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3화
황제의 대리인으로 세워둔 유령이 카시안과의 대결에서 밀려 도주한 이후, 밤새 카시안이 황궁을 지켜준 덕분에 그나마 편안하게 잠자리를 가질 수 있었다. 둘째 언니와 에브린도 알현장 쪽에서 솟아오른 불기둥에 대해서 궁금해했지만 나도 모르는 거라.
나는 내일 연회에서 아무 일도 없길 바라며 둘째 언니와 침대에 나란히 눕고 잠을 청하기 위해 눈을 감았다. 하지만 잠이 올 리가 없지.
정말 에쉬의 말대로 황태후의 존재조차 느낄 수가 없어서 기분이 묘했다. 암만 그래도 황실의 가장 웃어른인데. 그 누구도 황태후에게 문안 인사를 가보라고 등 떠미는 이도 없고.
아까 그 같은 상황이 벌어졌는데도 황태후는 물론이고 측근이 코빼기도 비추질 않았다. 사람을 보내 상황을 살펴보는 것 정도는 할 줄 알았는데.
“언니. 자?”
“아니.”
“……황태후 폐하 말이야. 그래도 내가 직접 찾아가서 뵈어야 하는 거 아닐까?”
“오라고 하지도 않았는데 멋대로 방문하는 것도 예법은 아니지. 친분이 있는 것도 아니고 혈육도 아닌데. 약혼식이라도 올렸다면 모를까.”
그건 또 그렇다. 분명 내가 황궁에 있음을 전해 들었을 텐데 오라 가라 말도 없고. 정말 정계에서 아예 손을 떼버린 건가.
“그럼 언니. 그…… 카시안 말이야. 에쉬의 호위 기사.”
“응. 왜?”
“마력은 고유의 향기가 있다며. 카시안에게서는 그런 게 느껴지지 않는 거야?”
아까 나를 별궁으로 데려다주느라 밖에서 초조하게 나를 기다리던 둘째 언니가 카시안을 잠깐 마주했었다. 해서 궁금하기도 하고 혹시나 싶어 물어봤으나, 잠시 생각하던 언니가 고개를 가로로 저었다.
“확실히는 모르지. 마력을 사용해야 아는 거라서. 마법사도 마찬가지야. 근처에서 운용하지 않으면 상대가 마법사인지 일반인인지 모르거든.”
그렇다는데 계속 물어보기도 애매하고. 카시안의 정체를 꼭 알아내야 하는 것도 아니고. 그게 중요한 건 아니니까.
“내일 건국기념 연회가 정오에 열린다고 했었나?”
“그래. 그러니까 어서 자. 오전부터 치장하고 준비하려면 꽤 바쁠 거야.”
싱긋 웃는 둘째 언니가 내 이불을 다시금 정리해 주며 이마를 가볍게 쓰다듬어주었다. 그건 예전에 어머니가 나를 재우던 때와 똑같은 느낌의 손길이었다. 언니도 어머니에게 받았던 것을 그대로 언니의 아들들에게 손수 해주겠지.
‘나도…… 에쉬와 결혼해서 언니처럼 행복해지고 싶은데.’
가깝게만 느껴졌던 그와의 결혼이 자꾸만 내 손을 벗어나 점차 멀어지는 것 같아서 심란해지는 건 어쩔 수 없다. 그저 단 하나, 평범한 사랑이 하고 싶었을 뿐인데.
“에쉬는, 자신의 자리를 찾아가도록 내가 먼저 등 떠밀어 주는 것이 맞겠지……?”
“……너는 어떻게 하고 싶은데?”
“나야…… 당연히 모른 척하고 본가에서 에쉬와 행복하게 살고 싶지. 하지만 그런다고 해서 언제까지 평화로울 수 있을까 싶네. 제국이 흔들리면 각국에서 패권으로 쥐기 위해 전쟁이 발발할 테고, 그럼 많은 이들이 또 그 아까운 목숨을 잃게 되겠지.”
아마 우리 왕국은 괴멸할 거라고, 전에 아버지께서 그리 말씀하시는 걸 들은 적이 있다. 그때는 에쉬의 정체에 대해서 몰랐던 터라 지금처럼 심각하게 고민하진 않았지만.
“확실히, 제국이 평화로워야 우리 왕국도 평화로워지고, 그렇게 되면 우리 가문도 지킬 수 있겠지. 그것 외에는 선택의 여지도 없을 것 같아.”
“슈아…….”
“언니는 그 유령을 다시 제대로 봉인만 해줘. 그럼 조금이나마 내가 마음 놓고 뜻대로 할 수 있을 것 같아.”
세상에서 가장 높은 위치에 있는 황태후 다음으로 권력을 가질 수 있는 황후의 자리. 그것을 탐낸 적 단 한 번도 없었지만 원래 인생이라는 건 마음먹은 대로 되지 않는 거라더라.
파빌리엔이 황좌에 욕심이 있었다면 더 좋았겠지만.
그렇게 마음의 결정을 내리고 나서야 조금이나마 잠을 청할 수 있었다. 다음날 해가 뜨는 것과 동시에 일어나 목욕을 하며 마사지를 비롯하여 아주 공들여서 단장을 하였다.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손톱과 발톱을 완벽하게 정리하고 귓속 청소까지 아주 말끔하게.
몇 시간을 투자해 완성된 내 모습을 보니 순간 픽 웃음이 나버렸다. 대체 누굴 위한 단장이란 말인가.
“드레스가 너무 과해. 나만 튀는 것 같다고.”
그 화려한 드레스의 치맛자락에 얼마나 많은 보석과 비즈를 달아놓았는지. 햇빛에 반사되는 빛에 눈이 멀어버릴 것만 같았다. 아무리 황제의 약혼녀가 연회에서 착의할 드레스라지만, 조금 더 고아하고 얌전하면서도 화려하게 만들 수는 없는 거냐고.
“왜? 나는 너무 마음에 드는데? 우리 슈아한테 딱 잘 어울려. 역시 왕궁 전속 디자이너는 다르네. 기품도 있으면서 고혹한 드레스야. 녹빛 드레스가 이렇게 아름다운 건 처음 봐.”
둘째 언니의 찬사가 왜 이렇게 민망한지 모르겠다. 사교계에 데뷔하기 전부터 왕국의 유행을 선도할 정도로 보는 눈이 까다로운 편인데, 이만큼 만족스러운 드레스를 보는 건 오랜만이라는 듯 아주 흐뭇해했다.
“그리고 명색이 황제의 약혼녀라는데. 이 정도는 되어야 우리 왕국을 절대 무시하진 못해. 아마 왕비 전하께서는 그것까지 계산해서 특별히 신경 쓰라 명하셨을 거야.”
“그런가……?”
그래도 영 거추장스러워서 이러다가 제대로 걸을 수나 있을까 싶어 이리저리 걷는 연습을 하는데, 둘째 언니가 나와 보폭을 맞춰 같이 걸어주었다. 건국기념 연회가 열릴 때까지는 시간이 좀 남아 있었고, 단장을 해 준 사용인들도 전부 물러가서 편안히 휴식을 취할 수 있었다.
안에 받쳐 입은 패티코트가 너무 크고 풍성해서 발아래를 가늠하기가 너무 어려웠다. 이만큼 넓은 치맛단을 입어본 적도 없다 보니.
“나는 평생 이런 드레스는 안 입을 줄 알았어.”
“별로 안 좋아했잖아, 너. 그리고 앞으로 주구장창 입어야 할지도 모를 텐데 그냥 순응해. 그게 마음 편하지.”
그 말에 어깨에 힘이 팍 들어가 버렸다. 그러자 작게 웃음을 터트리는 언니가 내 어깨를 톡톡 두드리며 짓궂게 웃는다.
“할머니가 딸만 셋 낳았다고 어머니를 그리 구박했었는데. 살아계셨다면 어떤 말을 했을지 궁금해지네. 첫째는 왕비요, 둘째는 후작 부인이고 셋째는 제국의 황후가 될지도 모르는 이 상황을 어떻게 받아들였을까?”
“……할머니가 그랬어?”
“몰랐구나? 네가 태어난 이후에 딸이라는 이야기를 전해드렸는데 결국 끝까지 너 보러 오지는 않으셨었지. 가문을 이어갈 아들이 필요했고 너 이후로는 아이가 생기지 않으니까 아버지께 다른 여자를 들이면 안 되겠냐고 하던걸?”
“두 번째 부인을 두라고 했단 말이야?”
할머니가 워낙 우리를 별로 달갑지 않게 여겼다는 건 알지만. 그래도 첫째 언니가 고분고분하게 말을 잘 듣는다는 이유만으로 첫째 언니만 예뻐했던 기억이 있다.
그래서 둘째 언니가 그렇게 할머니께 반항을 했었나 보다. 어린 나이에도 언니가 왜 저렇게 할머니를 미워하고 데면데면하게 구나 싶었는데.
“그런 이야기를 듣다 보면 뭔가 어른들의 세계에 한 발자국 더 다가간 느낌이야. 나도 곧, 원하지 않더라도 그 세계에 등 떠밀려 들어가게 되겠지……?”
“어렵게 생각할 것도 없어. 이런 사람도 있고 저런 사람도 있는 거지. 그냥 그런 거에 일일이 신경 쓰고 스트레스받지 마. 그래 봐야 너만 손해고 너만 아파.”
다정하게 웃어주는 언니가 두 손으로 내 손을 꼭 잡아주었다. 왠지 어머니의 모습과 또 겹쳐 보여서 심장이 시큰거린다.
“막상 어른이 되면 전에 느끼지 못한 일들을 겪게 되는 경우도 있지만, 항상 나쁜 일만 일어나는 건 아니니까 그렇게 심란해할 필요는 없어. 우리 슈아야 지금까지 스스로 잘해왔으니까 나는 별로 걱정 안 돼.”
그 따뜻한 한마디가 내게 얼마나 큰 힘이 되는지, 언니에게 알려주고 싶다. 감정을 보여줄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후작 부인, 아가씨. 시종장께서 찾아오셨습니다.”
방문 너머에서 들려오는 사용인의 목소리에 방금까지 잔잔하던 평온이 산산조각으로 깨어지는 느낌을 받았다. 드디어 올 것이 왔다 싶어서.
“들어오세요.”
언니 역시 부드럽게 풀어져있던 얼굴을 다시 서늘하게 굳히면서 내 손을 놓고 허리를 곧추세웠다. 해서 나도 언니를 따라 자세를 고쳐 잡았다.
곧 방문이 열리면서 시종장이 안으로 들어와 우리를 향해 정중히 묵례하였다.
“황제 폐하의 전언입니다. 마르엘 백작 영애께서는 따로 지시가 있을 때까지 잠시 기다리라 명하셨습니다. 그 외의 다른 손님들은 지금 연회장으로 모시라고 하십니다.”
“외부 손님들은 전부 참석하였나요?”
“몇 분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입궁하셨습니다.”
저게 에쉬의 명령인지 유령의 명령인지 모르겠다. 카시안이 유령을 감시한다고 하였는데 그 이후의 이야기는 듣지 못한 터라.
“알겠습니다. 금방 나가지요. 영애와 잠시 할 이야기가 있으니 밖에서 기다려주십시오.”
“예, 부인.”
시종장이 나가자마자 둘째 언니가 소리 없는 한숨을 내쉬며 조용히 입을 열었다.
“아직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모르겠구나. 아직은 마력의 기운이 느껴지진 않아도 몰래 들어와 있을 가능성도 배제하진 못하니.”
“다른 사람의 모습으로 변할 수도 있는 걸까?”
“실체화를 하는 것만으로도 꽤 많은 마력이 소모되니까 다른 이의 모습으로 변한다면 더 유지시간이 짧아지겠지. 아마 그 방법으로 나타나진 않을 거야. 유령의 모습이겠지.”
“유령일 때도 마력을 사용할 수 있어?”
“응. 그래서 실체화가 가능한 거야.”
암담하다. 그 유령의 생각을 전혀 모르겠어서.
“슈아. 일단 이거 받아.”
허공에 손을 가볍게 휘젓는 언니의 손바닥에 갑자기 붉은 루비로 만든 팔찌가 나타났다. 그리고 그 팔찌를 내 손목에 직접 채워주었다.
“드레스하고 어울리진 않아서 사소한 흠이긴 하지만, 이 보석 안에 내 마력이 담겨 있어. 만약 그 유령이 나타나 너를 해치려 한다면 적어도 보호는 해줄 거야. 마력에만 반응하도록 되어있으니까.”
“이런 걸 언제……?”
“제국으로 출발하기 전부터 준비해놨지. 혹시 모를 일에는 대비해야 하니까.”
나는 그 붉은 루비가 박혀있는 팔찌를 살짝 떨리는 눈으로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아마 이런 상황이 벌어지지 않기만을 진심으로 바라며 만들었겠지. 그 혹시 모를 일이 실제로 일어났으니 얼마나 참담했을는지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