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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만의 비밀스러운 꽃 (72)화 (73/113)

72화

제국에 당도하기 전, 에쉬가 말하기를 올해 건국기념제는 예정대로 치르지 못할 수도 있다고 했었다. 저것이 그 상황의 전조인 건가.

에쉬는 그저 그 아름답기만 한 불기둥을 물끄러미 쳐다보고만 있었다.

“가보지 않아도 되겠어요?”

“인외종족의 싸움에 하찮은 인간이 끼어들어봤자 위험해질 뿐입니다. 승부가 나 잠잠해질 때까지는 기다리는 것이 좋겠습니다.”

“……카시안도 인간이, 아닌 거예요?”

그가 대답 없이 나를 바라보고는 다시 고개를 들어 불기둥에 시선을 둔다.

지금까지 카시안을 봐오면서 느낀 건데, 그저 평범한 인간이라기엔 어폐가 있을 만큼 특이한 구석이 꽤 많았다. 지난번 나를 악몽에서 끌어내주던 그것도, 아주 예민한 청력과 상대의 기분을 오롯이 공유할 수 있는 것도.

그리고 마법사는 아니지만 유령을 볼 수 있다고도 했지. 지금 싸우고 있는 상대가 그 유령이고 마법사인데 마력도 없이 어떻게 상대할 수 있다는 건지도 모르겠다.

저러다가 위험해지면 어쩌려고…….

“카시안의 정체는 저도 잘 모릅니다. 그저 인간 행세를 하고 있어서 인간으로 여기는 것일 뿐, 처음 그놈을 만났을 때도 저건 사람의 눈빛이 아니라고 생각하긴 했었거든요.”

왜 대답을 바로 해 주지 않았나 했더니 에쉬도 정체를 몰랐던 거구나.

“출신도 불명확한 이가 어떻게 호위 기사가 된 거예요?”

“전에도 말했듯 아바마마께서 저를 지키기 위해 곁에 붙여둔 녀석이어서 어릴 때부터 쭉 함께 자랐습니다. 거의 형제처럼 지내다 보니 그저 있는 것이 당연하게 여겨졌던 터라 그놈의 정체에 대해서는 의심을 해 본 적이 없습니다.”

간혹 에쉬가 카시안을 상대할 때 파빌리엔을 대하던 그 모습이 나오곤 했었다. 정말 친한 사이 아니면 가족에게만 나오는 그런 친근함 말이다. 카시안이 자기는 사람 취급도 안 해준다고 투덜거렸지만 에쉬라면 정말 상종하기 싫은 상대는 투명인간 취급할 성격이므로 배부른 투정에 지나지 않았다.

“계약으로 이루어진 아주 진한 사이라고 했었지요?”

“……부정도 긍정도 하기 싫은 관계로군요. 나는 그저 아바마마의 뜻에 따라 황실 대대로 내려오는 보검을 물려받았을 뿐입니다. 그 보검에 카시안이 덤으로 얹어온 것일 뿐이고요.”

행여나 내가 또 두 사람을 엮을까 봐 걱정이라는 듯 아주 열정적으로 설명해 주었다. 그래서 나 역시 방긋 웃으며 고개를 끄덕거려주고는 다시 그 위험하고도 신비로운 불기둥으로 시선을 돌렸다.

“때가 되면 당신의 어린 시절을 아주 자세하게 들을 수 있을 테니까. 재촉하지 않아요. 지금은 그것보다 저 상황이 더 중요하다고 보거든요.”

내 말이 끝나기 무섭게 불기둥이 순식간에 사라지고 다시 고요해진다. 저 멀리에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바람을 타고 아주 옅게 들려왔다. 아마 황궁에 머물고 있는 모든 이들이 그 불기둥을 보았을 터. 대지를 울리는 굉음까지 들렸으니 모두의 이목이 집중되었을 것이다.

“에쉬. 가보지 않아도 되겠어요?”

“괜찮겠습니까?”

“내게 단도 하나만 챙길 수 있게 해주면 좀 덜 무서울 것 같기는 해요.”

농담으로 던진 말이었는데 에쉬는 정말 자신의 등에 숨겨둔 작은 단도를 꺼내서 내 손에 쥐어주었다. 설마 정말 단도를 줄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해서 얼떨떨했다. 황궁에서 무기는 황궁 기사들을 제외하고는 몸에 지닐 수 없기 때문이다.

“에쉬?”

“절대 나와 떨어지지 않겠다고 약속해요. 위협을 당한다 해도 꼭 내 옆에 있겠다고.”

어차피 유령을 볼 수 있는 건 에쉬 뿐이다. 그래서 당부하는 것일 터.

나는 그의 품에 뛰어들어 폭 안기면서 가슴팍에 뺨을 비볐다.

“물론이에요. 살아도 함께, 죽어도 함께. 그게 우리의 약속이었으니까요.”

그저 사랑만 하면 쉽게 이루어질 수 있을 줄 알았는데. 이렇게 서로 품에 안고 매일 함께 있는 일이 이만큼 어려울 거라고는 조금도 상상하지 못했다. 그래서 아주 조금 울적했으나 지금은 슬퍼할 때가 아니어서 다시 호흡을 고르며 그의 품에서 벗어났다.

“가요, 우리.”

“단도는 일단 숨기십시오. 행여 누군가 오인할 수도 있으니.”

아차 싶어서 드레스 허리를 조인 끈과 레이스 사이에 살짝 꽂아 넣었다. 손잡이 쪽이 살짝 보이기는 해도 팔로 잘 가리면 되겠지. 최대한 레이스를 끌어다가 가리면서 에쉬의 에스코트를 받아 방금 그 불기둥이 피어오르던 장소로 향했다.

그곳은 내가 황제의 대리인을 처음 만났던 알현장이 있는 커다란 궁이었다. 이미 그곳에는 많은 궁인이 몰려있었고, 다들 안으로 들어가지는 못하고 발만 동동 구르고 있었다.

“……어? 저분은……?”

그러다가 나와 에쉬를 본 궁인들이 어리둥절한 눈으로 우리를 바라보며 혼란스러워한다. 오늘 제국을 찾아온 손님은 우리뿐이어서 몇몇 시녀들은 내 얼굴을 아는 듯 보였다. 그러나 내 옆에 있는 에쉬는 심히 낯설어했다. 마치 처음 본다는 것처럼.

아무리 그래도 황자였는데 왜 모를까 싶다가도 전에 황제의 대리인이 검은 머리카락을 가진 궁인들 이외에는 전부 내보냈다고 했었다. 제국에서도 어두운색의 머리카락을 가진 이가 별로 없는 것 같았으니까 아마 대부분의 시종 시녀들이 바뀌었을 것이다.

충분히 모를 수도 있겠다고 생각되는 반면, 에쉬를 누구라 설명해야 될지 고민하는 사이. 우리를 발견한 시종장이 또 창백한 얼굴을 하고 황급히 다가왔다.

“폐하. 이제 오십니까?”

그들 중 유일하게 황제의 얼굴을 아는 시종장이 에쉬를 폐하라 지칭하자, 그 자리에 있던 모든 이들의 안색이 창백하게 변해버렸다. 워낙 베일에 싸인 황제이긴 했지만, 궁인들조차 황제의 얼굴을 모르나 싶어 조금 어처구니가 없었다.

황제의 초상화도 없는 건가? 에쉬와 그 유령이 지금까지 심혈을 기울여서 그 정체를 꼭꼭 숨겼다고 생각하니 대단하다는 생각도 들고.

에쉬는 고개를 조아리는 시종장을 그저 가만히 바라보고는 입꼬리를 파르르 떨었다.

“내가 황위에 즉위한 이후, 분명히 이 궁 근처에는 시종장 외에 누구라도 허락 없이 드나들지 말라 명하지 않았던가.”

에쉬의 감정이라고는 없어 보이는 싸늘한 어투는 언제 들어도 너무나 낯설었다. 그저 그 말 한마디에 저 많은 이들이 숨소리조차 내지 않은 채로 바짝 얼어붙는 것을 보면, 황제에 대한 소문이 거저 나온 건 아닌 것 같고.

시종장 역시 이마에 식은땀이 배어나올 정도로 잔뜩 긴장한 채 더욱더 고개를 조아렸다.

“그, 그렇지 않아도 해산하라는 명령을 내리려던 참이었습니다. 송구합니다, 폐하. 이, 이런 일은 처음 있다 보니…….”

“내 명이, 그리도 우스운가.”

그리고 나는 보았다. 손가락 끝이 얼어붙을 정도로 살벌한 에쉬의 말 한마디에 빛의 속도로 줄행랑을 치는 궁인들을. 곧 시종장을 제외한 그 어떤 인기척도 남아 있지 않았다.

그리고 에쉬는 아까보다 더 스산한 표정으로 시종장을 흘겨보았다.

“제법 유능한 줄 알고 그 자리에 앉혀두었더니. 제 동생과 똑같군. 형편없어.”

“시정하겠습니다, 폐하.”

“내 전언은 네 동생을 통해 들었을 테지. 그 하찮은 모가지가 날아가지 않으려면 눈치껏 움직이도록.”

“예. 명심하겠습니다.”

“그만 가봐.”

그 말을 기다렸다는 듯 시종장이 최대한의 예를 갖춰 인사를 하고는 빠른 걸음으로 그곳을 떠나갔다. 동생이라…….

“설마 저 시종장, 그때 그 검은 머리카락의 황궁 시녀와 혈육인 건가요?”

“어떻게 알았습니까?”

“느낌이 그랬어요. 닮진 않았지만 분위기가 그 여자랑 비슷한 것 같기도 했고요.”

과거 황태자가 가까이 두었다던 그 자작가의 영식. 에쉬에게 충성을 하는 이유는 그 목숨을 살려주었기 때문이겠지. 아니면 그 동생처럼 어떻게든 살아남기 위해 권력자에게 붙은 걸지도 모르겠지만.

“황궁은 정말…… 골치 아픈 일이 한두 가지가 아니네요. 사방에 적을 두고 서 있는 기분이라서 정말이지 편안하게 쉴 만한 곳이 없는 것 같아요. 당신의 고초를 조금이나마, 이해할 수 있을 것 같고요.”

“진정 죽음의 사신이 내 주위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다면 아무리 발버둥을 쳐도 살아남지 못했을 겁니다. 생과 사는 내 의지로 노력한다고 해서 만들어지지 않는 것이니.”

아직도 에쉬와 처음 만났던 그 날, 피로 얼룩진 그의 모습을 똑똑히 기억하고 있다. 거의 망자의 세계에 한 발 걸쳐두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위태로웠던 상태도.

그때 그의 눈동자에서 엿보았던 강한 삶의 의지. 그것이 내 마음을 크게 움직였더랬지. 역병에 의해 아무런 손도 쓰지 못한 채 죽음을 맞이해야 했던 어머니와 겹쳐 보여서 더 신경이 쓰였는데, 이런 관계로 진척될 줄은 정말 누구도 몰랐을 것이다.

“그럼 이제 우리의 운도 시험해 봐요. 과연 우리 주위에 죽음의 사신이 가까이 있는지, 없는지.”

지금껏 겪어보지 못한 생경한 사건들과 마주하는 것에 두려움이 없는 건 아니었지만, 에쉬와 함께라면 그 어떤 것도 이겨낼 의지가 생겼다. 그 앞이 낭떠러지만 아니라면 무슨 일이든 헤쳐나갈 수 있다고 생각하며 에쉬와 함께 그 궁 안으로 들어가려는데.

“주군. 그 녀석이 사라졌습니다.”

갑자기 위에서 뚝 떨어지는 커다랗고 검은 무언가에 순간 심장이 바닥으로 내쳐지는 줄 알았다. 동시에 그 검은 그림자에게서 카시안의 목소리가 들려와 조금 안도하긴 했지만.

하여간 왜 저렇게 갑자기 튀어나오는 걸 좋아하는 거냐고!

하지만 에쉬는 익숙한지 태연하게 미간을 좁히며 되물었다.

“사라졌다고?”

“황궁을 완전히 벗어났는지 주변에는 없는 것 같습니다. 찾아볼까요?”

그 녀석이라면 유령을 뜻하는 것일 터. 마법을 자유자재로 부리고 세상 무서울 것이 하나 없을 것 같던 그 유령이 카시안을 상대로 도망을 갔다니. 카시안이 대체 무슨 방법을 썼길래?

정말 물어보고 싶은 것이 잔뜩 있었으나 물어본다 하여 대답해 줄 것 같진 않아서 그냥 입을 다물었다. 에쉬도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 내버려 둬. 다시 돌아올 거다. 분명히. 목적을 가지고 있으니까.”

그의 연갈색 눈동자가 불씨를 담은 것처럼 기묘하게 일렁거렸다. 형제였으나 이제는 적이라는 듯, 하늘을 바라보는 에쉬의 표정은 냉담하기 이를 데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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