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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만의 비밀스러운 꽃 (82)화 (83/113)

82화

황태후에 대한 이야기를 들으면 들을수록 현실과 동떨어지는 기분이었다. 지금껏 내가 살아온 세계와는 판이하게 다른 세계여서. 사람의 목숨을 그리 쉽게 생각하는 사람은, 대체 어떤 삶을 살아왔던 걸까?

제국을 손아귀에 넣고 싶은 일념이 그런 악마를 만들어낸 걸까?

“뭐, 과거 황실 내부에서만 벌어진 비화를 일일이 나열하자면 꽤 깁니다. 세상에 알려지지 않은 내용들이지요. 승마를 하다가 갑자기 발작한 말에서 떨어져 말발굽에 짓밟혀 죽은 황녀도 있고, 뜬금없는 마차 전복사고로 당시 세 살이던 제 아래 황자도 사망하고.”

“황족이 지금보다 더 있었던 거예요?”

“아바마마의 정부로 인정된 이들은 전부 황태후의 측근이었습니다. 황태후가 어떤 수법을 이용했는지는 자세하게 모르겠으나 자신의 사람을 수도 없이 아바마마의 침실에 밀어 넣었다고 하더군요.”

“선황의 혈육은 에쉬와 당신이 유일하다고 들었는데…….”

“그 사실이 사 년 전에 마력석을 이용한 검사로 판명 났었지요. 황자들만을 대상으로 한 검사였고, 공개하기 전에 그런 사달이 나버렸지만. 아무튼 그 모든 일의 시작과 마지막에는 황태후가 존재했고, 황태후의 눈 밖에 나면 그 끝은 죽음이었지요. 어미든 자식이든. 황녀든 황자든.”

소문으로는 당시 황후가 선황의 성욕을 감당할 수 없어서 다른 여자를 침실로 끌어들이는 걸 모른 척했다더니. 그것도 황태후가 흘린 소문이었다고 했지. 실상은 자신과 자신의 아들인 황태자를 더욱 돋보이도록 하기 위해 만든 대역들일 뿐.

결국 그 대역 중 하나인 2황자가 자신의 야망을 이루게 해줄 황태자를 살해하였으니 그것 역시 인과응보일지도 모르지만. 그에 그치지 않고 이번에는 친정인 가벨론 공작가를 황족으로 만들 생각을 하고 있으니, 선황께서 이 사실을 알면 얼마나 원통해할까.

“그래서 황태후가 가장 없애고 싶은 이들이 에쉬와 당신이겠지요? 유일한 황족이니.”

“어렸을 때는 사실 형님의 쌍둥이라던 그 유령의 도움을 많이 받았습니다. 카시안이 실질적인 근접 호위를 맡아 외부로부터 접근해오는 암살자를 제거해주었고. 덕분에 지금까지 무사히 살아남았지요.”

“어느 한쪽이 사라지지 않는 한 끝없는 싸움이 되겠네요.”

예비 황족으로서의 그 끔찍한 교육을 감당해낼 수 있을까 하던 고민은 지극히 투정에 가까웠다. 참혹한 황궁에 입궁하는 것은 목숨을 걸어야 할 만큼 굳은 결심이 필요한 일이기 때문이었다.

벌써부터 나약한 마음을 품을 수는 없다. 해서 나는 지금 당장 내가 할 수 있는 일에 최선을 다하기로 마음먹었다.

다음 날, 왕궁에서 보내온다던 예법교육 담당이 누군가 했더니.

“……왕비 전하께서 언니를 추천할 줄은 몰랐네.”

“예비 황후가 될 너와의 친분을 노리고 접근하려는 무리들이 워낙 많아서. 왕비 전하께서도 꽤나 골치였나 보더라고. 내게 이런 중대한 사안을 맡길 줄은 몰랐어.”

로안트 후작 부인이자 나의 둘째 언니가 마차에서 내리며 해사하게 웃었다. 첫째 언니와 함께 예법을 배우다가 못해먹겠다며 그 자리를 박차고 나왔던 그 둘째 언니라서 뭔가 웃음도 나고 마음이 조금 놓이기도 하고.

“매번 언니에게 도움만 받는 것 같아서 나로서는 미안해져.”

“미안해할 거 없어. 솔직히 나는 그 유령, 내 손으로 직접 봉인하기 전까지는 마음을 놓을 수가 없거든. 언젠가는 네 주변을 얼씬거릴 것이 분명하니까.”

깊은 한숨을 푹 내쉬는 언니가 예리한 눈빛으로 내 주위를 샅샅이 훑어보았다. 그러더니 내 뒤에 서 있는 파빌리엔을 빤히 흘겨보는 것 같아서 의아했으나 바로 시선을 거두고 자연스럽게 저택 안 응접실로 향했다.

‘뭐지? 파빌리엔한테 할 말이 있는 것처럼 보였는데.’

하지만 둘째 언니는 응접실에 자리하자마자 그때부터 예법 교육에만 집중하였다. 앉아 있는 자세와 서고 걷는 것, 차를 마시는 것, 음식을 섭취할 때 주의사항, 나를 곁에서 돕게 될 시녀들을 대하는 태도까지.

그 이야기를 듣는 내내 자세를 교정해야 한다며 두꺼운 책 두 개를 머리 위에 이고 걷는 연습을 해야 했다. 이거야 뭐 언니들이 배웠던 것들 중 하나라 나도 따라 해 보겠다며 연습했던 것이라 어렵진 않았다.

“크게 고칠 것도 없겠구나. 왕비 전하께서 얼마나 걱정을 하셨는지 몰라. 당신께서 직접 교육해도 부족할 것 같은데, 괜히 황실에 누가 되는 건 아닐까 싶다고.”

“왕비 전하께 직접 교육을 받으면 아마 손가락 하나하나 어떻게 두어야 하고 움직여야 하는지 고쳐야 했을 테니까. 각오는 했던 일이지만 그래도 여전히 어려운 것 같아.”

“그래도 넌 아버지를 많이 닮아서 어렸을 때부터 자세가 좋았어. 어머니는 결혼을 앞두고 귀족으로서 예법교육을 받아야 했을 때, 결혼이고 뭐고 다 팽개치고 도망가고 싶었대.”

“역시 그 마음을 견뎌내게 해준 건 사랑이겠지?”

“물론이지.”

나와 언니는 동시에 웃음을 터트렸고, 자세가 흐트러져 머리 위에 있던 책이 뚝 떨어지는 바람에 머쓱해졌다. 아마 상대가 첫째 언니였다면 분위기가 삽시간에 가라앉으면서 집중 못하냐고 구박을 있는 대로 받았을 텐데.

“뭐, 대충 적당히 하자. 어차피 황궁에 입궁하면 다시 그쪽 예법에 맞춰 새로 배울 텐데 벌써부터 힘 빼서 질리는 것보다야 낫잖니?”

아까 초반의 의욕은 다 어디로 갔는지 금세 풀어진 언니가 소파에 풀쩍 주저앉아 팔걸이에 몸을 기댄 채로 차를 음미한다. 결혼 전에도 자주 보던 편안한 모습이어서 낯설지는 않았다. 오히려 내가 알던 언니여서 친근감이 느껴지기도 하고.

예법 교육을 빙자하여 오붓한 대화를 나누며 시간을 보냈다. 응접실에 둘만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 때문에 어느 정도 내용을 돌려서 말해야 했다. 앞으로 황궁에서는 계속 이런 식으로 상대와 하고 싶은 말도 다 나누지 못하겠구나 싶어서 벌써부터 속이 상한다. 이러면 안 되는데.

“어제 브레이튼 영애는 바로 백작가로 안내해드린 거니?”

“아, 응. 여행이 생각 이상으로 고단했다고 쉬고 싶다길래 오자마자 브레이튼 백작저에서 헤어졌어.”

“그래? 별다른 말은 없었고?”

왜 갑자기 에브린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는지 모르겠다. 애초에 둘째 언니와 에브린이 그렇게 친밀한 사이는 아니었던지라 서로의 안부를 묻는 경우는 거의 없었기 때문에.

“갑자기 왜? 브링한테 무슨 일이라도 있었어?”

내가 모르는 무언가를 알고 있는 것 같아서 관심이 쏠렸다. 아까 언니가 파빌리엔을 흘겨보던 것도 그렇고, 파빌리엔이 호위 때문에 내 뒤에 서 있었는데 은근히 신경 쓰는 게 눈에 보였기 때문에.

그러자 헛기침을 뱉어내며 새침하게 차를 마시는 언니가 두 눈에 불꽃을 담은 채로 능청스럽게 대꾸하였다.

“나도 모르지. 무슨 일이 없지 않고서야 그 활달한 아이가 누군가와 만나고 나서 그리 눈물을 보일 리는 없지 않겠니?”

“……브링이 울었다고? 언제?”

“언제더라……? 제국을 떠나오고 이틀째 밤을 보내던 중간 마을에서였지. 창문 밖에서 숨죽여 우는 목소리가 들려오길래 나는 또 유령이 나타났나 싶었다니까?”

전에 어머니의 첫 번째 기일을 함께 보내려고 본가에 왔던 첫날, 돌아가신 어머니를 그리며 몰래 울었다는 이야기는 들었는데. 당당하고 솔직한 성격이지만 누구 앞에서 눈물을 보이는 걸 극도로 꺼려해 내 앞에서는 절대 눈물을 보이지 않았었다.

그런데 제국에서 돌아오면서 혼자 몰래 울었단 말이지? 원인은…… 역시 파빌리엔인가?

나는 슬쩍 고개를 돌려 파빌리엔을 쳐다보았다. 조금 굳은 얼굴로 시선을 내리까는 그의 푸른 눈동자가 동요하듯 흔들린다. 분명 에브린을 상대로 아예 감정이 식어버린 건 아닌 것 같은데.

“그랬었구나. 브링이야 워낙 누구한테 우는 모습을 들키고 싶지 않아 하니까. 저번에 어머니 기일에 맞춰 왔을 때도 내 앞에서는 그리 밝게 웃더니 방에서 혼자 울다가 잠들었다는 이야기도 들었거든.”

일부러 파빌리엔이 듣길 바라여 하지 않아도 되는 이야기까지 꺼냈다. 파빌리엔은 늘 괜찮은 척 웃는 에브린만 보았지, 그녀가 뒤에서 남몰래 애통해하고 있었음은 몰랐을 테니까.

“그 아이도 참, 세상 힘들게 사네. 뒤끝 하나 없이 그 자리에서 다 털어버리는 줄 알았는데.”

“강해 보이는 건 겉모습뿐이고. 상처도 많이 받지만 그만큼 훌훌 털어버리기도 하는데, 대체 무슨 일이었을까? 나한테도 이야기를 해주지 않은 걸 보면 혼자만 꾹꾹 담아놓을 생각인 것 같아.”

“연회 때도 좀 요상하긴 했지. 네 호위를 맡은 황자 전하께 와인을 쏟아냈던 그 가벨론 공작 영애가 전하의 옥체에 손을 대자마자 죽일 듯 노려보던데…….”

말끝을 흐리며 다시 파빌리엔을 올려다보는 언니가 아예 대놓고 웃으며 그에게 묻는다.

“혹시, 브레이튼 백작 영애와 무슨 사건이라도 있었나요?”

워낙 제국에서 내 일도 감당하기 벅차서 에브린을 신경 쓰지 못했었는데, 언니는 그저 감으로 무언가 느끼긴 했나 보다. 두 사람 사이에 묘한 기류가 흐르고 있었음을.

파빌리엔도 굳이 숨길 생각은 없다는 듯 고민 없이 딱 잘라 대답했다.

“사적인 일입니다. 당사자들이 알아서 해결하겠습니다.”

“아직 끝나지 않은 사적인 일인 건가요?”

“……이미, 끝난 이야기입니다.”

파빌리엔은 더 이상 말하기 싫다는 듯 입을 꾹 다물었고, 둘째 언니는 딱히 더는 물을 생각도 없어 보였다. 그걸로 그 대화의 주제는 끝냈고 우리는 다시 다른 이야기로 넘어갔다.

하지만 계속 한편으로 신경이 쓰이는 건 어쩔 수 없었다.

그렇게 둘째 언니가 삼 일 후에 다시 오겠다는 말을 남기고 돌아갔고, 나는 바로 서재로 올라가 에브린에게 편지를 썼다.

오랜만에 마차를 타고 왕궁을 한 바퀴 돌아보는 건 어떻겠냐고.

“가능한 저택에서 벗어나지 말았으면 하는데 말입니다.”

내 편지를 슬쩍 보았는지 파빌리엔이 한마디 거들었다. 해서 나는 남의 개인적인 편지까지 훔쳐보느냐는 듯 눈을 치뜨며 투덜거렸다.

“왕국 내에서만 있을 건데요? 그래도 위험한가요? 번화가에서만 움직이는데 정신이 제대로 박힌 놈들이라면 사람 많은 곳에서 나를 해치지 못할 텐데요.”

“정신이 제대로 박힌 놈들이 암살이라는 것을 하겠습니까? 돈에 미친놈들이라면 뭐든 합니다. 길거리에서 독침을 쏘는 것도 마다하지 않을지도.”

독침이라는 말에 등줄기를 타고 소름이 일었다. 내 처지가 그 정도로 위험한가 싶어 울적해하며 다시 새 편지지에 작성하였다.

차를 대접할 테니 시간이 되면 우리 백작저로 방문해주길 바란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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