 그 수면 위로 올라와 둥둥 떠 있는 것을 자세히 보았다.
“……헉? 뱀?”
제법 크고 긴 뱀이었다. 촘촘한 비늘이 그것을 증명해주고 있었다. 순간 소름이 확 일었다.
에쉬는 그것을 보고는 한숨을 푹 내쉬며 다시 검을 카시안에게 던져서 넘겼다.
“일부러 그러는 거냐? 하여간 저 못 말리는 녀석 같으니라고.”
일부러? 뭐가 일부러라는 거야?
그러자 검을 가뿐히 받아낸 카시안이 눈꼬리를 둥글게 휘고는 거만하게 턱을 치켜들었다.
“무슨 말씀인지 모르겠군요. 도와드리려고 했는데 제 선의를 이리 박해하는 겁니까?”
“저들을 부리는 건 네 주특기인데, 저 뱀이 우리를 공격하려고 다가왔다면 네가 알아서 해결할 수 있는 상황이었다. 굳이 내 손으로 처리하게 하는 건 못된 심보지. 아닌가?”
“별걸 다 트집이로군요. 그럼 제가 그쪽으로 가서 주군의 소중한 분이 다리를 훤히 드러내고 있는 그 모습을 봐도 된다는 겁니까?”
그러자 에쉬가 입을 꾹 다물고 카시안을 지그시 노려보았다. 카시안이 그 뱀을 공격하지 않고도 충분히 해결할 수 있는 문제임에도 불구하고 그러지 않은 이유가 충분히 납득이 되기 때문에 아무 말도 못하는 걸로 보인다.
어깨를 으쓱거리는 카시안이 몸을 돌리면서 에쉬를 향해 픽 웃었다.
“적당히 하고 나오십시오. 보는 눈들이 많습니다. 하늘이 부끄러운 줄도 아셔야지요.”
황제에게 저런 식으로 충고를 남길 수 있는 사람이 세상에 몇이나 될까. 아주 뿌듯하다는 듯 생글생글 웃는 카시안이 다시 숲속으로 들어가 모습을 감추자, 에쉬가 입맛을 다시며 아까보다 조금 더 빠르게 내 다리를 닦아주었다.
그렇게 대충 씻고 나서 다시 뭍으로 올라와 엉망인 속바지로 물기를 닦아냈다. 그도 다시 의복을 갖춰 입고 우리는 다시 작은 집으로 돌아왔다. 그때까지도 서로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나는 힘이 들어가지 않아 후들후들 떨리는 다리를 움직이기 위해 입술을 꽉 깨문 채로 집중하기 바빴다.
덕분에 그 거처 안으로 들어왔을 때는 땀에 흠뻑 젖어 아까보다 더 엉망인 꼴이 되어버리고 말았다. 하체는 그나마 좀 덜 찝찝해졌는데 이번에는 얼굴이며 등이 땀범벅이라서.
“……아, 미안합니다. 당신이 걷기 힘들다는 걸 깜박하고……. 말이라도 했어야지요.”
뒤늦게 내 얼굴을 본 그가 미간을 좁히며 손으로 내 이마의 땀을 훔쳐내 주었다. 나는 새침하게 입술을 삐죽 내밀고 장난삼아 불평을 뱉어내었다.
“그렇게 무서운 얼굴로 딴생각에 빠져 있는데 내가 뭐라고 하겠어요? 입만 뻥긋해도 그 사나운 눈빛으로 나를 볼까 봐 얼마나 무서웠는데요.”
“설마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다른 뜻은 없었습니다. 그저 지금 누군가 우리를 몰래 염탐하고 있는 것 같아서 마음이 급했던 것뿐입니다.”
“염탐이요?”
그 말에 더 놀라서 대답하다가 너무 큰 소리로 뱉은 것 같아 손바닥으로 입을 덮었다. 에쉬는 천천히 고개를 주억거리며 방문을 힐끔 노려보고는 나직하게 속삭였다.
“살기는 없어서 해치려는 의도는 없어 보였습니다. 그저 지나가던 사람인지, 우리를 노리고 엿보고 있었던 건지 모르겠어서. 카시안이 제대로 삐친 걸 보아 우리를 위협하지 않는 이상 도움을 줄 것 같지 않습니다.”
카시안 진짜 속이 좁네. 아까 내가 한소리 했다고 그러는 건가. 인외종족이라서 그런 건 별로 신경 쓰지 않을 줄 알았는데.
“아무튼 황궁으로의 복귀를 조금 더 서둘러야겠습니다. 지금 당장 다시 출발하여 쉬지 않고 달렸으면 하는데, 괜찮을까요?”
“상관없어요. 그런 걸 따질 때도 아니잖아요. 괜히 찝찝한 기분으로 이곳에 더 머물고 싶지도 않고, 당신도 황궁을 오래 비우면 문제가 발생할 수도 있으니 최대한 빨리 돌아가도록 해요.”
그가 황제로서 공개석상에 모습을 드러낸 이상 그 어디도 안전지대는 없음을 뼈저리게 느낀다. 황궁에서도 암살이나 반란에 의한 위협이 항상 존재할 테고. 그렇기 때문에 나를 위협에 빠트리지 않으려 지금껏 여러 가지 시도는 많이 해봤지만 결국 원점으로 돌아오게 된 것이다.
그래서 누구도 원망할 수가 없었다. 싫다고 하여 내 마음대로 모든 것을 뒤엎고 나 몰라라 할 수도 없고. 그와 한배를 탄 이상 생사를 함께하기로 했으니 도망갈 생각보다는 맞서서 싸우는 편을 택하겠다.
해서 우리는 다시 마차에 올라 쉬지 않고 제국을 향해 최대한 멀리 돌아서 달렸다. 말은 중간에 한번 마을에 들러 교체하였고, 그렇게 하루를 꼬박 달려서 다음날 늦은 밤, 제국 국경 쪽에 도착하였다.
“여기서부터는 걸어야 합니다. 일단 드레스부터 갈아입고 나머지는 전부 이곳에 두세요. 나중에 카시안이 가지고 올 겁니다.”
“걸어갈 수 있는 거리예요? 국경에서 황궁까진 꽤 멀던데.”
“몰래 들어가는 거라서요. 일단 국경을 넘어가는 것이 가장 큰 숙제인지라. 조금 험난한 여정이 될 수도 있습니다.”
국경을 몰래 넘는다니. 지금까지 살면서 단 한 번도 해 보지도, 생각해 보지도 못한 일들이라 입술이 바짝 마른다. 왠지 일탈을 하는 것 같아서. 황제와 예비 황후가 자신의 황궁에 몰래 출입하려고 국경을 넘나든다고 하면 얼마나 황당해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