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8화
나도 놀랐지만 나보다 먼저 내린 에브린과 둘째 언니도 나만큼 두 눈을 동그랗게 뜨며 그를 쳐다보았다. 그는 대수롭지 않게 어깨를 으쓱거리며 태연하게 대꾸하였다.
“믿을만한 호위가 저밖에 없다고 하니 별수 있습니까? 당신은 저를 믿지 못하겠지만요.”
퉁명스럽게 투덜거리면서 팔짱까지 낀 황실 기사 제복을 입은 남자는 파빌리엔이었다. 설마 황자를 보내올 줄은 몰랐고, 생각지도 못한 상대여서 상당히 혼란스러워졌다.
“믿지 못해서가 아니라 설마 황자 전하께서 직접 제 호위를 하신다는 사실이 믿겨지지 않아서 그래요.”
“언제부터 황자 전하라고 칭하였습니까? 그냥 편하게 전처럼 이름이나 부르십시오. 남들 듣기 민망합니다.”
콧등을 손가락으로 긁적거리며 시선을 피하기까지. 정말 그 호칭이 듣기 불편하다는 느낌이다. 황궁에서는 위엄 넘치는 황자의 모습을 보이더니 그건 다 연기였다는 듯 어느새 내가 알던 제멋대로의 파빌리엔으로 돌아와 있었다.
“알겠어요, 파빌리엔. 앞으로 잘 부탁드려요. 호위도 중요하지만 항상 목숨은 소중하고 귀하다는 걸 명심하길 바라요.”
“절대 형님보다 먼저 죽을 생각은 눈곱만큼도 없어서. 그쪽이나 위험한 곳으로 다니지 말고 얌전히 몸을 사리십시오. 당신 생각보다 더 위험한 상황이 벌어질 수도 있으니까.”
별일 아니라는 것처럼 이야기하긴 했지만 충분히 예상하고 있던 문제다. 황족 다음으로 가장 대단한 권력을 가진 가벨론 공작이 모든 귀족 앞에서 톡톡히 망신을 당하는 수모를 겪었으니 지금쯤 또 다른 계략을 꾸미고 있을지도 모르고.
아마 가벨론 공작도 어떻게든 공작가의 핏줄을 타고난 황제를 앞에 세우고 제국을 자기 마음대로 주물럭거리고 싶은 것이 분명하다. 자신의 혈육인 황태후가 그랬던 것처럼. 그러기 위해서는 파빌리엔의 협조가 필요할 텐데, 파빌리엔이 호락호락하지 않아서 더 초조할 것이다.
설마 황자들 중 유일하게 살아있다는 5황자와 반역을 꾸미는 건 아니겠지? 그거야말로 최악의 시나리오인데.
“어이. 무슨 생각을 하는데 그렇게 혼자 심각한 겁니까? 어서 안으로 들어가지요? 곧 해가 질 텐데.”
“아, 네.”
머릿속이 복잡하다. 아까 레이니드의 어머니인 황제의 또 다른 정부를 보았을 때에는 크게 나쁠 것이 없어 보였는데. 레이니드가 충고해준 이야기가 영 꺼림칙하다. 정확하게 지목한 ‘마녀’가 왠지 그의 어머니를 뜻하는 느낌이라서.
전에 에쉬에게 5황자에 대해서 물었을 때, 제 어미를 닮아 대하기가 영 껄끄럽다고 했었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르겠다고.
‘사람은 생긴 걸로 판단할 수 없다더니.’
왕국으로 돌아가면 백작저에 얌전히 있어야겠다. 돌아가면 에쉬의 어머니가 잠들어계신 사유지를 한번 방문하여 정식으로 인사를 드리고 싶었는데.
아쉬운 한숨을 내쉬며 배정된 방으로 들어와 불편한 드레스를 벗어버리고 깨끗이 씻었다. 그나마 조금 홀가분해져서 편하게 소파에 앉아 등을 깊숙이 파묻고 두 눈을 감은 채 휴식을 취하였다. 하지만 머릿속은 여전히 복잡하였다.
고민한다고 나아지는 것도 없는데 왜 이렇게 사서 고생인지 모르겠다. 어차피 벌어질 일은 벌어지기 마련인데. 더군다나 내 힘으로는 말릴 수도 없는 일들뿐이고.
“그래, 당장 어떻게 할 수 없는 거잖아. 그냥 조심할 것만 조심하면 되겠지. 일단 내가 할 수 있는 것만이라도 해내면 돼.”
“자가 최면이라도 거는 겁니까?”
분명 혼자인 내 처소에서 파빌리엔의 목소리가 들려와서 깜짝 놀랐다. 심장이 철렁 내려앉아 두 눈을 번쩍 뜨자, 맞은편 소파에 삐딱하게 앉아 있는 파빌리엔이 천연덕스러운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거렸다.
“왜 그리 놀랍니까? 유령이라도 본 것처럼?”
“……진짜 유령인 거, 아니에요? 파빌리엔의 모습으로 실체화를 했다거나?”
“아직도 유령과 실체를 구분하지 못합니까? 그 아무리 대단한 마력이라 해도 진짜 사람처럼 완벽하게 구현할 수는 없습니다만.”
지금 핀잔을 주어야 할 사람이 누구인데 저렇게 당당한지. 나는 눈을 가늘게 뜨며 그를 추궁했다.
“아무리 완벽할 수 없다지만, 평생 경험해보지 못한 것을 마주하자마자 그런 소소한 다름을 구별하기가 쉬운 줄 알아요? 그리고 여기는 제 방이에요. 여자가 혼자 있는 방에 아무 허락도 없이 들어오는 거, 상당히 무례한 행동이지 않나요?”
그러나 파빌리엔은 한쪽 입꼬리를 삐딱하게 끌어올리면서 코웃음을 쳤다.
“근접호위의 뜻을 모르나 봅니다. 황족의 호위는 습격을 받을 때 가장 먼저 방어할 수 있도록 가장 가까이에 머물거든요. 당신은 예비 황족이니 이것도 익숙해져야겠지요.”
“……가까이에서 호위하는 것과 남의 방에 멋대로 침입하는 건 좀 다르지 않나요?”
“침입이라니요. 나는 처음부터 이 방에 있었습니다. 당신이 욕실에 들어갈 때를 제외하고 행동 하나하나를 눈여겨보고 있었는데, 몰랐습니까?”
“뭐, 뭐라고요?!”
처음부터 있었다니. 분명 나를 따라온 우리 가문의 사용인들을 제외하고는 아무도 없었는데. 남자는 더더군다나 본 적 없고.
“원래 황족들은 부부관계를 맺는 침실 근처에도 호위를 둡니다. 하물며 평소에도 있는 듯 없는 듯 존재하는 이들이 황실 기사들이지요. 이 숨이 끊어지지 않는 한 혼자만의 시간을 가질 수 없는 것이 황족의 운명입니다.”
그렇다는 이야기를 건너건너 듣긴 했지만. 새삼 다시금 느끼게 된달지. 나와 상관없고 그저 내게는 먼 이야기라 생각하여 대충 흘려들었던 것이 현실이 되어버렸다.
“에쉬가 근접호위를 명하던가요?”
“당신에게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그땐 편히 죽을 수도 없을 거라고도 겁박까지 했었지요. 믿고 맡길 수 있는 만만한 사람이 저뿐인지라.”
예전에 본가에서 에쉬와 파빌리엔의 대련을 보았기 때문에 파빌리엔의 검술 실력이 꽤 대단하다는 것을 안다. 에쉬만큼 검을 잘 쓰는 기사, 또한 적어도 근접으로 호위를 맡겨도 괜찮다고 여긴 이를 추리고 추려서 결론지은 거겠지. 왕국과 나에 대한 정보를 확실하게 알기도 하고.
그는 아주 만족스럽다는 듯 환하게 웃으며 등받이에 몸을 기대고는 거만하게 턱을 치켜들었다.
“왜요, 설마 제가 당신을 어떻게 할까 봐 걱정인 겁니까?”
“당신이 목숨을 굉장히 아낀다는 건 잘 알아서 그런 걱정은 하지 않아요. 가장 위험할 때 가족이고 뭐고 일단 저부터 살자고 도망쳤잖아요? 그 일이 영원히 당신 발목을 잡을걸요?”
“……쳇.”
또 그 소리냐는 듯 미소가 가시면서 얼굴이 잔뜩 구겨진다. 자기가 한 짓을 후회는 하고 있는 것 같아서 그래도 양심은 있는 남자구나 싶다.
“제가 걱정하고 있던 건 앞으로 에쉬에게 닥칠 일들이에요. 당신도 아까 봤잖아요? 가벨론 공작은 그 많은 귀족과 외부 손님들을 앞에 두고 에쉬를 망자로 몰아세웠어요. 만약 에쉬가 그 자리에서 나타나지 않았더라면 아주 곤란해졌겠지요. 상황은 지금처럼 쉽게 정리되지 않았을 거고요.”
“별걱정을 다 하십니다. 형님이 그리도 못 미덥습니까?”
“나는 에쉬를 믿지 못하는 게 아니라 그를 둘러싼 보이지 않는 적들을 걱정하는…….”
“형님의 곁을 지키는 카시안의 정체를, 형님은 몰라도 저는 압니다. 그자가 곁에 있는 한 그 누구도 형님께 손가락 하나 까딱 대지도 못해요. 대기도 전에 손가락을 포함한 전신이 모조리 토막 날 테니까.”
걱정은 사치라는 듯 손을 휘저으며 내 말을 단번에 자른다. 그러나 그 내용이 더 소름 끼쳤다. 에쉬도 모르는 카시안의 정체를 파빌리엔이 어떻게 아는 걸까?
“그 정체가, 뭔데요?”
“뿔을 잃은 악마라고나 할까……. 확실히 인간은 아닙니다.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모르겠지만, 아바마마께서 죽어가는 그 녀석을 살려주었고 그 은혜를 갚기 위해 충성하겠다 하여 형님에게 붙여놓은 거라지요.”
악마라. 그러고 보니 저번에 그 유령이 지하 세계를 오간다고 에쉬가 그랬었는데. 정말 악마가 존재하는 걸까?
예전 같으면 저런 터무니없는 이야기를 듣고 현실성도 없다며 무시했을 테지만 이런저런 경험을 하고 나니 충분히 가능성이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짧은 시간에 이렇게도 사람이 변하는구나 싶고.
“그런데 일 년 전에 에쉬가 제게 나타났을 때에는 카시안이 왜 곁에 없었던 건가요?”
“그날 일이 좀 복잡했었습니다. 비엔트 왕국에서 발생하여 수많은 이들을 사망에 이르게 한 그 역병이, 누군가의 계략이었거든요.”
“……네?”
정상적으로 뛰던 심장이 서늘해지면서 얼어붙는 느낌이었다. 어머니를 죽게 만든 그 역병. 지난번에 아버지도 그런 말씀을 하셨지. 최초 역병의 발원지가 왕국과 아주 멀리 떨어져 있는 곳이었다고. 마치 공간을 이동한 것처럼…….
“설마, 왕국에 에쉬가 있는 것을 안 자가 에쉬를 죽이기 위해…… 일부러 역병을 옮겨왔다는 건가요?”
“비슷합니다. 다만 죽이기 위해서가 아니라 숨어있던 우리를 끌어내기 위한 수단이었지요.”
“그런 잔인한……!”
그저 자연의 섭리인 줄 알았다. 이상한 점이 있다 하더라도 설마 인간에게 치명적인 병을 일부러 옮겼을 거라고는 믿지 못했다. 그건 살인이자 대량학살이었으니까.
그 역병에 의해 나의 소중한 어머니도, 에브린의 사랑하는 언니도 그 아까운 목숨을 잃어버렸는데. 그게, 계략이었다니. 너무도 끔찍한 이야기에 머릿속이 암흑으로 뒤덮이는 기분이었다.
그날 에쉬는 수많은 암살자와 혈투를 벌였고 겨우 숨만 붙은 채 살아남았다. 에쉬를 유인해내기 위한 방책이었다면, 그 암살자를 보낸 이가 왕국에 역병을 풀었을 터.
“그들이 역병을 몰래 풀었다는 건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었지요. 운 좋게 살아남아 겨우 피신하였다가 다시 잘 숨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카시안이 그런 말을 하더군요. 왕국 내에서 무언가 봉인이 풀리는 소리가 들린다고 말이지요.”
“……그 유령.”
“그래서 상황을 잠시 지켜보겠다고 자리를 벗어난 것이 화근이었습니다. 바로 암살자들이 우리를 찾아내 덮쳤고, 그 이후로는 말 안 해도 아시겠지요.”
원인 없는 결과는 없다고, 하나하나 끼워 맞추니 비워져 있던 퍼즐이 점차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그 역병을 왕국에 풀어 에쉬를 죽이려고 한 이가 누구인지 알 것 같기도 하다.
에쉬의 존재 자체가 그저 불안하기만 했을 그 사람.
“4황자. 그가 왕국에 역병을 풀었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