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나만의 비밀스러운 꽃 (79)화 (80/113)

79화

진지하게 묻는데 파빌리엔이 갑자기 큰 웃음소리를 터트리며 킬킬거린다. 그러고는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그 머저리가 그 정도로 머리를 굴릴 줄 알았으면 그런 병신 짓도 하지 않았을 텐데, 라고.

“4황자가 아니라는 뜻이에요, 그거?”

“음, 맞다고도 틀리다고도 할 수 없군요.”

“무슨 의미예요?”

“아바마마께서 돌아가신 이후 두 형님께서는 그저 황위를 하나의 장난감으로만 여겼고, 즉위 이후에도 모든 일 처리는 다른 이에게 맡겼습니다. 둘째 형님은 자신의 머리를 과대평가했고, 넷째 형님은 그저 그 자리가 탐났을 뿐이었거든요.”

아까 에쉬와 가벨론 공작의 대화가 다시금 되새겨졌다. 가벨론 공작의 아버지라는 사람이 2황자를 가까이하다가 사망. 지금의 가벨론 공작이 4황자 대신 국무를 처리했다고 했지.

“그럼 4황자가 아니라, 그 가벨론 공작이 지시하였겠군요. 에쉬를 죽이려던 이가 그자였나요?”

“그 뒤에 누가 또 든든하게 자리하고 있지요.”

“……황태후.”

비로소 모든 퍼즐이 맞춰진다. 황태후가 모든 것에서 손을 떼고 황궁 깊숙한 곳에 은거한 이유는 그저 여생을 즐기기 위함이 아니었음을 알겠다. 겉으론 아무 욕심도 없는 것처럼 보이기 위함이었고, 실상은 절대 잃지 못할 그 자리를 탐내어 뒤에서 몰래 가벨론 공작을 움직이고 있었던 것이다.

그저 자신만을 위해서. 타인의 목숨 따위 벌레보다 하찮게 여겨 그같이 끔찍한 짓을 저질렀겠지. 조금의 죄책감도 느끼지 못한 채로.

황위가 탐나 자신의 처소를 찾지 않는 황제 대신 다른 남자의 씨를 받아 아이를 낳은 것도 모자라 거짓으로 황족이라 속이기까지 했으니.

“에쉬도, 알고 있었나요?”

“넷째 형님과 그의 측근들이 죽기 전에 술술 불었으니까 당연히 알고 있었지요. 형님이 그렇게까지 분노하는 건 처음 보았습니다. 그날 사건으로 형님에 대한 소문이 삽시간에 퍼졌더랬지요. 그만큼 두 눈 뜨고 볼 수 없을 만큼 잔혹하게 죽였으니 당연하지만.”

에쉬가 당시 황제인 형제를 쉽게 죽이진 않았다고 에브린을 통해 듣기는 했었다. 사인이 과다출혈이었다던가. 자신의 형님을 죽이면서까지 황위를 넘보아놓고 정작 당신은 흥청망청 즐기기만 하다가 허수아비노릇이나 했으니.

“가벨론 공작이 황태후 폐하의 명령을 받았다 해도 그런 엄청난 일을 독단으로 처리하진 않았을 것이고, 4황자도 분명 알고 있었을 거예요.”

“끝까지 자기는 모르는 일이라고 잡아떼긴 했지만 가벨론 공작이 없애려고 했던 그 증거 중에 넷째 형님과 주고받은 비밀문서가 있었습니다. 이미 죽은 사람을 되살려 더 고통스럽게 죽이지 못해 유감이라더군요.”

너무 화가 나면 머릿속이 얼음처럼 차가워진다는 걸 이번에 깨달았다. 생각보다 이상적인 판단이 가능해져 놀라웠다. 의문의 실마리가 완전히 풀리면서 마음이 차분해졌다.

물론 끓어올랐던 분노로 인한 불씨가 아직 남았지만. 적어도 그들의 극악스러운 짓에 의해서 사망한 내 어머니의 복수를 할 상대가 살아 있다는 사실에 의연해진다.

“황태후 폐하와 가벨론 공작이 저를 위협할까요?”

“그렇겠지요. 그래야 자신들의 계획을 성사시킬 수 있을 테니까.”

“당신을 황위에 앉혀두고 당신 옆에 여식을 황후로 세워 다시 한번 제국을 손아귀에 쥐겠다는 계획 말인가요?”

“정답이긴 하나 황위에 앉혀두는 건 굳이 내가 아니어도 될 겁니다. 아무나 황제의 사생아다, 라고 황족 명부에 올려놓고 황위에 앉힌다면 모든 것이 더 쉽게 해결될 테니까요. 물론 그러려면…… 나와 형님 목숨을 끊어놓아야 가능하겠지만.”

한번 품은 야망은 끝도 없이 치솟는 모양이다. 정말 치가 떨리고 갈아 마셔도 시원찮다는 말이 딱 어울리는 상황이었다. 에브린에게 처음 그 말을 들었을 때에는 사람이 어떻게 그런 잔인한 말을 할 수 있냐고 했지만, 그들이 한 짓에 비하면 결코 잔인하지 않았다.

죄 없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이 죽었는데. 힘들게 결혼하여 행복한 가정을 꾸리고자 했던 에브린의 언니와 그의 남편의 미래가 산산이 부서졌는데. 그들의 죽음에 얼마나 많은 이들의 억장이 무너졌는지. 아직도 그 슬픔이 전부 가시지 않고 있건만!

“제가 제국의 황제 폐하와 국혼을 꼭 치러야 할 이유가 생겼네요.”

“형님이 이런 이야기도 해주지 않은 겁니까?”

“아직 때가 아니라 여겼을 거예요. 에쉬는 내가 상처받을 이야기를 함부로 하지 않으니까.”

원래 어느 일에도 신중한 성격임을 안다. 애초에 내가 국혼을 별로 달갑지 않게 여겼던 것을 알기 때문에 지금도 미안해하는데 더 미안한 말을 하고 싶지 않았겠지. 조금이라도 더 미루고 훗날 국혼을 치른 뒤에 말해 줄 생각이었을 거다.

아주 조금, 그런 건 좀 답답하고 얄밉긴 해.

“파빌리엔. 내가 그 사실을 알고 있다는 거, 에쉬에게 비밀로 해주세요.”

“왜입니까?”

“언제 그 이야기를 내게 해줄지 궁금해서요. 모르는 척 기다려볼 생각이에요. ……괜히 조금 심술이 나기도 하고.”

파빌리엔이 말해 주지 않았다면 국혼을 치른 뒤에도 몰랐을 거다. 국혼처럼 중요한 행사에 아무리 황태후라도 불참할 수는 없을 텐데 황태후와 가벨론 공작을 보고 웃고 있었을 내 모습을 떠올리니 그냥 좀 속이 들끓었다. 그렇게 해야 더 진심 어린 미소가 나오긴 했을 테지만. 내 어머니를 죽인 원수들 앞에서 그저 착한 사람으로 보이고 싶진 않았다.

그러자 파빌리엔은 꽤 흥미롭다는 듯 실실 웃으며 고개를 끄덕여 긍정을 표한다. 나와 에쉬의 기 싸움이 볼만하겠다는 눈치였다.

다음 날, 아침 일찍 다시 마차를 타고 이틀을 더 달린 뒤에야 왕국에 도착할 수 있었다. 제국과 가장 가까운 왕국이 우리 왕국이라는데, 한번 오가는 것이 이렇게나 힘들다니. 우리 본가를 다니는 것과 비슷한 거리이고 길도 잘 닦여있었는데도 불구하고 굉장히 피로하다.

아마 마음이 번다하기 때문이겠지. 제국에서의 일도, 파빌리엔에게 들었던 그 이야기들도.

“다녀왔습니다, 아버지.”

“먼 길 다녀오느라 수고했다. 상당히 고단할 텐데 어서 들어가 쉬거라.”

후작 영지에서 우리 마차로 갈아타 백작저에 도착하자마자 직접 마중을 나온 아버지가 나를 반겨주었다. 괜히 아버지의 얼굴을 보니 꾹 참았던 울분이 다시 터질 것만 같았다.

같이 오는 내내 둘째 언니에게도 티 내지 않으려고 무척이나 조심했었는데. 아버지는 그 사실을 알까? 어머니를 그렇게 만든 이들이 저 제국에 버젓이 살아 있음을.

“아니에요. 그래도 아버지께 보고해야 할 일도 있고, 할 이야기가 많아요.”

“그리 급할 것 없대도. 너와 황제 폐하의 국혼을 빠른 시일 내에 치르기로 결정했다는 이야기는 이미 들었다. 그에 대한 설명도 아주 자세하게 기입하여 내게 보내왔더구나.”

“……에쉬가요?”

에쉬가 보내왔다던 그 편지를 살펴보니 정말 내가 제국에서 겪은 일이 아주 상세하게 적혀있었다. 가벨론 공작에 대한 이야기도, 그 유령에 관한 이야기도.

참 빠르기도 하지. 에쉬가 그만큼 나와 국혼을 빨리 치르고 싶다는 행동을 보여서 조금 웃음이 나기도 했다.

“황제 폐하께서는 약혼식과 결혼식을 같은 날에 치렀으면 하시더구나. 그러지 말라는 법은 없지만 폐하께서 서두를만한 이유가 있겠지. 괜한 일을 벌이는 분은 아니었으니.”

차마 거기에 대고 에쉬가 나와 오래 떨어지기 싫어서 최대한 불필요한 진행을 빼자고 한 거라는 말은 못하겠다. 아마 아버지는 황후의 자리가 오래 비어있으면 그 자리를 탐낼 이들이 우후죽순으로 생길 테니 제국의 안정을 위해 그리한 것이라 생각하실 거다. 그것도 틀린 말은 아니니까.

“바쁘겠네요. 한 달 안에 국혼을 치르려면.”

“예비 황족으로서의 교육을 속성으로 받을 네가 더 바쁘겠지. 내일부터 매일 왕비 전하를 뵈어야 하니 오늘이 마지막 휴식이다 생각하고 일찍 자거라.”

“……네.”

첫째 언니에게 국혼은 내가 알아서 거절하겠다고 당당하게 말했는데. 그때 내 옆에 있던 호위 기사 중 한 명이 황제였다는 걸 알면 어떤 표정을 지을지 궁금하다.

나는 그날 아버지의 말대로 마지막 휴식을 취하기 위해 일찍 침실로 들어가 누웠다. 여전히 내게서 떨어지지 않고 꼭 붙어 내내 방을 지키는 파빌리엔의 존재가 약간 거슬리긴 했지만 첫날 이후로 별다른 말을 건네지 않아서 정말 있는 듯 없는 듯하다.

그러고 보니 예전에 에브린과 파빌리엔이 잘되길 바랐는데. 에브린은 파빌리엔을 보고도 전처럼 친근하게 대하진 않았다. 약간 서먹하다고 해야 할까? 둘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묻진 못했지만 뭔가 있긴 있었던 것 같았다.

한 달 뒤면 에브린과도 떨어져야 되는구나. 에브린더러 먼 곳으로 시집가지 말라고 그랬었는데. 결국 내가 제국으로 가 버리게 될 줄이야.

“파빌리엔.”

“백작께 어서 쉬라는 이야기 못 들었습니까? 쓸데없는 말은 꺼내지 말고 어서 주무시지요.”

“……내가 무슨 말을 할 줄 알고 그래요?”

“브레이튼 백작 영애에 대한 이야기 아닙니까?”

눈치도 빠르셔라. 어떻게 알았담?

“물어보면 곤란한 일이라도 저질렀어요? 혹시 둘이 연애라도 했던 거예요?”

“…….”

“……진짜?!”

그냥 한번 던져본 말인데 대답 없는 파빌리엔의 침묵이 긍정을 표하고 있어서 깜짝 놀라 벌떡 일어났다. 그러자 파빌리엔이 조금 짜증 난 듯 미간을 살짝 좁히며 내 시선을 외면하였다.

“그저 몇 번 편지를 주고받았고, 딱 한 번 중간 지점에서 만난 적이 있었을 뿐. 그 이후로는 사이가 틀어져서 서먹해진 것밖에는 없습니다.”

“둘이 따로 만나기도 했었던 거예요?”

남의 연애사가 이렇게 흥미로운 거였다니. 그것도 둘이 잘 되었으면 싶었던 이들이 따로 만남을 가지고 편지를 주고받았다는 말에 괜히 내가 다 설레었다.

어쩜 에브린은 나한테 그런 말을 한 번도 해주지 않고!

파빌리엔도 말하기 꺼려진다는 듯 다시 입을 다문다. 대체 둘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기에 두 사람 다 어울리지 않는 행동을 보였을까?

“왜 틀어진 건지만 알려주면 안 돼요? 알아야 나중에 실수를 하지 않죠. 어쨌든 둘 다 내가 아는 사람이기도 하니까.”

“……별거 아닙니다. 그저 서로의 입장 차이가 좁혀지지 않았을 뿐입니다.”

“내가 아는 브링이라면 좋아하는 상대에게 무조건적으로 따르고자 할 텐데요?”

“그 범위를 넘어선 내용이라, 각자에게 이로운 길을 택하기로 했습니다.”

대체 뭘까? 두 사람만의 비밀 대화가 상당히 궁금해지는데.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