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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만의 비밀스러운 꽃 (77)화 (78/113)

77화

마녀……?

그게 무슨 의미냐는 눈빛으로 레이니드를 마주하자, 그것 하나 이해 못하냐는 듯 나를 찌릿 노려봐서 괜히 주눅이 들어버렸다. 앞뒤 다 자르고 하고 싶은 말만 하면 내가 어떻게 알아듣겠어? 적어도 누구를 겨냥하는 말인지는 정확하게 해주어야지.

“조금만 더 자세하게 말씀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황녀 전하.”

정중히 설명을 요구하자 한숨을 푹 내쉬는 레이니드가 다시 손가락을 움직였다.

귀족이면서 그런 기본적인 것도 모르는 거야? 누구도 믿지 말라고. 특히 네게 관심을 보이는 이들을 더 조심하라는 뜻이야.

예비 황족으로서 가장 먼저 주입시키고 싶은 내용인 걸까? 황족이든 왕족이든 아무리 사랑과 관심을 받아도 외로운 자리라더니. 이 위험천만한 제국에서 누구도 믿을 생각은 없었다. 에쉬를 제외하고.

“그 말씀 가슴에 깊이 새기겠습니다. 또 제게 당부하고 싶으신 것이 있다면 알려주세요.”

그러자 픽 코웃음을 치는 레이니드가 내 손바닥을 철썩 내려치더니 신경질적으로 답을 해주었다.

그건 네가 알아서 해야지. 어디서 날로 먹으려 들어?

……얄밉게 나오시네. 에쉬한테는 한없이 어리광을 부리면서 다른 이들에겐 까칠하기 그지없다. 아쉽게도 그때부터 레이니드가 에쉬에게서 조금도 떨어질 생각을 하지 않아 아까처럼 둘만의 대화를 나눌 수도 없었다.

그 대신, 에쉬와 나의 다정한 모습을 본 제국의 귀족들이 두 눈을 반짝거리며 근처로 다가와 앞에서 알짱거렸다. 먼저 말을 걸어주었으면 좋겠다는 듯 눈치를 보고 있어서 좀 불편하기도 하고. 아직 국혼을 치르지도 않은 약혼녀일 뿐인데, 벌써 이런 관심이 불편하기만 하다.

“귀여운 황녀 전하께 폐하를 빼앗겨버렸네, 우리 슈아?”

다행히 에브린과 둘째 언니가 내게 말을 걸어서 마음이 조금 편해진다. 에브린은 전에 본가에서 레이니드를 본 적이 있어서 놀랍지도 않다는 듯 흥미롭게 두 남매를 지켜보았다. 둘째 언니는 마치 둘이 아버지와 딸 같다며 핀잔을 주기도 해서 절로 웃음이 나왔다.

나도 처음에는 그런 오해를 한 적이 있었으니까.

시간이 지날수록 연회의 분위기가 더욱 흐려졌다. 애초에 진짜 연회를 준비한 것이 아니기도 했고, 몇몇은 연회를 즐길 여유가 전혀 없는 관계로 가벨론 공작의 퇴장과 함께 하나둘씩 줄줄이 궁을 빠져나갔다. 남아있는 이들은 지금까지 그 어떤 유혹에도 흔들리지 않고 쭉 제국을 위해 가장 구석진 자리에서 묵묵히 일해 온 충성스러운 자들이었다.

“이렇게 공식적인 자리에서 뵙게 되어 광영입니다, 폐하. 그 어떤 일이 있어도 절대 저들 앞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을 것이라 여겼습니다.”

“지켜야 할 것이 생기면 용감해지는 법이지. 그대들도 지금까지 수고 많았다. 그렇게 흘린 소문을 저들이 곧이곧대로 믿을 줄은 몰랐으니.”

에쉬가 죽었다는 그 소문, 설마 에쉬가 직접 흘린 거였어?!

멀리서나마 그들의 대화에 귀를 쫑긋 세우고 열심히 들으려고 애를 썼다.

“제법 신빙성이 있는 소문이었으니 그 누구라도 믿지 않을까 싶습니다. 조만간 한번 제국민들 앞에 모습을 보여주시는 것이 좋겠습니다.”

“그야 국혼을 치르면 응당 해야 할 일인 것이니 급할 것도 없다. 아, 국혼은 조금 급하니 서둘러주었으면 하네. 나의 사랑스러운 신부와 오래 떨어져 있으면 불안해서 잠이 오질 않거든.”

그러면서 고혹을 한껏 담은 눈빛으로 나를 보길래 심장이 용수철처럼 튀어나오는 줄. 뺨이 발그레 달아올라 손바닥으로 가리려고 덮자 에브린이 옆에서 음흉하게 웃고는 손가락질을 한다. 하고 싶은 말은 많으나 둘째 언니 앞이라서 표정으로 대신 말하겠다는 느낌으로.

그리고 여전히 에쉬의 옆에 매미처럼 찰싹 달라붙어 있는 레이니드는 입술을 삐죽 내밀고는 삐쳤다는 듯 콧방귀를 뀌면서 고개를 휙 돌린다. 물론 에쉬는 그러거나 말거나 신경도 쓰지 않았지만.

“알겠습니다. 국혼을 최대한 서두르도록 하겠습니다.”

“가장 첫 번째 순위에 놓도록.”

“예, 폐하.”

지금껏 함께 국무를 봐온 이들이 확실하다. 굉장히 믿음직스럽고 충성스러운 저들이 에쉬의 곁에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불안감이 조금은 가셨다. 나랏일이라는 게 황제 혼자의 힘만으로는 감당하기 어려운 일이니.

그들이 물러가고 차례차례 타국의 손님들과 짧은 인사를 나누었다. 나는 마지막까지 그 모습을 멀찍이서 지켜보며 최대한 얼굴을 익혀보려고 노력했다. 사람 얼굴을 익히는 것이 내게는 너무도 어려운 일이어서.

마지막 왕국의 손님들이 전부 물러가고 나서 남은 건 우리뿐이었다. 둘째 언니가 먼저 앞장서서 에쉬에게 다가갔고, 아주 정중하게 허리를 숙여 황제에게 예우를 다하였다.

“이렇게 모두를 놀라게 하다니요. 정말 짓궂으십니다, 폐하.”

“미리 언질을 해드리지 못해 죄송합니다, 후작 부인. 상황이 상황인지라. 저들이 저렇게 거짓 소문에 현혹되어 황위를 멋대로 갈아치우려는 그 행태를 보고만 있을 수는 없었습니다.”

“역시. 6황자인 저분께 황위를 쟁탈하라 등 떠밀고 공작가의 여식으로 보이던 그 영애를 황후의 자리에 앉히고 싶었나 봅니다. 연회가 시작되기 전부터 그 영애가 황자 전하를 주시하다가 일부러 와인을 쏟는 것을 보았거든요.”

그런 일이 있었던 건가. 에쉬의 근처에 서 있던 파빌리엔이 연회 시작 이후 처음으로 얼굴을 구기면서 짜증 섞인 태도를 보였다.

그래도 손님들 앞에서는 황자 노릇을 하기는 하는구나 싶기도 하고.

“어쩐지 파빌리엔의 의복이 바뀌었다 했는데 그런 일이 있었군요. 가벨론 공작이 다음엔 어떤 수법을 쓸지, 기대가 되기도 하고.”

“제가 저의 막냇동생을 꽤나 귀히 여긴답니다. 부디 제 입에서 험한 말이 나오는 일이 없기를 바랄 뿐입니다.”

“정부라도 들이면 죽이겠다는 말로 들리는군요. 걱정할 것 없습니다. 우려할 일은 제 숨이 끊어져도 없을 테니까요.”

그 대답이 참으로 만족스러워 환하게 웃는 둘째 언니가 다시 에쉬를 향해 인사를 하고 몸을 돌렸다. 그러더니 나를 보고는 싱긋 웃었다.

“우리가 타고 가야 할 마차에 문제가 생겨서 수리를 하려면 시간이 좀 걸릴 것 같다더라. 나는 먼저 가 있을 테니까 천천히 나와도 돼.”

아마 마차에 문제가 생겼다는 건 거짓말일 거고, 나와 에쉬에게 잠시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시간을 주겠다는 의미일 것이다. 그것이 사실이라는 듯 에브린도 눈치껏 에쉬에게 정중히 인사를 하고 둘째 언니를 따라 나갔다. 또한 파빌리엔도 에쉬에게 들러붙어있는 레이니드를 억지로 떼어내고는 버둥거리는 것도 무시하고 어디론가 데리고 가버렸다.

그리고 아주 순식간에 연회장을 정리하던 시종 시녀와 시종장까지 눈 깜짝할 사이에 자리를 비웠다.

“……다들 아주 유능하네요. 눈치도 빠르고.”

“황궁 생활을 하다 보면 자연스럽게 몸에 배기 마련이지요.”

생글생글 웃으며 내게 다가온 그가 자연스럽게 커다란 손으로 내 허리를 감싸 안는다. 느낌이 조금 묘했다. 그가 황제의 관을 쓰고 가까이에 있는 것도, 황제로서 나를 대하는 그 미묘한 이질감까지.

“긴장하는 겁니까? 평소와는 다르게 조금 굳어있는 것 같은데. 어제만 해도 내 품에 달려들어 안기던 나의 슈아가 아니라서 조금 낯설군요.”

“에쉬와 황제 폐하가 같은 사람이긴 해도, 느낌이 확연하게 다르거든요. 감히 함부로 바라볼 수도 없는 위치에 있는 분이잖아요. 아, 물론…… 그렇다고 벽이 느껴진다거나 거리감이 생긴다거나 그런 건 아니에요.”

“자주 보다 보면 익숙해지겠지요. 황제라 해도 결국 한낱 평범한 인간에 지나지 않습니다. 나 역시 그저 아끼고 사랑하는 사람을 곁에 두고 싶은, 지극히 평범한 남자 중의 남자이지요.”

아까까지만 해도 남아있던 황제의 위엄은 눈 녹듯 사라지고 달콤한 미성으로 내 가슴을 설레게 한다. 기다란 눈꼬리를 가느다랗게 접고 고개를 숙여와 내 뺨에 입을 맞추는 그 짜릿한 촉감에 긴장으로 굳었던 어깨가 사르르 풀렸다.

“오늘 가면…… 이제 왕국에는 당신이 없겠네요.”

“한 달 안으로 국혼을 치를 수 있도록 준비할 겁니다. 아 그럼 백작께서 서운해하실까요?”

“딸의 행복이 가장 먼저라고 생각하시는 분이어서. 위험한 곳으로 보내야 한다는 것만 아니면 축복해주시리라 믿어요.”

아버지는 유령의 존재도 알기 때문에 만약 이번 일에 대해서 듣게 되면 굉장히 걱정하실 거다. 그렇다고 숨길 수는 없는 이야기고. 아마 왕국에 혼자 남느니 에쉬의 곁이 더 안전할 수도 있음을 열심히 어필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나는 에쉬의 널찍한 가슴팍에 뺨을 파묻으며 긴 숨을 내쉬었다.

“그 유령은, 돌아오겠지요?”

“워낙 종잡을 수 없는 녀석이라. 카시안과의 싸움에서 제법 크게 외상을 입은 것 같다고 들었습니다. 아마 회복기간이 꽤 길어서 바로 돌아오진 않을 수 있다고는 하지만.”

“유령은 사람과 달리 외상을 입어도 금방 회복된다고 들었는걸요?”

“예. 그래서 확실하게 답을 내릴 수가 없습니다. 해서 저 대신 당신에게 호위를 하나 붙여두었습니다. 믿을만한 놈이니 마음껏 부려먹어도 됩니다.”

황궁 기사를 붙여놓는 거려나. 저번에 에쉬와 카시안이 그렇게 내 곁을 지키고 있었으니까.

“그럴게요. 고마워요. ……앞으로 폐하라고 불러야 하겠지요?”

“과거에 내 어머니는 아바마마를 이름으로 불렀습니다. 아바마마께서도 마찬가지고요. 더군다나 우리는 곧 부부가 될 테니 전처럼 서로를 편하게 대했으면 하는군요.”

에쉬도 폐하라는 호칭이 어색하다는 듯 한쪽 눈을 찡그렸다. 아직 그도 자신의 위치가 익숙하진 않겠지. 모든 것을 포기할 생각으로 내게 돌아왔었으니까.

“그렇게 할게요, 에쉬.”

마음 같아서는 더 오래 그와 함께 있고 싶었지만 일단은 돌아가야 했다. 더 늦으면 그만큼 머물 숙소에 도착하는 시간도 늦어지고 둘째 언니와 에브린에게 민폐가 될 테니까.

아쉬움을 뒤로하고 에쉬에게 다음을 기약한 뒤에 나를 기다리고 있던 마차에 올랐다. 차마 떨어지지 않던 내 발걸음과는 다르게 마차는 지체 없이 출발하였고, 나는 에쉬의 모습이 보이지 않을 때까지 마차 창밖으로 손을 흔들어주었다.

안 하던 짓을 한다며 에브린이 핀잔을 부렸으나 개의치 않았다.

한참을 달리던 마차가 황실 별장에 다다르고 마차에서 내리자마자 황궁 기사 제복을 입고 있는 익숙한 남자가 눈앞에 있어서 어리둥절했다.

“……내 호위를 맡았다던 기사가, 당신이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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