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0화
결과야 어찌 되었든 두 사람이 따로 만남을 가졌다는 건 상당히 신기했다. 어느 한쪽이라도 마음이 없었다면 편지를 주고받지도 않았을 테니까.
역병에 관해 숨겨진 엄청난 이야기 때문에 지끈지끈 쑤시던 두통이 조금이나마 가시는 기분이었다. 둘이 잘 되길 바랐는데, 대체 무엇이 문제였을지.
“그럼 하나만 더 물어봐도 돼요?”
“안됩니다. 어서 주무십시오.”
“누가 먼저 끝내자고 했어요?”
정말 대답도 안 해주려는지 입을 꾹 다물고 창문 밖을 죽일 듯 노려보기만 했다. 설마 에브린이 먼저는 아닐 것 같은데.
아까 우리 저택으로 오기 전, 에브린을 데려다주려고 브레이튼 백작저를 거쳤었다. 그때 마차에서 내린 에브린이 미련 넘치는 얼굴을 하고는 파빌리엔을 힐끔 쳐다보았었지. 나는 그게 아직도 파빌리엔을 포기하지 못해서 아쉬워하는 거라고 느꼈었다.
물론 그때는 두 사람이 따로 만났다는 걸 몰랐는데도 불구하고 말이다.
설마 파빌리엔이 먼저 거절한 걸까? 하지만 굳이 마음에도 없던 상대, 그것도 나의 가장 소중한 친구를 상처 주기 위해 굳이 만날 정도로 정성을 들일 이유가 마땅치 않은데. 또 파빌리엔도 저렇게 죄책감을 안고 있다면 완전히 정리한 것 같지는 않고.
“알았어요. 더 묻지는 않을게요. 하지만 그렇게 생살을 잘라내는 것처럼 서로 감정적으로 다치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에쉬가 나와 내 가문을 지켜주기 위해서 황위를 포기하려 했던 그 마음, 절대 가벼운 것이 아니니까요.”
누구나 한 번쯤은 삶을 살아가면서 큰 결정을 목전에 둔다. 결혼 또한 그중 하나다. 내가 에쉬를 만나지 않았더라면 나는 딱히 결혼의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을 거다. 사랑이라는 감정도 알지 못했을 거고. 마음에도 없는 상대와 결혼하여 상처뿐인 삶을 보내면서 그저 자식만 의지하고 살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에브린도 말로는 대단한 가문에서 구혼서가 도착한다면 주저 없이 누구든 선택해 떵떵거리며 살 거라고 하지만, 에브린의 성격상 사랑이 없는 결혼생활을 선택하지 않을 거다. 그것을 알기 때문에 에브린도 서로 사랑하는 상대와 행복하길 바랐다.
그게 파빌리엔이었다면 더 좋았을 텐데. 둘이 정말 쿵짝이 잘 맞는 것 같아서.
아쉬움을 뒤로하고 다시 잠을 청하였다. 오랜만에 익숙한 침실에서 잠들어 그런지 아주 개운하게 아침을 맞이할 수 있었다.
일어나자마자 입궁할 채비를 하느라 정신없이 바쁘기는 했지만 말이다.
대충 적당히 단장을 마치고 아버지와 함께 왕궁으로 향했다. 아버지는 국무회의를 진행하기 위해 회의장으로 가셨고 나는 왕비궁으로 안내를 받았다.
“여기서 잠시만 기다리십시오. 곧 왕비 전하께서 당도하실 겁니다.”
나를 응접실에 안내한 시녀를 비롯하여 왕비궁 사람들의 나를 보는 시선이 확실히 지난번과는 다르게 부드러워졌다. 국혼이 확실하게 결정되었으니 예비 황후가 될 내게 책잡힐 일이 없길 바라는 거겠지. 에쉬에게도 이 모습을 보여주고 싶네.
“왕비 전하께서 조금 늦으신다 하셔서 미리 차를 대접하라 명하셨습니다. 그리고 같이 오신 황자 전하께도 대접하시라 하셔서…….”
첫째 언니의 수석 시녀가 직접 차를 들고 찾아와서는 내 옆에 서 있는 파빌리엔을 힐끔 쳐다보다가 황급히 고개를 숙였다. 어떻게 파빌리엔이 황자인 걸 아나 싶다가도 지난번에 그 유령이 황제 대리인일 당시 사절단을 이끌고 온 이가 파빌리엔임을 떠올렸다.
얼굴은 익히 알고 있었을 테지만 그의 정체까지 알고 있었을 줄이야. 하긴 여기서 며칠 지냈다고 했으니 파빌리엔을 호위했던 이들에게서 전하라는 호칭을 들었을지도 모르겠다.
“왕비 전하께서 어디 편찮으신 건 아니신가요?”
“간밤에 꿈이 신통하여 왕궁의를 들라 하셨습니다. 확실한 건 아니니 무어라 설명드릴 수가 없어서…….”
꿈? ……설마 태몽이라도?
그렇지 않아도 첫째 언니가 지금까지 두 번이나 유산을 해서 임신이 어려울 수도 있다더라. 금실 좋은 왕실 부부에게 자식이 없어 속된 말로 석녀가 아니냐고들 수군거리기도 했다. 워낙 첫째 언니가 달거리 때 배앓이를 너무 심하게 하기도 해서 자궁에 문제가 있진 않을까 걱정했었는데.
제발 좋은 소식이 들려왔으면 좋겠다. 국왕 전하께서도, 돌아가신 선왕께서도 워낙 첫째 언니를 끔찍이 아끼기는 했으니 아이를 낳지 못한다고 폐위를 하진 못할 테지만.
초조한 마음을 안고 파빌리엔과 나란히 앉아 차를 음미하였다. 행여 지난번 그 황제의 대리인이 보냈다던 그 차가 아닐까 걱정했는데 다행히 다른 차였다.
“이건 무슨 차인가요? 맛이 상당히 독특하네요.”
“왕비 전하께서 최근 즐겨 마시던 익모차입니다. 솔잎과 갖가지 단맛을 내는 과일을 넣어 만든 차로, 냉증에 좋다 하여 여성에게는 더없이 좋다고 합니다.”
그 말에 웃음이 나려는 걸 겨우 참았다. 아마도 첫째 언니가 임신을 위해 마신 차였을 텐데. 그걸 파빌리엔이 마시고 있다 생각하니 왜 이렇게 웃긴지.
파빌리엔도 그 말에 찻잔을 내려놓고 헛기침을 하며 입술을 삐죽 내민다. 아마 저 뜻이 무엇인지 알고 있는 것 같았다.
해서 나는 흐뭇하게 웃으며 찻잔을 들면서 작은 목소리로 조곤조곤 설명해주었다.
“익모초는 약재로 사용되지만 오래 복용하면 부작용이 일어날 수 있다지요. 하지만 단기간 잘 조절하면 빈혈도 나아지고 혈액의 흐름을 원활하게 해준다고 들었어요. 몸이 따뜻하면 천식에도 도움이 되지 않을까요?”
에쉬에게 듣기로 그가 어렸을 때 천식으로 잔병치레를 많이 했다더라. 지금이야 외관상 건강할지는 몰라도 천식이라는 건 그렇게 쉽게 사라지는 병이 아니라고 했으니까. 더군다나 그의 어머니가 앓던 병이기도 하니 유전적인 요인이라 평생 안고 살아야 할 것이다.
그러자 잠시 찻물을 빤히 내려다보던 파빌리엔이 묵묵히 차를 다시 음미하였다. 천식에 좋은 약재를 좀 알아봐야겠어.
그렇게 차를 다 마시고도 한참을 기다린 뒤에야 수석 시녀가 내게 소식을 전해주었다.
“아가씨, 왕비 전하께서 아무래도 회임을 하신 것 같습니다! 해서 전하의 침실로 아가씨를 모셔오라 하셨습니다.”
“정말인가요? 물론, 물론 가야지요. 안내해주세요.”
너무 오랜만의 회임이었다. 국혼을 치르고 벌써 햇수로 팔 년이나 지났는데 이제야 겨우 왕실에도 후계가 탄생하게 되는 거다. 첫째 언니의 성격상 어디에 하소연도 하지 못하고 속으로 끙끙 앓았을 텐데.
괜히 감격하여 코끝이 찡해진 채로 수석시녀를 따라 측근들만이 다닐 수 있다는 왕비의 침소로 향했다. 금남구역이긴 하지만 호위 기사는 암묵적으로 출입이 가능해 파빌리엔도 뒤따랐다.
낯선 공간에 위치한 왕비의 침소는 생각보다 깔끔하고 아늑했다. 첫째 언니도 그렇게 화려한 걸 좋아하는 편이 아닌지라 언니의 취향이 고스란히 묻어 있달지.
침실의 안쪽 깊숙이 있는 침대 위에 앉은 채로 나를 향해 미소 짓는 첫째 언니가 수줍게 뺨을 붉히며 반겨주었다.
“어서 오렴. 슈아 너를 침실에서 맞이하게 될 줄이야.”
“경축 드립니다, 왕비 전하. 회임이시라면서요.”
“아직 확실한 건 몰라. 왕궁의가 확실하게 검사를 해봐야 알 수 있다더구나. 혹시 모르니 최대한 움직이지 말고 안정을 취하라 하여 어쩔 수 없이 너를 이리 부르게 되었다.”
나는 첫째 언니가 앉아 있는 침대 옆에 마련된 의자에 앉았다. 언니의 진심 어린 환한 얼굴이 너무도 보기가 좋았다. 오래 기다렸던 아이니만큼, 언니도 마음이 크게 벅차올랐겠지.
“꿈을, 꾸셨다고 들었습니다. 어떤 꿈인지 궁금합니다.”
“돌아가신 선왕비께서 내 꿈에 나타났고, 내게 황금빛 털을 가진 작은 새끼 고양이를 품에 안겨주셨지. 내게 마지막으로 주는 선물이니 이번에는 꼭 지켜내길 바란다고 말이다.”
황금빛 털을 가진 새끼 고양이. 그건 태몽에 가까웠다. 돌아가신 선왕과 선왕비께서 축복을 내리셨구나.
“확실히 회임이 맞으실 것 같아요. 이런 감격스러운 일을 제가 먼저 알게 되어 국왕 전하께 참으로 송구합니다.”
“아마 국무회의가 이제 시작했으니 끝나려면 한참 남았겠지. 아직은 비밀로 해두려고. 분명 지금 소식을 전하면 회의를 파하고 바로 달려오실 것이 뻔하거든.”
국왕 전하가 팔불출이라는 소문이야 뭐 워낙 파다하니. 내가 아는 국왕 전하라면 충분히 그러고도 남으실 분인지라.
“그보다 네 국혼도, 왕실에서 모든 것을 지원하기로 결정하였다. 네게 예법을 가르치는 건 내가 해주려고 했는데 상황이 이러하니 따로 선생을 추려내어 백작저로 보내마.”
“잘 배워서 왕국에 누가 되지 않도록 하겠습니다.”
“…….”
“……왜 그리 보십니까?”
갑자기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는 첫째 언니가 굉장히 서운하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리고는 한숨을 폭 내쉬었다.
“지난번엔 그리 냉정한 태도를 보이며 국혼을 절대 하지 않겠다더니. 무슨 바람이 분 게야? 갑자기 순순하게 국혼을 하기로 마음먹은 이유가 궁금하구나.”
말해도 될까? 어차피 에쉬가 황제의 자리를 지키기로 마음먹었으니 지금이라도 나와 에쉬의 인연을 소문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거라 여겼다.
“제가 황제 폐하와 깊은 인연이 있었다고 말씀드렸지요? 왕비 전하께서 국혼을 치르던 그날, 지금의 황폐 폐하께서도 왕국을 방문했었다지요. 그때 폐하를 뵈었습니다.”
“음. 그때 당시 황태자 전하와 함께 온 황자 전하 한 분이 계시기는 했었지. 혹, 그분이었니?”
“네. 그리고 일 년 전, 그분을 암살하려던 무리들에게서 큰 상처를 입고 제 앞에 나타나셨습니다. 역병이 번져 왕궁이 봉쇄되었을 때 말입니다.”
암살이라는 말에 주변에 있던 기사들과 시녀들이 숨을 들이키는 소리가 여지없이 들려온다. 나는 동요하지 않고 설명을 이었다.
“처음에는 그분인지 몰랐습니다. 너무 오랜만이기도 했고, 제국의 황자가 왕국에 머물 거라고는 생각 못했거든요. 그분이 황제가 되었다는 것도 최근에 알게 되었고, 제 곁에서 떨어지지 않겠다며 제국으로 돌아가지 않은 채로 호위를 자청하기까지 해 참으로 곤란했었습니다.”
“호위라면……?”
“맞습니다. 지난번 궁을 방문하였을 때 제국에서 제게 붙여놓은 그 호위 기사 중 한 명이 바로 황제 폐하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