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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만의 비밀스러운 꽃 (81)화 (82/113)

81화

침실 분위기가 삽시간에 가라앉는다. 첫째 언니 역시 동요한 듯 두 눈을 파르르 떨었다. 저러다가 괜히 배 속의 아기님이 잘못되기라도 할까 봐 재빨리 말을 덧붙였다.

“지난번에 뵈었듯 폐하께서 은근 짓궂으셔요. 그런 대접을 받을 것도 전부 다 감안하고 목숨을 구제해 준 제게 은혜를 갚기 위해 하신 일이었답니다. 해서 저도 이 마음이 움직여지게 되었고요.”

“그럼…… 그때 황제 폐하께서 내게 선물로 하사하신 그 차는……?”

“아, 그건…….”

첫째 언니도 그 유령의 존재를 알고 있을까? 어머니가 마법사였다는 건? 둘째 언니가 마력을 부린다는 것도?

차마 이 자리에서 말을 꺼내기가 어려워 잠시 고민하다가 최대한 솔직하게 대답해주었다.

“그건 폐하의 대리인이 의논도 없이 보낸 선물이라고 했어요. 그 대리인이 폐하께 좀 작게나마 화풀이를 했다고 해야 하나. 고의는 아니고 대리인의 짓궂은 장난이었답니다. 두 분이 어찌 그리 닮았던지.”

똑같이 생기긴 했으니까. 둘을 비교하는 건 살짝 불쾌하지만.

“그래서 제국으로 돌아간 폐하가 그 대리인을 얼마나 혼냈는지 몰라요. 감히 당신의 허락도 없이 보낸 선물이 고작 찻잎이냐고. 나중에 사죄의 의미로 제대로 된 선물을 보낸다 하셨으니 이번 건 부디 잊어달라고 하셨답니다.”

다행히 첫째 언니는 그 말을 그대로 믿어주는 것 같았다. 아예 거짓말도 아니고 에쉬도 그때 겉으로 티를 내진 않았지만 속으로는 상당히 신경 쓰고 있었던 것이 눈에 보였기도 해서.

“그러니 그때의 일은 그냥 덮어주세요. 폐하께서도 그러길 바라고 계십니다. 따지고 보면 폐하의 어머니이신 분이 우리 비엔트 왕국의 왕족의 피를 가지고 계셨으니까 앞으로 태어날 왕비 전하의 혈육과도 먼 친척이 되겠어요.”

“그렇게 되려나……?”

“그럼요. 또 이번 국혼으로 제국과 우리 왕국이 더욱더 끈끈해지겠지요. 만약 제가 국혼을 치러야 할 상대가 그분이 아니었다면…… 저는 끝까지 이 국혼을 받아들이지 못했을 겁니다. 이건, 돌아가신 어머니께서 맺어준 운명이라고 생각해요.”

내가 역병이 번진 수도에 계실 어머니를 뵙겠다는 일념 하나로 무작정 출발했던 그 마차에서의 만남. 그건 억울하게 죽은 영혼들의 원한이 담긴 이끌림이었을지도 모른다. 끔찍한 짓을 저질러놓고도 죄책감 하나 없던 악인들의 모든 죄를 낱낱이 밝혀 꼭 합당한 벌을 받길 바랐기 때문에.

과욕을 억누르지 못하고 죄 없는 목숨을 하찮게 여겼던 그들을 어머니 대신 내가 단죄할 것이다. 복수한다고 하여 죽은 이들이 살아 돌아오는 건 아니지만, 수많은 사람을 학살한 죗값은 치러야 공평한 거니까.

“그럼 저는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부디 몸조리 잘하시고 편히 쉬세요. 국왕 전하의 감격스러운 표정이 벌써부터 눈에 아른거리네요.”

“너도 참. 그런 농을 다 할 줄도 아는구나.”

“황제 폐하께 배운 거랍니다. 정말 무척이나 짓궂은 분이시거든요.”

나와 함께 만족스러움을 담아 웃는 언니가 자신의 아랫배에 손을 조심히 얹는다. 겉으로 티를 내진 않았어도 무척이나 아이를 기다렸을 것이다. 그 마음이 느껴져 왠지 가슴이 찡했다. 그저 차갑기만 한 성향인 줄 알았는데. 사랑하는 사람의 아이를 가지는 건, 그만큼 행복한 감정인가보다.

나는 내 납작한 배를 슬쩍 내려다보며 가슴이 묵직하게 내려앉는 기분을 느꼈다. 에쉬와 국혼을 치르면 큰 이변이 없는 한 내가 낳을 아이가 장차 황제의 자리에 앉게 될 테지. 그런 대단한 자리에 오를 아이를, 성군으로 키워낼 수 있을까?

국무회의가 끝나지 않아서 혼자 마차를 타고 저택으로 돌아왔다. 돌아오는 내내 그 생각이 머릿속에서 지워지질 않았다.

제국에서 황자의 난이 발발하여 형제를, 진짜 혈육은 아니라지만 그래도 아기 때부터 함께 자라온 이들을 자신의 손으로 잔인하게 죽였다. 비록 그들에게 행복한 가정사가 있는 건 아니었겠지만.

황족이든 왕족이든 기본적으로 받는 교육 중 하나가 감정을 다스리는 방법이라 들었다. 특히 사람들 앞에서는 고통이나 괴로움 같은 감정을 드러내지 말라고.

첫째 언니가 어릴 때부터 받아온 교육을 간혹 엿보았었는데 그건 마치 인간임을 포기하라는 의미로 받아들여질 만큼 잔인하게 보였다. 교육 시간 내내 가면을 쓴 것처럼 옅은 미소만 그린 채 어떤 일이 있어도 끝까지 유지해야 했다. 첫째 언니는 그것을 감당해냈고, 둘째 언니는 얼마 버티지 못하고 포기했었지.

나도 은근히 표정 관리가 되질 않아서 아마 둘째 언니처럼 견디지 못했을 것 같다.

그런 내가 황후로서의 교육을 받아야 한다니.

“오늘 형님께서 편지를 받아보면 꽤 심란해 할 것 같습니다.”

무거운 마음으로 소파에 앉아 멍하니 허공을 바라보다가 파빌리엔의 코웃음이 들려 정신이 번쩍 들었다.

“……편지요?”

“호위 일지를 작성해서 매일 보내라고 하더군요. 거기에 왕궁을 방문했던 영애의 낯빛이 상당히 어두웠다, 라고 기록하면 그렇지 않아도 밤잠 못 이루고 계실 황제 폐하의 얼굴이 제법 볼만하겠습니다.”

에쉬가 그런 지령까지 내렸던 건가. 왠지 그의 마음이 충분히 이해되어 설핏 웃음이 났다. 나도 에쉬의 일과가 담긴 편지를 받아보고 싶었으니까.

“괜히 걱정하게 그러지 말아요. 그러다가 또 자신의 자리를 내팽개치고 올지도 모르니까.”

충분히 가능성이 있는 이야기인지라 파빌리엔도 별다른 대꾸를 하지 않았다. 나는 소파 등받이에 편안히 몸을 기대면서 그에게 물었다.

“황궁에서 태어나 자란 당신의 이야기를 듣고 싶어요. 어린 시절은 어땠는지, 황궁은 어떤 분위기였는지, 어떤 각오를 해야 내게 도움이 되는지도 궁금하고요.”

창가 쪽 벽에 등을 대고 팔짱을 낀 채 삐딱하게 서 있던 그가 잠시 생각에 잠긴 듯 두 눈을 내리깐다. 전에 에쉬에게 선황과의 추억을 짧게나마 듣긴 했었지만, 선황께서 겉으로 다정한 분은 아니었다고 하니 파빌리엔도 자신의 아버지를 그리 좋아하진 않았겠지.

“위로 다섯 명이나 되는 형님들 사이에서…… 거의 매일 눈치만 보면서 살았던 기억밖에 없습니다. 공식적으로 황태자인 첫째 형님을 제외한 다른 황자들은 전부 사생아 취급을 받았기 때문에 의식주에서 어마어마한 차별이 암묵적으로 이루어지고 있었지요.”

황후의 소생은 황태자가 유일했고, 다른 아들들은 전부 정부에게서 나왔다. 그 속사정을 모르던 나도 황태자만이 적자인 줄 알았다. 그런데 황태자는 자신이 선황의 아들이 아닌 것을 언제 알았을까? 적자인 줄 알고 기세등등했을 그가 황족의 피를 가진 황태자비감을 조용히 물색하면서 어떤 기분이었을지.

“처음 어머니가 형님을 잉태하였을 때, 지금의 황태후가 어머니께 아이를 사산하는 약을 건네주었다고 합니다.”

“뭐, 뭐라고요?!”

에쉬에게 그런 이야기를 듣지는 못했는데. 파빌리엔도 아는 이야기를 에쉬가 모를 리는 없을 것이다. 너무 놀라서 얼떨떨하다가 순간 예전에 에쉬와 나누었던 대화가 머릿속을 훑고 지나갔다.

그 유령이 에쉬와 쌍둥이라는 것을 알았을 때.

[태어날 때에는 저뿐이었습니다. 과거 어머니께서 회임한 채로 독이 섞인 음식을 드시게 되었는데 어머니와 저를 살리기 위해 태내에서 마력을 이용하여 본인이 독을 흡수하였고, 그렇게 명을 달리했다고 들었습니다.]

그래, 맞아. 독을 마셨다고 했어. 그 독이 아이를 사산하는 약이었을까? 수석 시녀였던 그의 어머니가 황후의 명을 거역할 수는 없었을 테니까 그 약을 어쩔 수 없이 마셔야 했을 것이다.

어떤 마음이었을까? 사랑하는 사람의 아이를 가졌음에도 아이를 없애야 하는 그 약을 받았을 때. 아까 첫째 언니가 자신의 배를 내려다보며 세상을 다 가진 것처럼 행복해하던 그 모습이 떠올라 가슴이 시렸다. 동시에 또 얕게 번져있던 분노가 다시금 끓어올랐다.

“황태후……. 정말 사람 목숨을 너무 하찮게 여기는 이였군요. 한순간의 충동적인 결정으로 왕국에 역병을 옮겨다 나른 것이 아니었음을 분명히 알겠네요.”

“겉으로는 자비로운 척, 마음이 넓은 분으로 유명합니다. 대외적으로는 황태후의 그 썩어빠진 정신상태가 알려지진 않았으니 말입니다.”

입맛을 다시는 파빌리엔이 진지하게 이야기를 할 생각을 가진 듯 내 맞은편 소파에 앉아 손깍지를 끼며 정면에 있는 유리 테이블을 응시하였다.

“분명 약을 먹고 하혈을 해 당연히 유산되었다고 생각했답니다. 그런데 서서히 배가 불러왔고, 무사히 아들을 낳았지요. 그 이후로 저를 가졌을 때에는 수석 시녀의 자리를 포기하고 아바마마께서 직접 하사하신 황궁 내의 별궁에 머물렀습니다.”

“정부는 궁에서 지낼 수 없다고 들었는데요. 반발은 없었나요?”

“아바마마께서 그 약을 먹인 이가 황태후인 것을 알고 있었던 터라 겁박하듯 모종의 합의를 하였다 들었습니다. 해서 당시 황후가 매우 귀히 여기던 전 수석 시녀로서 직접 궁을 하사한 것으로 처리했다더군요.”

왠지 레이니드를 이용해 에쉬에게 독을 먹이려 한 이도 황태후가 아닐까 짐작해본다. 그 황태후의 존재로 인해 에쉬가 나를 황궁에 입궁시키는 것을 꺼려했던 모양이다.

“지난번, 레이니드를 통해 에쉬에게 독약을 먹게끔 했다던 그 일. 누구의 짓인지 아직 밝혀지지 않았다던데요.”

“레이니드 그 녀석이 아직도 그 일에 대해서는 입을 꾹 다물고 있어서 밝혀내진 못했습니다. 증거로 거둔 약병 또한 아주 평범한 것이었고, 독 역시 즉사할 만큼 강한 것도 아니었거든요.”

“황태후의 짓 아닐까요?”

“흠, 글쎄요……?”

픽 웃는 파빌리엔이 고개를 가로로 저으며 신경질적으로 머리를 쓸어 넘긴다. 간혹 에쉬가 짜증을 부릴 때 보이던 행동과 표정인데, 느낌이 아예 달랐다. 에쉬는 굉장히 관능적이어서 심장을 뒤흔들기 충분했었지만, 파빌리엔은 어딘지 우아하면서 귀여운 느낌이랄까?

……갑자기 에쉬가 참 보고 싶어지다가도 그럴 때가 아니어서 머릿속에 그려지는 에쉬의 잔상을 애써 지워냈다.

“그럴 가능성이 전혀 없는 건가요?”

“제가 지금껏 보고 겪어온 황태후라면, 증거를 남기게 되는 그런 유치한 방법을 이용하지 않았을 겁니다. 게다가 소량으로도 단번에 즉사할 수 있는 약을 사용하고도 남을 테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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