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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만의 비밀스러운 꽃 (85)화 (86/113)

85화

상업마차의 단점은 창문이 매우 작다는 거다. 그래서 안쪽이 굉장히 어두웠다. 아직 새벽녘의 빛만이 고작이어서 누군가의 검은 실루엣만 어렴풋이 보이고 있었다.

“파, 파빌리엔!”

행여 우리를 해칠 누군가가 우리의 뒤를 쫒아와 이곳에서 기다렸다 생각하니 눈앞이 아찔해졌다. 나도 모르게 비명을 지르며 마차에서 내리려는데, 그 누군가가 내 손목을 덥석 잡아 안쪽으로 잡아끄는 바람에 몸이 휘청거리면서 그대로 중심을 잃고 쓰러져버렸다.

“쉿. 그렇게 소리를 지르면 모두에게 실례지 않겠습니까?”

웃음기 섞인 나직한 중얼거림을 듣기도 전, 내 손목을 잡아챈 그 화끈거리는 익숙한 체온을 몸이 기억하고 있었다. 잊을 수 없는 감촉. 부드러운 손아귀의 힘. 더불어 청아한 웃음소리와 함께 온 신경을 크게 뒤흔들도록 만드는 상냥한 미성.

“에쉬?”

두 눈을 둥그렇게 뜨고 고개를 들자, 뒤늦게 그의 얼굴이 시야에 들어왔다. 가끔 부러울 정도로 곱고 매끄러운 피부와 다부진 턱선, 높게 솟아오른 코와 부드러운 촉감을 가진 입술. 그리고 조금 길어진 연회색 머리카락에 살짝 덮인 쭉 뻗은 눈과 그 안에 담긴 연갈색의 촉촉하고 영롱한 눈동자.

그 고운 뺨에 옅게 새겨진 선명한 상처 자국에 가슴이 뛰었다. 멍하니 그를 올려보다가 정신이 번쩍 든다.

왜 그가 여기 있는 걸까? 꿈을 꾸는 건 아니겠지?

“이게, 어떻게 된 일이에요?”

지금 내가 보는 것이 현실인가 싶어 어리둥절해하는데, 에쉬는 그저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나를 꼭 안아준 뒤 마차 밖에 서 있는 파빌리엔을 향해 명을 내렸다.

“수고했다. 먼저 황궁으로 돌아가서 자리를 지키고 있어. 나는 슈아와 조용히 입궁하겠다.”

“설마 황궁을 비우고 나온 거야?”

“이틀간 잠시 쉴 테니 찾지 말라고 하고 왔지.”

“맙소사, 황제라는 사람이 여자 하나에 미쳐서는 대담한 짓도 하고. 제정신인 거야?”

“시끄럽다.”

더는 잔소리를 들을 가치도 없다는 듯 마차 문을 확 닫아버린다. 그리고 천장을 두 번 쳐서 마차를 출발시켰다.

그때까지도 나는 에쉬의 품에 엉성한 자세로 안긴 채였다. 아니, 뭐 이러고 있으니까 좋기는 한데. 뭔가 오랜만의 재회로 인한 반가움과 감동을 기대하며 그의 품에 달려가 안길 생각만 하고 있어서. 이렇게 마음의 준비도 없이 마주칠 줄은 예상도 못한 터라 머릿속이 홀랑 날아가 버렸다.

무슨 말을 해야 하지? 보고 싶었다고? 다짜고짜 어디까지 알고 있느냐고 물어보기도 그렇고.

“보고 싶었습니다, 슈아. 파빌리엔에게서 대략적인 이야기는 들었는데, 그 유령이 왕국 수도에 나타났었다지요?”

할 말을 고민하는 사이, 내가 하고 싶었던 말을 에쉬가 먼저 꺼내면서 나를 더 꽉 끌어안는다. 그래서 내가 괜한 고민을 했구나 싶어 픽 웃으며 그에게 더 매달려 어깨에 뺨을 비볐다.

“둘째 언니가 그 유령을 봤대요. 얼굴과 몸 절반이 불에 그을린 채였다는데, 아마 카시안과의 싸움에서 얻은 부상이었겠지요? 유령이 다친 모습을 유지하고 있어서 조금 놀라웠어요.”

“그 불꽃은 평범한 것이 아니니까요. 그간 잘 지냈습니까? 소식을 받기는 했지만 확실히 제 눈으로 확인할 수 없어서 초조해지던 차였습니다.”

“네. 잘 지냈어요. 당신이…… 아주 많이 그리워서 견디기가 힘들었지만요.”

매일 그가 바라보던 하늘을 나도 올려다보는 것이 이제는 습관처럼 자리하였다. 혼자 서재에서 책을 볼 때도 산책을 할 때에도 정신을 차리고 보면 어느새 두 눈에 하늘을 담은 채였다. 비가 오건 바람이 불건 흐리건 맑건, 매일매일 다른 색과 다른 모양의 하늘을 보여주는 그 자연의 경관이 너무도 아름다워 눈을 뗄 수가 없기도 했다.

왜 에쉬가 그리도 하늘을 좋아했는지,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시간이기도 했고.

“정말 많이 보고 싶었어요, 에쉬.”

가장 먼저 그 말을 건네지 못해서 아쉽지만, 순서가 문제는 아니니까.

그리고 우리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서로의 입을 맞추고 진한 키스를 나누었다. 아직 완전히 해가 뜨지 않은 이른 아침이기도 하고, 마침 마을을 벗어나 숲길로 들어서는지 아까보다 조금 더 내부가 어두워지기도 해서. 움직이는 마차 안에서 환락에 빠져버리는 건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파빌리엔이 버릇없는 짓을 하지는 않던가요?”

“별로…… 하아, 아 맞다. 파빌리엔이 브링하고 잠깐 만났었다는 이야기, 들었어요?”

목덜미를 타고 내려간 그의 말캉한 입술이 쇄골을 지분거리다가 우뚝 멈췄다. 드레스를 풀어내는 손은 여전히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었지만.

“브레이튼 백작 영애를 말입니까? 파빌리엔 그 녀석이 영애를 만났다고요?”

에쉬도 그 이야기에 대해서는 전무한 모양이다. 파빌리엔이 에브린에게 호위를 붙였다는 것을 알고도 눈치채지 못한 걸까?

“자세하게 털어놓진 않았지만요. 브링을 오늘 만나기로 했었는데 일이 이렇게 되는 바람에 물어보지도 못했어요. 그런데 두 사람 사이에 흐르는 기류가 참 묘하더라고요.”

“기류가 묘하다니?”

“아직 서로에게 애정을 품고 있는 것 같은데 딱 한 번 만나고 관계를 정리했대요. 그 전에 서로 편지도 했다면서. 파빌리엔이 마음에도 없는 상대에게 편지를 보내는 행동이 흔한가요?”

“그럴 리가요. 그 수많은 구애의 편지에도 일말의 관심조차 보이지 않던 녀석입니다. 애초에 결혼할 생각도 없다고 단단히 못을 박았었는데. 왜 하필 당신의 소중한 친구를…….”

파빌리엔은 배우자를 들일 마음이 전혀 없었던 건가? 하지만 전에 내게 반했다며 에쉬와 나의 결혼을 방해하러 왔다면서, 그건 진짜 말 그대로 방해만 하려던 거였을까? 자기가 가질 수 없다면 남도 줄 수 없다는 괴팍한 생각을 했던 것?

하지만 그때 내게 보인 그것은 단순한 호기심이었지, 애정이 기반으로 다져진 연모는 아니었다. 에쉬와 내가 서로에게 흠뻑 빠져 지나칠 정도로 사랑하는 그런 대단한 감정 말이다.

두 사람의 속사정을 확실히는 모르지만, 분명 파빌리엔이 브링에게 미련이 있어 보였는데.

“서로 의견이 맞지 않아서 정리하기로 했대요. 브링은 겉으론 괜찮은 척했나 보던데, 그 속은 꽤 아파하는 것 같았어요. 브링이 제국에서 돌아오자마자 바로 여행을 떠나버렸대요. 워낙 충동적인 성향이 강하긴 하지만요.”

“당신도 걱정이 크겠군요. 가족처럼 친밀한 사이라고 하였으니.”

“원래 사랑이라는 게 그렇기는 하잖아요. 내 뜻대로 되는 것도 아니고, 정말 인연이라면 어떻게든 다시 만나 엮이게 된다고는 하던데. 그게 브링이 다른 남자와 결혼한 이후가 되지 않길 바랄 뿐이에요.”

그럼 외도가 되는 거니까. 특히나 귀족의 간통죄는 처벌이 꽤 컸다. 소중한 나의 친구가 범죄를 저질러 고통스러운 벌을 받아야 하는 건 상당히 가슴 아픈 일이니까.

에쉬도 잠시 생각에 잠긴 듯 조용히 눈동자만 굴리고는 한숨을 폭 내쉬며 싱긋 웃었다.

“그 녀석, 의외로 저보다 더 도덕적인 관념이 철저한 녀석이라 걱정이 되진 않습니다. 알아서 잘하겠지요. 만일 그런 사고를 친다 해도 그건 두 사람의 몫입니다. 그런 사사로운 일까지 신경 쓰지 마세요.”

“유일한 동생에게 너무 매정한 거 아니에요?”

“언제까지 어린아이일 수는 없으니까요. 자신의 앞날에 대해서 스스로 결정해야 할 나이는 충분히 지난 것 같은데…… 내가 아직도 녀석의 뒷바라지를 해야 하는 겁니까?”

“둘째 언니는 지금도 나중에도 계속 제 뒷바라지를 할 생각인 것 같던데요?”

가족이니까. 서로 믿고 의지할 수 있는 세상에서 유일한 내 편이니까. 서로 틀어진 사이도 아니고, 에쉬와 파빌리엔은 서로 하나뿐인 진짜 혈육이기도 하니 서로 의지하면서 잘 지냈으면 하는 것이 나의 바람이었다.

파빌리엔에게 별로 좋은 감정을 가지고 있는 건 아니지만 그에게서 황궁 생활에 대한 비화를 듣고 나니 이제라도 행복하게 잘 살았으면 하는 마음이 생겨버려서.

나는 손가락으로 그의 뺨에 난 상처를 어루만지며 해사하게 웃었다.

“파빌리엔은 자신의 어머니가 겪었던 가문의 일처럼 될까 봐 걱정하는 것 같았어요. 그래서 작위를 받기는 싫고, 보호는 받아야겠고. 브링과의 사랑을 스스로 거부하는 건 역시 불안정한 자신의 위치 때문이 아닐까 싶어요. 내가 잘못 생각한 걸까요?”

“……그렇게 사려가 깊은 녀석은 아니라고 생각했는데, 그래보였습니까?”

“그렇지 않고서야 마음에 둔 이를 그리 매정하게 끊어낼 수 있을까요?”

곰곰이 생각에 잠기면서도 손으로 내 허리를 더듬는 손길은 여전히 끈적하다. 진지하면서도 색정적인 분위기가 아슬아슬하게 넘나들고 있었다. 내가 먼저 꺼낸 이야기인지라 그만하고 하던 일이나 마저 하자는 말을 하기도 민망하고.

……그냥 해버려?

“흠, 당신 말대로 뭐…… 네, 둘 사이는 둘이 알아서 하는 거니까. 우리처럼요. 마음이라는 것이 누가 등 떠민다 하여 저절로 품어지는 것도 아니고.”

에쉬와 단둘만 남아 있는 지금, 이 귀한 시간을 다른 이야기로 소비하고 싶진 않았다. 제국의 건국기념제에 참석하기 전부터 지금까지 거의 한 달 가까이 그를 품지 못해 잔뜩 안달이 난 채라서.

남녀관계가 한 번으로 만족하지 못한다는 것을 뼈저리게 깨닫게 된다. 그와 뜨거운 사랑을 나누는데 장소나 시간 따위 중요하지 않았다. 지금 당장, 그곳이 마차 안이더라도 나를 만족시켜줄 수 있는 그를 전부 품고 싶은 마음뿐이다.

해서 나는 그의 보드라운 뺨을 두 손으로 감싸면서 잔뜩 허기진 눈빛을 담아 촉촉한 입술을 바라보았다. 그저 보고만 있어도 숨이 차고 호흡이 가빠졌다. 심장은 뜨거워지고 온몸의 성감대가 간질간질, 애타게 그의 손길을 원하고 있었다.

부족한 잠으로 인해 피곤했던 것도 전부 가셨다. 오로지 머릿속은 눈앞의 이 근사한 남자로 가득 채워졌다.

“그런데, 우리…… 너무 오래 참지 않았어요?”

그러자 천천히 시선을 들어 나를 마주하는 그의 눈동자에 자작한 불꽃이 솟구쳐 오른다. 그가 나를 간절히 원할 때 보이는 이 눈빛은 조금도 변하지 않았다.

그래서 더욱 기뻤다. 그 살아 움직이는 열기만큼이나 그의 몸도 뜨거워지면서 반응을 보이고 있었기 때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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