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4화
파빌리엔의 행보가 궁금해졌다. 에쉬가 대리인을 세울 때에는 곁을 보좌할 이가 필요했기 때문에 황궁에 남아 있었겠지만, 이제 에쉬가 직접 국무를 처리할 테고 같은 황족이 보좌관으로 있는 경우는 없으니까.
보통 형제 중 한 명이 황제의 자리에 오르면 나머지 황자들은 서열을 포기하거나 작위를 받아 따로 국경 지역을 관할한다고 들었다. 서열을 포기하면 권력 싸움에서 멀어지게 되지만, 황실의 보호를 받을 수 없어 암살에 쉽게 노출되기도 한다. 작위를 받으면 에쉬의 어머니 가문이 그랬던 것처럼 반역이라는 누명을 써 몰살당할 수도 있으니.
‘……음? 설마 파빌리엔이 그런 자신의 처지 때문에 브링과의 사이를 끊어냈던 걸까?’
파빌리엔이 황위에 관심이 없다고는 하지만 지금처럼 황족을 위협하려는 이들이 버젓이 살아있는 상황에서 미래를 예측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가벨론 공작은 파빌리엔을 허수아비 황제로 만들고 싶어 하는 눈치였으니.
더군다나 그들의 어머니가 그렇게 힘든 시기를 보냈던 것을 알고 있으니 혹시 모를 일을 미연에 방지하고자 서로의 마음이 더 커지기 전에 끝내고자 했을 것 같다.
에브린은 벌어지지도 않은 이야기를 꺼내며 밀어내려는 파빌리엔과 반대되는 의견을 제시했겠고.
……나 너무 혼자만의 망상에 취해있는 거 아니야? 그래도 꽤 신빙성이 있는 상황인지라.
“글쎄요. 아직 이후의 일을 생각해 보진 않았습니다만.”
“알기로는 두 가지의 선택지가 있다고 하던데. 그래도 에쉬는 당신이 곁에 남아 도와주길 원하지 않을까요?”
“황궁에서 지내라고 하면 그나마 짧은 명줄이 더 짧아질 것 같아서 말입니다. 이번 사태가 잘 해결되고도 제 육신이 멀쩡하다면 비엔트 왕국에 남아 있는 내 어머니의 사유지에서 조용히 여생을 보내고 싶은 마음은 있습니다.”
아닌 줄 알았는데 내 생각이 맞는 것 같았다. 에브린과의 관계를 정리한 이유 말이다. 자신의 목숨을 보장할 수 없으니 누군가와 깊은 관계를 맺기 두려울 것이다. 그것으로 의견 충돌이 있었겠지.
각자 나름의 사정이라는 것이 있으니 그건 누구도 강요할 수 없는 부분이긴 했다. 안타깝지만, 정말 인연이라면 헤어져도 다시 맺어지기 마련이라는 그 운명이라는 걸 믿어봐야지. 에브린이 그토록 열광했던 단어의 위력을.
“부디 악인의 멸문을 진심으로 바라요. 안타깝게 죽은 영혼들이 그들을 가만히 보고만 있진 않을 테니까.”
모두가 행복해졌으면 한다. 잘못된 생각으로 남의 목숨을 쥐고 흔들려는 그들이 천벌을 받아 조금이나마 죗값을 치를 수 있기를 바란다.
지난번과는 다르게 이번에는 몰래 제국에 입성하는 거라서 중간중간 머무는 행선지를 달리하였다. 둘째 언니가 미리 건네준 문서 하나로 로안트 후작 영지를 조용히 지나 국경을 넘을 수 있었다. 이후부터는 길을 잘 알고 있는 파빌리엔이 조용하고 한적한 마을로 안내했다. 마부에게는 원래 금액보다 두 배를 더 지불한 뒤에 잠자리도 따로 마련해주었다.
그리고 나는 파빌리엔이 몇 번 머문 적이 있었다던 여관으로 함께 향했다. 조금 허름해 보이는 여관의 다 무너질 것 같은 문을 열고 들어갔다. 퀴퀴한 냄새가 나는 실내의 카운터에 여관의 주인으로 보이는 중년 여자가 우리를 스윽 훑어보았다.
“……방 하나요? 둘이요?”
다짜고짜 인사도 없이 방 개수를 물어봐서 당황하다가 얼굴이 달아올라버렸다. 부부냐 아니냐를 묻는 것 같은데. 파빌리엔의 대답이 너무 뻔해서 목구멍이 바짝 마른달지.
“하나면 됩니다.”
“부부요?”
“제가 모시는 귀족 아가씨입니다. 추측은 삼가십시오.”
다행히 파빌리엔이 딱 잘라 대답해주어서 그 중년 여자는 더 말하지 않고 방 열쇠를 내어주었다.
“3층에서 가장 구석진 방이요. 조식은 문 앞에 놓아두면 되오?”
“동이 트면 떠날 겁니다. 몬드론 마을까지 이동할 상업 마차를 한 대 불러 주겠습니까?”
“그러지요.”
대충 용건만 나눈 파빌리엔이 진짜 귀족 가문의 기사라도 되는 것처럼 평소에 안 하던 에스코트를 다 해주었다. 해서 나는 카운터 쪽으로 가볍게 묵례를 건네고 계단을 올라 배정된 방으로 들어갔다.
“외관에 비해 안쪽은 제법 깔끔하네요.”
다 무너질 듯 위태로운 외벽을 보고 솔직히 조금, 이런 데서 내가 잘 수 있을까 싶었는데 생각보다 넓고 아늑하고 청소상태도 양호했다. 지금껏 머물렀던 다른 거처들에 비하면 상당히 형편없긴 하지만 최대한 조용히 움직이려면 이런 허름한 곳이 몸을 숨기기에는 적절하겠지.
“손님의 의복 상태를 보고 방을 내어주는 여관으로 유명합니다. 다른 방에 비해 조금 값이 나가기도 하지요. 그럼 동이 트기 전까지는 출발 준비를 해주시기 바랍니다.”
옷만 몇 벌 챙긴 내 짐 보따리를 구석에 내려놓는 파빌리엔이 방을 나가려고 하길래 나도 모르게 그를 붙잡았다.
“어디 가요? 방은 하나만 빌린 거잖아요?”
“……잘 준비를 하는 동안 잠시 복도로 나가 있겠다는 겁니다. 왜요, 내가 당신의 탈의를 도와드려야 합니까?”
삐딱하게 웃는 파빌리엔이 짓궂게 두 눈을 반짝거린다. 해서 나는 눈을 가늘게 뜨며 이 철딱서니 없는 못된 남자의 등을 한 대 내려치고 싶은 충동을 꾹 눌렀다.
“근접 호위는 곁을 벗어나지 않는 거라면서요. 여기 있어요. 내가 욕실에서 갈아입고 나오면 되잖아요.”
얄미워서 뾰로통하게 대꾸하고는 짐보따리를 풀어 갈아입을 편한 드레스를 꺼내 흥, 콧방귀를 뀌면서 욕실로 들어왔다. 욕실도 단출하지만 제법 깨끗해서 마음에 들었다.
그나저나 사람을 가려서 받는 여관이라니. 운영이야 주인 마음대로겠지만. 알음알음 알고 있는 귀족들은 몰래 여행하고 싶을 때 자주 이용할 것 같기도 하고.
에브린도 여길 알 수 있을지도. 왕국에서 가까운 마을이기도 하고 여행도 꽤 자주 다니니까.
편한 옷으로 갈아입고 욕실을 나오자 때마침 파빌리엔이 창문을 열어서 전서구를 날리고 있었다.
“에쉬에게 보내는 거예요?”
“예.”
“뭐라고 썼어요?”
“비밀입니다.”
아까 내가 타박했다고 삐치기라도 한 걸까? 하여간 웃긴 남자야.
“그러고 보니 에쉬는 마차에 대한 좋지 않은 경험이 있다고 했는데, 당신은 괜찮은 거예요?”
모르는 척 머리를 단장한 장식을 하나하나 빼서 작은 화장대 위에 올려놓으며 물었다. 오는 내내 함께 마차를 타고 왔으나 힘든 기색이 조금도 없어 보이던데.
“아, 딱히. 저도 그날 일은 나중에 들었던 터라 정확히는 모릅니다. 앓아눕느라 형님을 따라가지 못했던 걸 천만다행으로 여기기만 해서.”
“무슨 일이 있었던 거예요?”
카시안도 에쉬가 마차에 대한 끔찍한 기억을 가지고 있음을 암시하였었다. 좋지 못한 그때의 상황을 떠올리면 에쉬가 힘들어할까 봐 묻진 않아서 정확히 알지는 못했다.
그래서 궁금하다. 대충 황궁 생활에 대한 이야기를 들은지라 절대 가볍지 않은 내용임은 짐작할 수 있었지만.
“언제였더라……. 십 년 전쯤일 겁니다. 당시 북동쪽 지역의 왕국, 지금은 사라졌지만 그 왕국과의 교섭을 위해 아바마마께서 직접 형님을 보냈었지요. 처음 맡는 중대한 임무에 호기로운 마음으로 출발했는데 험한 산길에서 갑자기 마차 바퀴가 부서지게 되었답니다.”
“제국의 북쪽 지역에는 꽤 험난한 길목이 많다고 들었는데요.”
“그 산길이 협곡을 끼고 있어서 대부분 절벽이지요. 그 마차 바퀴가 부서진 곳이 하필이면 마차 한 대가 겨우 지나갈 수 있는 곳이었고요.”
“……설마.”
“마차 바퀴가 망가지면서 휘청거렸고, 옆의 낭떠러지로 마차 전체가 기울어 뚝, 떨어졌답니다.”
그냥 일반적인 전복사고가 아니었다. 절벽에서 마차가 떨어지면 그야말로 즉사. 아래가 강이라면 모를까.
“그, 그래서요? 그런데도 지금까지 살아있다면 크게 다치진 않았던 거겠지요?”
“카시안이 괜히 형님의 곁을 지키겠습니까? 떨어지는 마차로 뛰어내려 형님을 꺼내 마차를 밟고 뛰어올라 다시 위로 올라왔다고는 합니다. 물론 마차에 같이 탑승했던 마부와 시종은 그대로 사망했지만요.”
상상만 해도 아찔하다. 카시안이 아니었다면 에쉬도 그 자리에서 절명했을지도 모를 일 아닌가. 협곡을 지나는 황족의 행렬인데 그 전에 마차 상태를 수도 없이 체크하고 방비를 단단히 했을 터인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필 에쉬가 탄 황실 마차의 바퀴가 부서졌다면…….
“일행 중에 밀정이 있었을지도 모를 일이네요.”
“추측만 할 뿐이지요. 마차가 협곡 아래에서 완전히 산산조각이 나 증좌를 찾지 못했으니까요.”
지난번 본가에서 수도로 올라오는 길에 누군가가 우리 가문의 마차 바퀴에 흠집을 냈다고 했었다. 그리고 우리를 따라붙어 감시하는 이도 있었다고.
그때와 똑같은 상황인 것이다. 그날 에브린이 나 대신 마차를 끌고 와야 했던 길목은 조금 험한 산길이었고, 아마 그 흠집이 난 바퀴를 미리 살피지 않았더라면 중간에서 곤욕을 치렀을 것이다. 최악의 경우, 누군가의 공격을 받는다면 도움을 요청하거나 피하기도 어려운 장소에서 위험에 처했을 테고.
“여러모로…… 번다해지는 이야기네요.”
“이미 지나간 일입니다. 구사일생으로 지금까지 살아남은 것도 운이 좋았던 거겠지요. 형님은 그쪽이 그런 것까지 일일이 신경 쓰는 걸 원치 않았을 겁니다. 그러니 이만 주무십시오.”
창문을 다시 꼭 닫고 커튼까지 친 파빌리엔이 침대 근처 기다란 소파 가장자리에 앉아 검을 꼭 쥔 채 눈을 감았다.
에쉬의 마음도, 파빌리엔의 말도 어떤 의미인지 너무 잘 알아서 가슴이 욱신거린다. 헤아릴 수 없는 아픔이 너무도 많은 이들. 황족이지만 갖은 위험 속에서 스스로를 보호해야 했던, 누구보다 힘든 시기를 보냈을 두 사람이 언제쯤이면 편안하게 삶을 누릴 수 있을까.
먹먹해지는 가슴을 안고 침대에 누워 잠을 청해보려고 애를 썼다. 화가 나면서도 슬픈 이 복잡한 감정이 교차하여 번다해진다. 해서 뜬눈으로 밤을 샐 뻔하다가 겨우 뒤늦게 잠에 빠지긴 했다.
늦게 잠든 만큼 동이 트는 것도 모르다가 파빌리엔이 조심스럽게 깨우는 소리에 겨우 일어났다.
“잠을 못자는 것 같더라니. 눈이 붉습니다. 참, 꼴이 말이 아니게 되었군요.”
“……흥.”
아침부터 그렇게 핀잔을 주고 싶으냐고 따지려다가 말았다. 다시 드레스를 새로 갈아입고 여관을 나섰다. 푸르른 어스름이 내려앉은 때, 검은색 상업 마차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파빌리엔이 마차의 문을 열어주었고, 그의 에스코트를 받아 마차에 올랐는데.
“헉?!”
마차 안에 누군가가 앉아 있어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순간 오싹해지면서 피가 차갑게 식어 내리는 기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