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3화
그런데 답장이 없다. 하루가 지나고 이틀이 지났는데도 감감무소식이었다. 항상 편지에 답장은 꼬박 당일에, 늦어도 그 다음 날이면 어김없이 보내주곤 했는데.
무슨 일이라도 생긴 건 아니겠지?
불안한 마음에 브레이튼 백작저에 사람을 보냈는데 빈손으로 돌아와서 더 심장이 철렁했다.
“답장은 없는 거니?”
“브레이튼 백작 영애께서는 삼 일 전에 잠시 여행을 다녀오겠다며 다시 짐을 싸서 나가셨답니다.”
“……뭐라고?”
여행이라니. 삼 일 전이면 제국에서 막 돌아오던 당일이었다. 여행이 고단하여 쉬겠다더니. 그날 짐을 싸서 나갔단 말인가.
“어디로, 어디로 갔는지는 듣지 못했니?”
“그렇지 않아도 여쭈어봤는데 도착하면 행선지를 알리겠다고 하셔서 백작부인께서만 알고 계실 것이라고 하시던걸요?”
가끔 그렇게 답답하면 여행을 떠나곤 했었는데, 출발하기 전에는 항상 내게 어디로 간다고 편지를 보냈었다. 워낙 돌아다니는 거나 여행을 좋아하여 평소였다면 또 콧바람이 들었나보다 싶었겠지만 이번엔 좀 달랐다.
아무래도 파빌리엔과의 관계를 깨끗이 정리하지 못한 것 같은데. 그렇다고 해서 갑자기 떠날 만큼 그 마음이 그리도 컸을 거라고는 짐작하지 못했다. 마치 파빌리엔이 왕국에 머물고 있다는 사실 때문에 견디기 어려워 훌쩍 떠나버린 것처럼 보이기도 하고.
만약 그렇다면 그것도 안타깝다. 연애 관련 문제는 항상 와인 한잔 마시면서 훌훌 털어버리곤 했었으니까.
내 가라앉는 표정을 본 사용인이 눈치껏 인사를 하고 자리를 피했다. 나는 그 탐탁지 않은 마음을 차분하게 가라앉히려 노력하며 한숨을 푹 내쉬었고 둘째 언니가 그랬듯 파빌리엔을 지그시 노려보았다.
“이래도 말 안 해줄 거예요?”
“……더는 할 말 없다고 분명히 말했잖습니까.”
“카시안이 그랬어요. 내가 제국에 가기 전부터 브레이튼 백작가에 염탐하는 자가 서성거린다고. 누군가 브링을 해치려고 하는 거면 어떡해요? 설마 관계를 끊었다 해서 브링이 걱정되지도 않는 거예요?”
나는 이렇게 불안한데. 황제와의 국혼을 앞둔 나의 친한 친구를 인질로 붙잡아 협박이라도 하면 어쩌려고. 나 때문에 에브린이 위험에 처하는 건 내 목숨을 쥐락펴락하는 것보다 더 끔찍했다. 그런데도 파빌리엔은 그저 태연하게 손가락으로 턱선을 매만지며 눈썹을 휙 들어올렸다.
그 태도가 더 화가 나서 나도 모르게 분노를 표출하려다가.
“브레이튼 영애에게 몰래 호위를 붙여둔 건 접니다. 지금도 그 여행길에 따라붙어 안전하게 지키고 있을 테고요. 그 녀석이 하필 카시안에게 들킬 줄은 몰랐군요.”
치밀어 오르던 열기가 쑥 가라앉으며 두 눈을 끔뻑거렸다.
“호위요? 호위를 붙였다고요? 브링한테? 당신이?”
“워낙 영애가 생각 없이 일을 치르는 것 같아 보이길래 불안하기도 하고, 어쨌든 황족과 인연이 있다 보니 혹시 모를 위협이 있을 수도 있기 때문에 몰래 붙여둔 겁니다.”
아, 그랬구나. 어쩐지 그날 이후로 카시안이 더 알아본다더니 아무런 말도 없어서 그냥 잘 처리한 줄 알았는데. 파빌리엔이 붙여놓은 호위였음을 알고 내버려 둔 거였다. 그럼 나한테도 이야기 좀 해주지. 하여간 자기들끼리만 쑥덕쑥덕.
“미안해요, 파빌리엔. 오해할 뻔했어요. 요즘 부쩍 신경이 날카로워져서. 불쾌하게 했다면 용서하세요.”
“이해합니다. 별일 없을 테니 걱정하지 마십시오.”
어떻게 보면 무심한 것 같아서 영 관심이 없어 보이는데, 또 한편으로는 미련이 보이기도 해서 참 알 수 없는 관계다. 나는 에쉬와 떨어져 있는 지금 그가 매일 보고 싶고 그리운데. 저렇게 서로에게 조금이라도 감정이 남아있음에도 보고 싶지 않은 걸까?
나 이외의 다른 사람 마음이야 함부로 판단할 수는 없는 노릇이지만. 저마다의 이유가 있는 법이니까. 나중에 에브린이 돌아오면 그때 이야기를 들을 수 있겠지. 국혼이 치러지기 전에만 돌아와 줬으면 하는데.
그렇게 열흘이라는 시간이 더 지난 이후에서야 에브린에게서 답장이 왔다.
답이 늦어서 미안해, 슈아. 기다렸지? 편한 날을 다시 알려주면 그날 방문할게. 나도 할 이야기가 참 많아.
어울리지 않게 간소한 내용이었다. 심적인 변화가 아주 크다는 의미로 받아들여지는데. 해서 나는 내일이라도 당장 방문해달라고 작성해 보냈다.
오늘은 둘째 언니의 예법 교육이 있는 날이라서. 말이 예법 교육이지, 거의 언니와 티타임을 가지는 수준이지만.
그날도 둘째 언니가 도착해 응접실에서 새로 구입한 차를 마시며 도란도란 이야기꽃을 피웠다.
“왕비 전하께서 회임이라는 게 확실하게 판명이 났다더라.”
“정말?”
“응. 아직은 소문내지 말라고 하더라고. 또 유산이 될까 봐 걱정하고 있길래 마음이나 좀 편히 드시고 좋은 생각만 하라고 했어. 하여간 왕비 전하도 잔걱정이 넘쳐서 문제야. 그렇게 까다롭고 예민한데 아기님이 안심하고 자리 잡겠냐고.”
거의 오 년 만에 다시 얻게 된 귀한 아기님이니 그만큼 신경 쓰는 것도 이해는 가지만. 둘째 언니의 말도 일리가 있어서 그저 고개만 끄덕거리고 차를 홀짝 마셨다. 아버지도 첫째 언니의 회임 소식을 듣게 되면 한시름 놓으실 테지. 어머니가 살아계셨다면 뛸 듯이 기뻐하며 눈물을 보였을지도.
“그래도 왕비 전하의 곁에 언니가 있어서 참 다행이야. 힘들 때는 가족만큼 기댈 수 있는 사람이 없을 테니까.”
“나는 왕비 전하보다 네가 더 걱정이야. 너도 혼자 속으로 삭이는 경향이 있으니까. 하여간 아버지랑 너랑 너무 똑같다니까?”
매번 듣기는 했던 말이지만 오늘은 평소와 달리 가시가 콕콕 박혀 있었다. 그러더니 한숨을 폭 내쉬며 찻잔을 내려놓고는 진지한 눈빛으로 나와 시선을 맞추었다.
“오늘 여기 오기 전에 봤어. 그 유령.”
그 말에 팔뚝에 오싹 소름이 일어 허리가 바르르 떨렸다. 정신이 번쩍 드는 이야기였다.
“어, 어디서?”
“번화가에서. 사람이 많은 곳이었지. 그래도 바로 눈에 띄더라. 나하고 눈도 마주쳤거든.”
그래서 오늘 언니 신경이 조금 예민하게 곤두세워져 있었나 보다. 평소와 다르다고 생각하긴 했었는데.
“지난번 카시안과 싸우다가 부상을 당해서 당분간 모습을 드러내진 않을 거라고 들었어.”
“그래. 부상당한 것 같더라. 얼굴이며 몸의 절반이 불에 그을린 모습이었으니까.”
그 모습을 상상하니 또 섬뜩해진다. 일부러 그런 모습을 하고 나타난 건지, 아니면 진짜 그날의 싸움으로 인해 회복이 되지 않은 건지 모르겠지만.
“그래서……?”
“바로 사라지긴 했는데, 제국이 아닌 왕국을 서성거리는 건 분명 이유가 있을 거거든. 혹시 왕비 전하에게 해코지를 할 수도 있고. 순진한 놈이면 목적은 너일 테고.”
어느 쪽이든 달갑지 않다는 듯 둘째 언니의 얼굴에 짜증이 가득하다. 나는 언니가 채워주었었던 루비 팔찌를 괜히 만지작거리면서 파빌리엔을 살폈다. 의외로 별다른 표정 변화가 없었긴 했지만 긴장했다는 것을 드러내듯 턱에 힘이 들어간 채였다.
아마 이 이야기가 에쉬의 귀에 들어가겠지. 그가 불안해할 텐데.
“일부러 언니 앞에 모습을 드러낸 거면, 경고일까?”
“그렇겠지. 유령 따위가 포기라는 것을 알지도 못할 테고. 목숨이 귀한 것도 모를 테니까 분이 풀릴 때까지 괴롭힐 생각이 분명해.”
우려했던 일이 현실로 벌어졌다. 그 유령이 결국 내 앞에 나타나기로 작정한 것 같다. 카시안을 상대하는 것보다는 나와 둘째 언니가 만만하다고 여기는 걸지도.
“슈아, 나는 네가 지금 당장 제국으로 가서 황실의 보호를 받는 것이 더 낫다고 생각해. 왕궁에도 마법사가 있으니 왕비 전하보다는 네가 더 위험하다고 판단되거든. 그렇다고 내가 너와 계속 함께일 수는 없으니까.”
어차피 국혼은 이미 진행되는 중이었고 식을 올릴 날짜를 조율하고 있는 걸로 안다. 천재지변이 없는 한 취소가 되진 않을 것이다. 아마 에쉬가 이 상황을 듣게 되면 둘째 언니와 똑같은 말을 할지도 모르고.
“만약 내가 지금 제국으로 몰래 떠난다면, 국혼을 치르는 날 이곳에서 출발해야 하는 행렬은 어떡하고?”
“그건 내가 알아서 할게. 어차피 신부 측 얼굴은 공개하지 않아도 되고 제국에서야 정식으로 치를 수 있으니까. 나는 오늘 당장 네가 제국으로 출발했으면 해.”
“오늘……?”
당장 너무 뜻밖의 이야기를 듣게 되어 어리둥절했다. 하지만 상황이 상황이니만큼 언니의 급박함도 이해는 되었다.
“파빌리엔은 어떻게 생각해요?”
그도 유령에 대해서 잘 알고 있으니 작금의 사태에 대해서 충분히 이해는 하고 있을 것이다. 그 역시 나와 마찬가지로 평범한 인간이기 때문에 사람은 처리할 수 있어도 유령을 어쩌지는 못할 테니까.
파빌리엔은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고개를 끄덕거리며 동조하였다.
“형님께서 조금이라도 위험한 상황이 오면 지체 없이 모셔오라 하셨습니다. 왕국에는 조금도 피해가 되지 않도록 눈치껏 조치를 취하라 하셨으니까요.”
결국 이렇게 되는 걸까. 참 웃기게도 갑자기 심장이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보름이나 보지 못한 에쉬를 생각보다 빨리 만나게 된다는 기대감 때문이었다. 서로 편지를 주고받으면 더 그리워질 것 같아서 일부러 보내지도 않았고, 에쉬 역시 마찬가지였다.
이미 외출을 하신 아버지께 인사도 하지 못하고 떠나게 될 것 같아 죄스러운 마음은 안중에도 없었다. 이래서 자식을 귀하게 키워도 소용없다는 말이 있는 걸지도.
“그럼 바로 출발 준비를 할게. 어차피 가지고 갈 수 있는 물건도 없고, 도중에 갈아입을 의복만 몇 벌 챙기면 되겠지.”
“아버지도 이해하실 거야. 내가 잘 말씀드릴 테니까. 평생 못 보는 것도 아니고, 황제 폐하께서 그리 차가운 분도 아니니 너무 상심해하진 말고.”
“……응.”
차마 언니 앞에서 솔직한 내 마음을 피력할 수 없어 그냥 웃음으로 넘겼다. 그리고 언니와 하녀장의 도움을 받아 당장 떠날 수 있는 간단한 채비를 하고 상업마차를 불러 다른 이들의 눈에 띄지 않게 조용히 왕국을 떠났다.
‘아. 브링에게 편지를 보내지도 못했는데.’
결국 에브린도 이렇게 만나지 못하게 되는구나 싶어 속이 약간 상했다. 아직 에브린과 마지막 우정을 담아 만찬을 치르지도 못했는데. 아버지야 가족이니 볼 수 있다지만 에브린도 결혼하면 앞으로 볼 수 있다는 장담을 할 수도 없고.
나는 맞은편에 앉아 조용히 마차 창밖만 노려보는 파빌리엔을 힐끔 보았다. 두 사람이 맺어진다면 참 좋을 텐데, 그저 내 욕심인 걸까? 에브린에게 둘 사이에 있던 사정을 조금이나마 듣게 되면 궁금증의 실마리가 풀릴 것 같았는데.
“이제 제국으로 돌아가면 맡았던 호위도 마무리되는 거고. 그럼 당신은 작위라도 받고 황궁을 떠나게 되는 건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