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5화
나는 고개를 슬쩍 돌려 모두의 이목이 집중된 얇은 커튼 너머의 옥좌를 바라보았다. 여전히 에쉬의 인형이 미동 하나 없이 조용히 그 자리를 지키고 있다.
에쉬가 황좌를 되찾은 지 석 달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저렇게 황제가 모습을 드러내지 않은 채 국정을 독단으로 처리했다고 하니까 불만이 쌓일 때가 되긴 했겠지. 아마 그것을 이번 연회에서 터트리기로 작정한 것이 분명하다.
그리고 이어진 가벨론 공작의 질문에 연회장은 순식간에 찬물을 뒤집어쓴 것처럼 고요해졌다.
“듣자 하니 당시 제 3황자 전하께서 이미 오래전, 암살자에 의해 사망하셨고, 그에 대한 복수로 6황자 전하께서 황좌를 찬탈하여 대타로 인형을 세운 것이라고 하던데. 이 소문에 대한 진실이 무엇입니까?”
에쉬가 암살을 당하여 사망했다는 소문이 돈다, 라.
수많은 암살자가 에쉬를 죽이기 위해 혈안임을 안다. 그가 황위에 오른 이후에도 수없이 찾아와 목숨을 앗아갈 기회를 엿보았던 것도.
‘죽을 뻔하긴 했었지. 그때 만약 내 마차에 오르지 않았더라면.’
그때도 자신을 죽이려던 이들과 생사를 오가는 싸움을 벌였다고 했다. 또 그의 어머니가 어린 시절 머물렀다던 사유지에 쳐들어온 이들도 그러하였지.
암살이라는 게 원래 비밀리에 움직이는 이들 아닌가? 그런데 어떻게 저런 소문이 도는 거지?
파빌리엔은 그 말에 조금도 흔들림 없이 가벨론 공작을 지그시 바라보았다. 어디 무슨 말을 더 하는지 들어나 보자라는 느낌이었다.
“전하, 이제 더는 제국민들을 농락하지 마십시오. 그만 모든 사실을 낱낱이 밝히어 제국의 앞날을 도모하셔야 하지 않겠습니까? 전하께서 형님 되시는 3황자 전하를 아버지처럼 잘 따르고 의지했음을 압니다. 허나 이제 그만 현실을 직시하셨으면 합니다.”
“내가 형님을 대신하여 복수하고자 다른 형님들을 처단하였다 생각하십니까?”
“두 분의 돈독했던 사이를 잘 압니다. 겉으로 드러내진 않았으나 두 분을 오래 뵈어온 소인이 그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전하, 망자는 망자의 길이 있사옵니다. 억지로 잡아둔 그 손을 이제는 놓아주실 때도 되었습니다.”
가벨론 공작은 에쉬가 진짜 사망했다는 전제하에 설득이라는 것을 하고 있었다. 조금도 의심의 여지가 없다는 듯 못을 박는 단호한 입장으로 말이다.
하지만 내 눈에는 이상하게 아버지뻘쯤 되는 저 가벨론 공작의 의도가 영 불순해 보였다. 그저 순수한 목적을 가지고 파빌리엔을 위해서 하는 말이 아닌 것 같았다.
‘저런 류의 사람을 잘 알지. 속에 능구렁이 백 마리쯤 품고 있는 독사 같은 사람.’
황태후의 가문이라서 그런지 황태후도 수상하다. 오늘같이 제국의 큰 행사에 황실의 가장 어른인 황태후가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이유. 황태후는 자신의 남편인 선황의 혈육도 아닌 황태자를 차기 황제의 자리에 올리기 위하여 부단히 애를 썼다고 했지.
하지만 아들인 황태자가 사망했다고 해서 과연 저 공작가가 차기 황제의 자리를 포기할까?
나는 가벨론 공작의 옆에 서 있는 한 소녀를 잠시 바라보았다. 이제 갓 성인이 되었다는 듯 앳된 얼굴은 가벨론 공작과 꽤 닮아있었다. 한껏 힘주어 치장한 화려한 드레스와 단장을 보아하니 가벨론 공작 영애인 것 같은데.
구슬리기 쉬운 파빌리엔을 황좌에 앉히고 딸을 황후로 만들고 싶은 생각일지도.
“내 형님이 저렇게 버젓이 살아계신데, 자꾸 망자라 우기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거짓으로 꾸며진 상냥한 미소를 보이는 파빌리엔이 손가락으로 얇은 커튼 너머의 옥좌를 가리킨다. 그 손가락을 따라 시선을 옮기자 조금의 미동도 없는 인형의 실루엣만 얼핏 보였다. 지금 사방의 조명과 빛이 너무 강하고 더불어 단상 뒤의 스테인드글라스에 반사되어 제대로 보이질 않았다.
에쉬는 지금 어디에 있는 걸까? 이 모습을 보고는 있을지.
그런 파빌리엔이 한심하다는 듯 가벨론 공작이 깊은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가로로 저었다.
“왜 현실을 직시하지 못하시는 겁니까, 전하? 저 옥좌에 앉아 있는 것이 사람 모습을 한 인형이라는 목격담이 무수히 많습니다만.”
“누구입니까? 그 목격담의 주인공이.”
“제가 보았습니다.”
“저도 직접 제 눈으로 인형임을 확인하였습니다.”
아예 사실로 못 박으려 작정이라도 했는지 곳곳에서 인형을 보았다는 이들이 앞으로 나와 증언을 한다. 그리고 나는 보았다. 연회장 구석에서 숨죽여 우리를 지켜보는 황궁 시녀들이 창백한 얼굴을 한 채로 저들끼리 눈치만 보고 있는 것을.
그들은 어젯밤, 에쉬를 직접 두 눈으로 보았던 이들이었다. 처음 황제를 직접 보았고, 그 황제가 소문처럼 인형이 아닌 실제 사람이라는 것을 확인하여서 긴장하고 있었다.
아직 어젯밤의 이야기가 퍼지진 않았구나 싶기도 하고. 이럴 때 에쉬가 당당하게 모습을 드러내면 얼마나 좋을까?
죽은 사람으로 오해받는 것이 너무 불쾌하다. 만약 이 자리에 유령이 아직 있었다면 목소리라도 내어 저들의 말에 반박했을까? 실체화를 하여 모습을 드러낼 수도 있었을 것 같은데.
하필 이런 경우에 유령의 존재가 절실해질 줄이야.
나는 심호흡을 하며 목격자라고 하는 이들의 얼굴을 하나하나 확인하였다. 저 중에 과연 정말 본 사람이 존재하는 걸까? 이 알현장은 기사들의 철통 보완으로 아무나 들어올 수도 없을 텐데.
설마 그 시종장, 저들과 한패인 건 아니겠지?
“참으로…… 이상하군요.”
나는 모르는 척 한 손바닥으로 뺨을 감싸며 중얼거렸다. 최대한 고민하는 표정으로 말이다.
내 행동에 가장 먼저 반응을 보인 것은 가벨론 공작이었다. 그것도 아주 탐욕스러운 눈빛을 머금은 채.
“무엇이 이상하다는 겁니까, 영애? 영애께서도 무엇을 보았습니까?”
“만약 그대들의 증언처럼 폐하께서 이미 승하하셨고, 저기 앉아 있는 분이 인형이라면 어제 제가 본 이는 누구일까요?”
“……어제, 폐하를 뵈었다는 말씀이십니까?”
“그렇습니다. 폐하께서 시종장을 보내 제게 대면을 요구하셨고, 마침 만찬이 끝나던 때여서 시종장과 함께 폐하를 뵈었습니다. 제가 어릴 때 왕국에서 폐하를 뵌 적이 있어 그 용안을 똑똑히 기억하고 있거든요.”
가벨론 공작이 예상하지 못한 이야기에 두 눈을 파르르 떨었다. 내 말에 모두 동요하고 있는 것이 눈에 훤히 보인다.
커튼 너머의 옥좌를 힐끔 쳐다보는 이들도 있었다. 인형이라고 생각했는데 움직일 줄은 몰랐다는 것처럼 경악하는 이들도 있었고.
저 커튼 너머에 있는 것은 진짜 에쉬의 인형이긴 하지만.
“모두가 보았다던 그 인형은 폐하께서 암살의 위협을 조금이라도 막고자 어쩔 수 없이 세워둔 대타가 아니었을까요? 공작께서 하신 말씀처럼 즉위를 한 이후에도 폐하를 암살하려는 무리들이 존재하기 때문이겠지요.”
“가, 감히 황제 폐하를 누가 암살한다는 겁니까!”
“선황께서 승하하신 이후 지금껏 다른 황자들께서 돌아가신 것도 암살 아니었습니까? 그 독살, 황자 혼자의 힘으로는 절대 불가능한 일일 테니 분명 누군가를 사주하였거나 돕는 이가 있었을 테지요. 그건 충분히 가늠할 수 있는 내용이 아닐는지요.”
확실히 저 가벨론 공작이 점점 더 수상하게 느껴진다. 제 발 저린 것처럼 긴장한 모습이 역력했다. 그러나 무언가 결심한 듯 곧 다시 굳은 표정으로 자신의 의견을 피력하였다.
“아무리 그러하다 하나 가짜 인형을 황제 폐하로 섬길 수는 없는 노릇 아니겠습니까? 만일 폐하께서 아직 무사하시다면 그 모습을 드러내지 않을 이유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특히, 오늘처럼 중요한 건국기념 연회 당일은 더더욱.”
정말 살아있다면 어디 한번 모습을 드러내 보라는 요구겠지. 이 상황을 어찌 해결해야 하나 고민하는데, 단상 위의 커튼 너머에서 나직한 웃음소리가 들려와 오싹했다.
설마 유령인가?
파빌리엔도 그 웃음소리를 들었는지 단상 계단을 올라 옥좌 옆 커튼 앞에 서서 가볍게 묵례를 하며 묻는다.
“들으셨습니까, 폐하? 가벨론 공작이 귀족은 물론이고 백성을 조롱하고 능멸하는 황제 폐하를 섬길 수 없다고 합니다. 어찌하시겠습니까?”
놀랍게도 미동 없이 가만히 정자세로 앉아 있던 인형이 움직였다. 한쪽 다리를 꼬고 팔걸이에 팔꿈치를 얹으며 손으로 턱을 괴는 그런 자세로 고쳐 앉는다.
뭐지? 뭘까? 인형이 움직이기라도 하는 건가? 아니면…… 설마 에쉬?
“그럴 만도 하지. 충분히 이해는 한다. 내가 마지막으로 공개석상에 모습을 드러낸 것이 근 사 년 만이니.”
웃음기를 머금은 그 음산한 목소리. 몇 번 들었더니 익숙하다. 그건 에쉬의 목소리가 분명했다. 유령의 가벼운 말투와는 전혀 달랐다.
그리고 곧 그것을 증명하듯 자리에서 일어났다. 에쉬가 커튼 앞으로 걸어오자 단상에서 가장 가까이에 있던 시종들이 황급히 달려와 커튼을 확 거두었다.
내가 보았던 그 인형이 입고 있던 의복과 머리에 황제의 관을 쓴 에쉬가 나를 바라보며 빙긋 웃는다.
뺨에서부터 목까지 길게 남겨진 자상의 흔적. 또 허리춤에 채워진 황금빛 검. 인형에겐 없던 흔적들을 간직한 채 말이다.
“인사가 늦었습니다, 황제 폐하.”
나는 내가 지을 수 있는 가장 환한 미소를 얼굴에 담으면서 에쉬를 향해 정중히 허리를 숙여 예를 취하였다. 에쉬의 눈동자에 나를 향한 미안함이 역력하여 더욱 밝게 웃으려 노력해주었다.
그런 에쉬가 다시 표정을 굳히고는 정면을 바라보며 연회장을 아주 느릿하게 훑어보았다. 에쉬와 눈이 마주친 이들이 재빨리 고개를 숙이거나 시선을 피하느라 분위기가 아주 미묘했다.
특히 증언을 하려 나온 귀족들 전부가 크게 동요하며 더러는 이게 어떻게 된 일이냐는 눈빛으로 가벨론 공작을 쳐다보기도 했다. 그러나 가벨론 공작은 놀랍게도 아주 여유로운 너털웃음을 터트리며 에쉬를 향해 천천히 묵례를 건네었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근, 사 년 만인가요. 이제 황자 전하가 아닌 황제 폐하라 부르게 되어 감회가 새롭습니다.”
“내가 그대를 마지막으로 대면했을 때는 가문의 후계자이자 영식이었지. 꽤 늦게 작위를 넘겨받아 이제야 공작 소리를 듣게 되었군 그래.”
“아실지 모르겠사오나 노쇠하신 전 가주께서 둘째 황자였던 폐하를 모시다가 변고를 당하여 갑작스레 돌아가셨습니다. 폐하께서 계시지 않던 기간 동안, 제가 그만큼 제국을 위해 일하여 이만큼 안정을 시켰다는 사실을 듣지 못하셨는지요?”
모든 공을 자신의 것으로 돌릴 속셈이 훤히 보인다. 하지만 알 만한 사람은 다 알 것이다. 에쉬가 황위에 오르기 전만 해도 2황자와 4황자가 너무도 무능하여 제국이 크게 휘청거릴 뻔했다는 사실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