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나만의 비밀스러운 꽃 (76)화 (77/113)

76화

과연 에쉬가 무어라 대답할지 궁금해진다. 슬쩍 그의 표정을 살폈지만 역시 생각을 읽을 수 없는 가면 같은 미소를 유지하고 있었다.

“아, 그랬던가? 무능하던 형제들에게서 국정을 전부 위임받아 처리했다던 그 모든 일들을 다시 손보느라, 즉위 후 몇 달간 집무실을 벗어나지 못하고 밤을 꼬박 새웠던 일을 떠올리면…… 지금도 분이 가시질 않더군.”

“예……?”

“공작의 일 처리 능력이 참으로 볼만했다. 귀족 가문의 후계 교육이 고작 그 수준밖에 되질 않을 줄이야. 후계 수업을 받은 지 고작 몇 달 되지 않은 백작 영애의 수준이 더 높을 지경이니 참으로 부끄러운 일이 아닌가.”

피곤하다는 듯 미간을 좁힌 에쉬가 고개를 가로로 젓는다. 그게 나에 대한 내용이라는 것을 알아서 괜히 얼굴이 화끈거렸다. 그러나 에쉬는 모른 척 계속 비아냥거렸다.

“그 삼 년간 나라 꼴을 아주 엉망진창으로 만들어놨더군. 내 입이 아파서 다 늘어놓을 수는 없지만, 구정물을 식수로 바꾸는 일만큼 고단하였다면 설명이 될까.”

그런 말을 들을 거라고는 예상조차 하지 못한 가벨론 공작의 낯빛이 새파래진다. 단둘만 자리한 곳도 아니고 제국 모든 귀족과 타국에서의 손님들도 와계신 공식적인 자리에서 아주 톡톡히 망신을 당하고 있으니. 그것도 황족 다음으로 제국에서 가장 대단한 권력을 행사하는 황태후의 친정 가문인 공작가가.

그럼에도 에쉬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입꼬리를 비스듬히 끌어올렸다.

“제국의 귀한 국고를 쓸데없는 아가리에 처넣은 증거들이 벽난로 불쏘시개가 되었던 것들을 다시 복구하는 데 성공했지. 참으로 가관이더군. 선황인 나의 아바마마께서 그리 아끼고 귀히 여겼던 귀족 가문 모두, 좀도둑이 되어버렸을 줄이야.”

에쉬가 안타까운 표정으로 태연하게 귀족들을 저격하였다. 결국 가벨론 공작이 불만에 가득 찼던 이유가 그거였구나. 국고를 마음대로 운용하며 하고 싶은 일을 마음껏 할 수 있었는데, 에쉬가 즉위한 뒤로 딱 잘라내 더는 손댈 수 없었기 때문에.

왜 내 것이 아닌 것을 욕심냈을까? 더군다나 국고는 제국민의 혈세인데.

“게다가 나를 고작 인형으로 취급하고, 멋대로 망자라 지껄인 그대들의 가벼운 언행을 어찌 생각해야 할지 도무지 감이 오질 않아. 가벨론 공작의 생각은 어떠한지 묻고 싶군.”

“…….”

“아니면 이 또한 내가, 직접 처벌을 내려야 하는가?”

조금 더 스산한 눈빛을 발산하는 에쉬의 읊조림에 연회장이 그저 쥐죽은 듯 고요해졌다. 고압적인 태도이긴 했으나 그것이 황제의 위엄이라 생각하면 나쁘진 않다고 본다.

더군다나 저들이 이전에 에쉬의 말처럼 국고를 제멋대로 탕진한 것이 사실이라면 고작 이 정도로 끝낼 수는 없는 노릇이기도 하고.

조금도 봐주지 않겠다는 듯 살벌하게 노려보던 에쉬가 다시 표정을 풀고는 해사하게 웃었다.

“일단 그건 나중에. 오늘같이 기쁘고 즐거워야 할 건국기념 연회를 장례식장으로 만들 수야 없으니까.”

에쉬가 손을 들어 손가락을 까딱하자 어디선가 갑자기 불쑥 나타난 시종장이 와인 세 잔이 담긴 트레이를 에쉬에게 내민다. 그 중 에쉬가 한 잔을 들자 남은 두 잔을 나와 파빌리엔에게 각각 전달해주었다.

동시에 황궁 시녀들이 기다렸다는 듯 와인잔이 담긴 트레이를 들고 돌아다녔고, 그 자리에 있는 모든 이들이 긴장한 채로 잔을 하나씩 들고는 에쉬의 눈치를 살폈다.

확실히 겁에 질린 채로 긴장하고 있는 이들은 제국의 귀족들인 것 같았고, 그 외의 다른 손님들은 침체된 분위기가 불편하다는 듯 떨떠름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베일에 싸였던 황제를 직접 보게 되어 신기하다는 듯 두 눈을 반짝거리고 보는 이들도 있었고.

모두가 잔을 가진 것을 확인한 에쉬가 들고 있던 자신의 와인 잔을 높이 들며 직접 축사를 읊었다.

“길게 말할 것도 없이 제국의 훗날을 위하여 발 벗고 나서서 애쓰는 모든 이들에게 영광을 돌리겠다. 우리를 어여삐 여기시는 신의 가호가 충만하기를.”

에쉬가 와인을 한 모금 마시자마자 멈추었던 악기연주가 다시 시작되면서 분위기가 점차 처음처럼 화기애애해진다. 가벨론 공작과 더불어 연회를 불편하게 생각하는 이들이 여전했으나 그거야 본인들이 자초한 일이니 어쩔 수 없지.

“슈아, 많이 놀랐습니까?”

연회 분위기를 살피며 와인을 홀짝 마시는 사이, 에쉬가 내게 다가오며 살갑게 웃고는 내 손을 잡고 손등에 입을 맞춘다. 공개적인 자리에서 아예 대놓고 나와의 관계를 못 박아 둘 생각인 모양이다.

해서 나도 환하게 웃어주었다. 그의 얼굴을 보고 있자면 웃음이 절로 나기는 했지만, 황제의 관을 쓰고 있는 그의 모습이 조금 어색하기도 하고. 조심스러워지기도 하고.

“미리 귀띔이라도 해주지 그러셨어요. 사실 폐하께서 사망하였다는 오해를 받는 것이 조금 불쾌했단 말입니다.”

“사실 결정을 내린 건 오늘 새벽이었고, 가벨론 공작이 어떻게 나오는지 두고 보려는 속셈도 있었습니다. 저들이 이번 연회 때 거사를 치를 계획을 꾸미고 있다는 보고를 받았었거든요.”

“아……. 건국기념제가 제대로 열리지 못할지도 모른다던 그 말이 이런 뜻이었던 건가요?”

“비슷합니다. 해결해야 할 문제들이 좀 많아서 이 모든 것을 종식하기 위해서는 이 방법밖에 없더군요. 그것이, 당신에게 많은 짐을 지게 하는 것 같아서 최대한 피하려고 했지만…….”

그가 그런 생각을 할 거라고는 예상하고 있어서 나는 조용히 한 손으로 그의 손등을 꼭 감싸 쥐었다. 왕국의 백작 가주가 되는 것과 제국의 황후가 되는 것은 그 짐의 차이가 너무도 크다는 것을 서로 잘 알고 있기 때문에.

“나는 무엇이든 잘 이겨낼 수 있어요. 폐하께서 선택하신 것이 이것이라면, 따를 준비도 되어있고요. 늘 제 곁에만 있어 주신다면 그 어떤 것도 두렵지 않아요. 우리는 살아서도 죽어서도 함께라고 약속한 사이니까요.”

마음의 준비는 진작 했으니까. 아버지도 제국의 평화와 안정을 위해 국혼을 해야 한다고 하면 불안해하시기는 해도 반대하진 못하실 거다. 그만큼 왕국을 사랑하는 분이니까.

“슈아…….”

쾅!

둘만의 세계에 빠져 서로 마주 보며 흐뭇하게 웃고 있는데, 갑자기 굳게 닫힌 연회장 정문이 벌컥 열리면서 큰 소리를 낸다. 연주하던 악사들도 갑작스러운 소음에 삐끗하며 연주를 멈추기까지.

이제야 겨우 연회다운 분위기가 흐른다 싶었는데 누군가 싶어 고개를 돌리자, 부채로 얼굴을 반쯤 가린 백금발의 여자가 안으로 걸어들어오고 있었다. 그 뒤로 눈에 익은 소녀와 함께.

“레이니드?”

황녀이자 에쉬가 꽤나 귀히 여기던 여동생. 어쩐지 불만이 가득해서 뾰로통한 표정을 짓고 있는 레이니드와 함께 우리 쪽으로 다가오는 그 여자도 레이니드와 똑같은 백금발이었다.

그 여자인가 보다. 레이니드와 5황자의 어머니이자 선황의 정부 중 한 사람.

그 여자를 알아본 귀족들이 자연스럽게 길을 터주었고, 쩍쩍 갈라지는 인파 사이로 걸어온 여자가 부채를 접고 방긋 웃었다.

“오는 길에 마차가 말썽이어서 제가 조금 늦었군요. 이리 중요한 날에 늦지 않으려고 그렇게 서둘렀는데도 지각을 했으니 부디 넓은 아량으로 용서해주오, 황자. 아니, 이제는 폐하시로군요.”

레이니드가 여우같이 새초롬하게 생긴 거에 반해 여자는 지난번 카시안이 잡아 온 황궁 시녀만큼 부드러운 인상을 지니고 있었다. 날카롭게 찢어져 매서운 눈빛을 자랑하는 레이니드와 다르게 살짝 쳐진 눈매에 서글서글한 미소, 무엇보다 금방이라도 깨질 것 같은 유리 화병 같은 청초함이 엿보인다.

과거 레이니드를 통해 에쉬에게 독을 먹이려 했던 이가 이 여자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는데. 벌레 하나 제 손으로 잡지 못할 것 같은 저 여리여리한 외모는 독 같은 무서운 물건과는 절대 친해 보이지 않았다.

게다가 아주 신비로운 연보라색 눈동자는 순박해 보이는 소녀처럼 생기 있게 반짝거렸다. 세상에 단 한 명의 적도 없는 것처럼 순해 보였다.

그리고 그 여자는 이어서 나와 시선을 맞추며 예쁘게 눈웃음을 지어 보인다.

“북부까지 소문이 닿을 만큼 유명한 황제 폐하의 약혼녀가 이분이시군요. 제가 그리 황자비가 될 분을 몇 추천해드렸는데, 단 한 명에게도 눈길을 주지 않았던 이유가 여기 있었나 봅니다. 이리 아리따운 분을 반려로 낙점하실 줄이야.”

웃는 것조차 사르르 녹아내리는 초콜릿 퐁듀처럼 달콤하고 어여뻤다. 적의나 경계심이 전혀 없는 다정한 눈빛도 상대의 마음을 편안하게 해주었다.

“아, 인사가 늦었네요. 마리아라고 불러주세요. 여기 계신 둘째 황녀 전하의 어미입니다.”

그저 황제의 정부였기 때문에 작위는 없고, 자신의 딸에게 경어를 사용하는데 그게 꽤나 자연스러웠다.

그나저나 레이니드가 둘째 황녀라면, 황녀가 더 있다는 뜻일 텐데. 제국 황녀에 대한 소문을 들은 적이 없어서 좀 의아하긴 했었다. 워낙 황자의 난이 유명해서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무사히 도착하셔서 다행이네요. 반겨주셔서 감사합니다. 지난번에 황녀 전하를 뵌 적이 있어서 다시 뵙게 되어 더 반갑게 느껴집니다.”

“어머? 저희 황녀 전하를 뵌 적이 있으십니까?”

“예. 워낙 아름다운 백금발을 가지고 계신 터라 잊지 않고 기억하고 있답니다.”

그러자 수줍다는 듯 볼을 붉히며 한껏 승천한 입꼬리를 주체하지 못한다. 그 옆에 서 있는 레이니드는 자신의 철없는 어머니가 너무 부끄럽다는 눈빛으로 흘겨보다가 한숨을 폭 내쉬면서 눈동자를 데굴 굴렸다.

저런 소녀같이 풋풋한 감정을 드러내는 사람을 보는 게 얼마 만인지. 내 어머니와 살짝 겹쳐 보여서 괜히 가슴이 두근거렸다. 어머니의 미소도 저렇게 맑고 깨끗했으니까.

“폐하께서 약혼녀를 아주 잘 고르셨군요. 사실 별로 기대는 하지 않았는데 미래의 황후 폐하가 마음에 쏙 드네요. 앞으로 친하게 지내요, 우리.”

“여부가 있겠습니까? 물론 그리하겠습니다.”

마리아가 아주 흡족해하면서 에쉬에게 가볍게 묵례를 한 이후, 다시 연회장의 사람들 틈으로 합류하였다. 솔직히 황제의 정부라고 하면 간혹 황후보다 더 대단한 권력을 휘둘러서 문제를 일으키는 경우가 많다고 하던데. 듣던 것과 다르게 아주 순하고 착한 사람 같았다.

저렇게 자신의 딸을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어머니를 둔 레이니드는 왜 어머니보다 에쉬를 더 따르는 건지.

마리아가 떠나고 나서 레이니드는 어머니를 따라가지 않고 에쉬에게 다가와 초롱초롱한 눈망울로 그를 빤히 올려다보았다. 그런 여동생이 그저 귀엽기만 하다는 듯 에쉬는 레이니드의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북부에서 이곳까지 오느라 고생 많았다. 제법 먼 거리인데, 마차 여행은 괜찮았고?”

그 말에 함박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빠르게 끄덕거리고는 에쉬에게 매달려 품에 안기기까지. 하긴 저렇게 인자한 오라버니라면 충분히 따르고도 남겠다.

곧 레이니드가 옆에 서 있는 나를 흘겨보고는 코웃음을 픽 치고는 내게 손을 내민다. 할 이야기가 있다는 뜻이다. 해서 빈손을 레이니드에게 내밀자, 손가락으로 내게 전할 말을 새겼다.

마녀에게 현혹되지 마.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