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4화
그리고 이어서 몰래 숨겨두었던 에쉬의 단도를 꺼내, 보이지 않도록 치맛단의 레이스 안쪽으로 채워서 고정시켜주었다. 실체화를 한 유령이라도 검을 들이대면 상처를 입을 수 있다고 했다. 피가 흐르진 않고 바로 회복되기는 해도 쉽게 접근할 수 없도록 만들 수는 있을 거라고.
“절대 무엇에도 현혹되지 말고, 마음 단단히 먹어. 너를 지킬 수 있는 건 오로지 너 자신뿐이야.”
“……응. 그럴게.”
그렇게 당부의 말을 남긴 언니가 걱정을 뒤로하고 연회장으로 떠났다. 나 역시 언니가 걸어준 팔찌를 손으로 매만지면서 초조하게 기다리기만 했다.
제발,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길.
꽤 한참을 그렇게 혼자 애타며 머릿속을 점령하는 별의별 생각들을 떨쳐내느라 애를 쓰고 있던 때. 똑똑, 노크소리가 들려왔고 조용히 문이 열리면서 다시 시종장이 나를 찾아왔다.
“폐하께서 영애를 모시고 연회장으로 오라 명하셨습니다. 제가 직접 에스코트를 해드릴 테니 가시지요.”
“폐하께서 다른 전언은 없으셨는지요?”
“다른 이야기는 듣지 못했습니다.”
대체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 건지. 에쉬가 저 시종장을 온전히 믿지는 않는 것 같던데. 유령과 한패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가시질 않아서 불안하기만 하다.
그렇다고 이 상황에서 싫다고 거절할 수도 없고.
‘……어?’
그때 살짝 열린 방문의 틈 사이로 카시안이 모습을 드러냈다. 에쉬와 똑같은 황금빛 검 손잡이를 꼭 쥔 채로 시종장의 뒤통수를 노려보던 카시안의 검붉은 눈동자가 나를 바라본다. 그러더니 특유의 짓궂은 미소를 그려 보였다.
그래서 알았다. 위험한 상황은 아니라는 것을. 저건 유령이 똑같이 따라 할 수 없는 익숙한 표정이라서 더 확신을 가졌다. 상당히 거만하고 재수 없는 그런 썩은 미소라서.
“그럼 길을 안내해주세요.”
“이쪽으로 오십시오.”
시종장이 몸을 돌리기 직전에 방문 사이로 보였던 카시안이 모습을 감추었고, 시종장은 아무것도 보지 못한 듯 조금의 동요도 없이 길을 잡았다. 아마 에쉬의 명령으로 시종장을 감시하고 있던 걸지도 모르겠네.
해서 나도 조용히 시종장을 따라 밖으로 나가서 알현장이자 초대 손님과 귀족들이 모여 있을 연회장으로 향했다.
“이 안으로 들어가시면 됩니다.”
“……여기는 지난번 방문한 알현장과 연결된 정문이 아니잖습니까?”
궁은 그 연회가 열리는 그 건물이 맞는데 들어가는 입구가 달랐다. 건물 뒤편에 있는 작은 문을 시종장이 직접 열어주었고, 그 안은 아늑한 복도가 길게 뻗어져있었다.
“여기는 황족들만이 이용하는 황족 전용 출입구입니다. 안으로 들어가시면 따로 에스코트할 분이 기다리고 계실 겁니다.”
황족 전용 출입구라니. 내가 황제의 약혼녀로서 와 있기 때문에 그 구실을 갖추기 위해서겠지. 제발 이 안쪽에서 나를 에스코트해줄 이가 에쉬이길 빌어본다.
나는 호흡을 고르고 시종장을 지나쳐 그 복도 안으로 들어섰다. 또각, 또각, 숨소리조차 들리지 않는 그 복도에 나의 구두 굽 소리만 울려 퍼졌다. 꼭 맞잡은 두 손바닥에 식은땀이 배어 축축했으나 그걸 신경 쓸 여유가 존재하질 않아서.
복도는 꽤 길었고 그 끝은 막다른 길이었다. 내가 걷는 복도의 왼쪽에는 군데군데 방문이 있었고, 오른쪽 벽 복도의 중앙에는 단 한 개의 커다란 문이 굳게 닫혀있었다. 아마도 저 커다란 문의 안쪽에 연회장이 있으리라.
그 문과 점점 가까워지던 찰나, 갑자기 왼쪽의 방문 하나가 스르르 열려서 흠칫 놀랐다. 어깨에 힘이 바짝 들어가면서 걸음을 멈추고 방 안에서 나온 이의 정체를 살폈다.
“……파빌리엔?”
익숙한 사람이어서 긴장이 살짝 풀렸으나 다시 마른 침을 꼴깍 삼켰다. 유령이 실체화를 하여 외모를 바꿀 수 있다는 것이 이렇게 큰 걸림돌일 줄이야. 대체 누굴 믿고 누굴 의심해야 하는지 모르겠어서 그저 혼란스러울 뿐이다.
파빌리엔은 내 생각을 읽기라도 한 것처럼 당연하다는 듯 두 손바닥을 들어 보이며 침착하게 설명했다.
“나 그 유령 아닙니다. 그렇게 대놓고 수상하다는 표정을 보이면 아무리 나라도 상처받습니다만.”
“당신도 알고 있었나요? 그 유령이 에쉬의 쌍둥이 형제고, 실체화를 한다는 것을?”
“물론입니다. 황제의 대리인은 그 인형이지만 곁에서 재상 노릇을 한 건 나거든요.”
하긴, 지난번에 본가에서 와인에 취해 에브린에게 하소연을 한답시고 전부 나불나불 불었다고 했었지. 파빌리엔은 그 유령에 대해서 아마 에쉬보다 잘 알고 있을지도 모른다. 지난번에 내게도 그런 말을 했었으니까.
[폐하는 그런 종류의 말장난이나 말대꾸를 달가워하진 않으십니다. 나야 재잘재잘 떠드는 당신이 그저 귀엽게 보이지만 폐하는 말보다는 칼이 먼저 나가는 분이시라.]
몇 번 유령의 성향을 겪고 나니 그때 당시 파빌리엔이 했던 말이 조금은 이해가 된다. 둘째 언니를 상대로 투정이나 부리던 그 행태가 아주 가관이었으니까.
[나를 황후로 삼을 생각을 할 만큼 내게 관심이 있다면서요? 그런데도 내게 칼을 겨눌까요?]
[제가 아는 황제 폐하라면 가능하다고 보는데. 그게 사랑이라기보다는 호기심에 가까운 편인지라. 아마 사랑이라는 감정 자체를 제대로 알지 못하는 것 같기도 하고.]
[……그런 분을 왜 섬기고 있나요? 약점이라도 잡힌 거예요?]
[기어오르지만 않으면 그만한 천국은 없거든요.]
내게 관심이 있던 것은 진짜 사랑이 아닌, 복수를 위한 인질로 삼기 위해서였을 뿐. 사사로운 자신의 일에만 관심이 있고 국정은 전혀 살피지 않았을 거라 추측해본다. 만약 에쉬가 아예 손 놓고 있었더라면 지금의 제국은 없었을 것은 자명한 일.
“그 유령, 지금 어디 있는지 알고 있나요?”
“글쎄요. 워낙 동에 번쩍, 서에 번쩍하시는 분이라서. 유령의 모습으로 활개를 치고 다니는 건 누구도 막을 수가 없으니 말입니다.”
유령이라면 마력 없이도 이리저리 다닐 수 있으니까. 지금 내 옆에 있을지도 모를 일. 괜히 한기가 밀려오는 것 같아 팔뚝에 소름이 오스스 돋아났다.
그러거나 말거나 파빌리엔이 내게 팔등을 내밀면서 어서 잡으라는 듯 재촉하였다.
“오늘의 또 다른 주인공이 더 늦으면 곤란합니다. 어서 가시지요, 미래의 황후 폐하.”
그가 내게서 완전히 마음을 접은 건가 싶어 한시름 놓았다. 미련조차 없다는 듯 눈길도 주지 않아서 어찌나 반가운지.
나는 다시 마음을 가다듬으며 파빌리엔의 에스코트를 받아 연회장으로 이어진 커다란 문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나중 일이야 그때 가서 생각하면 되는 거고. 당장 지금은 황제의 약혼녀이자 우리 비엔트 왕국을 대표하여 나를 선보이는 날인만큼 이것에 집중하자.
파빌리엔이 그 앞에 서자, 마치 우리가 오는 것을 알았다는 듯 안쪽에 있던 기사가 문을 열어주었다. 그리고 또 열 발자국 앞에 문이 있었고, 그 문을 열어주니 화려한 연회장이 모습을 드러냈다.
잔잔한 악기 소리, 코를 자극하는 달콤한 디저트와 와인 냄새. 그리고 연회장을 가득 채운 형형색색의 아름다운 의복들. 꽃과 나비가 한자리에 모인 것처럼 휘황찬란하여 눈이 부셨다.
왕국 무도회 때도 이 정도는 아니었던 것 같은데. 역시 제국 귀족들은 확실히 다른가 보다.
“제 6황자 전하와 비엔트 왕국의 마르엘 백작 영애, 곧 예비 황후가 되실 황제 폐하의 약혼녀께서 입장하십니다!”
약혼녀……. 정식으로 약혼을 치른 것도 아닌데 어쩜 이렇게 설레발들인지.
나와 파빌리엔의 등장을 알리는 기사의 외침에 웅성거리던 목소리가 한순간 고요해졌고 악기 연주도 멈추었다. 곧 그 자리에 있던 모든 이들의 시선이 내게 꽂혔고, 그 눈빛들이 너무도 따가워 속이 불편해진다.
이런 식으로 관심받는 걸 별로 좋아하지 않기도 하고. 묘하게 불편한 시선들이라 거부감이 든달지.
“제가 뭐 실수한 거라도 있나요?”
작은 목소리로 파빌리엔에게 묻자, 그가 코웃음을 치고는 어깨를 으쓱거리며 나를 데리고 여전히 커튼으로 가려져 있는 단상 쪽으로 향했다.
“고지식한 인간들이 모여서 작당하는 썩은 물에 타국의 사람이 달가울 리가 있겠습니까? 자국의 사람도 아닌 이를 황후로 맞이하겠다는데 좋아할 이유가 없지요.”
그런가. 하긴, 황태후도 제국의 귀족이었다고 했으니까. 고작 왕국의 백작 영애 따위에게 고개를 조아리는 건 더더욱 싫겠지. 우리 왕국에서나 영향력이 있는 가문이고 제국에서는 그저 작은 소국의 하찮은 영주일 뿐일 테니.
그것을 알기 때문에 일부러 더 허리를 곧게 펴고 턱을 치켜들며 당당하게 걸었다. 그래도 나의 첫째 언니가 왕비인데, 결코 나를 얕잡아볼 수는 없을 것이다.
단상 아래의 중앙에 다다라서 파빌리엔이 나를 정면으로 돌려세웠다. 그리고 주위에 있던 시종들에게 턱짓을 하자, 그들이 단상을 가리고 있는 붉은 커튼을 전부 걷어내었다.
동시에 파빌리엔이 목을 가다듬고는 연회장의 귀족들을 가볍게 눈으로 훑었다. 꽤 엄숙한 분위기인데도 동요하지 않는 것을 보아 이런 일이 꽤 비일비재했던 모양이다.
“오늘, 건국을 기념하는 자리에 참석하신 모든 귀빈들을 환영하는 바요. 제국이 평화로운 건 그대들이 각고의 노력을 쏟아부었기 때문이고, 그것을 치하하고자 이런 자리를 마련했으니 부디…….”
“황제 폐화께서 직접 치하해야 할 축사를, 왜 황자 전하께서 전하시는 건지 도통 모르겠습니다만.”
파빌리엔의 말을 자른 건 많은 귀족 중 가장 앞의 중앙에 서 있던 어느 노신사였다. 머리가 희끗희끗하고 얼굴에 주름이 가득 담긴 그는 아주 고압적인 분위기를 풍기는 언사가 참으로 잘 어울리는 이였다.
그 노신사가 파빌리엔을 똑바로 노려보더니 느릿하게 눈동자를 굴려 나와 시선을 맞추고는 가볍게 묵례를 건넸다.
“제국의 개국공신 가문인 가벨론 공작이 황제 폐하를 대신하여 영애의 제국 방문을 환영하는 바이옵니다. 황제 폐하께서 직접 고르신 약혼녀라지요?”
공작이었구나. 가벨론 공작이면 황태후가 태어나자란 가문이다. 제국 귀족들 중에서 가장 큰 권력을 휘두른다고 소문이 자자하긴 했는데, 저 태도를 보아하니 그 이유를 알겠다.
“환영해주어 감사하지만, 그것이 무슨 문제라도 되는지요?”
“지금까지 오십 회가 넘는 건국기념제를 봐오면서 이러한 축사는 난생처음입니다. 황제 폐하께서 저리 버젓이 계시는데, 어째서 지금까지도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계시는지 그 이유를 알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