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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만의 비밀스러운 꽃 (71)화 (72/113)

71화

제국민을 사랑하나 결코 호락호락하지 않는 황제의 위엄. 이만큼 국민을 아끼는 황제가 과연 몇이나 될까?

“그렇군요. 참으로 현명하신 분이 황위에 오르셔서 다행이라 생각됩니다.”

“맞습니다. 비록 가까이에서 모시지는 못하나 참으로 넓은 아량을 가지신 폐하께 충성을 다할 것입니다.”

황제가 진짜 황제가 아닌 인형이라는 것을 알고 있는 시종장의 속내는 모르겠으나 적어도 저 말은 진심이었다. 그 결연한 눈빛은 진짜 황제에 대한 신뢰가 다분하였기 때문에.

“그보다 폐하의 전언을 알리러 찾아왔습니다.”

“……전언이요?”

“예. 마르엘 백작 영애께 전하라는 말씀이 있었습니다. 식사를 마치면 잠시 따로 뵙기를 청하였습니다. 안내는 제가 해드릴 예정입니다.”

이번엔 또 무슨 꿍꿍이일까? 에쉬가 언니와 절대 떨어지지 말라고 당부하였는데. 하지만 황제의 명을 거역할 수는 없었다. 자칫 불복 죄로 더한 해코지를 당할지도 모르고.

나는 떨리는 호흡을 고르면서 최대한 정중하게 의견을 피력하였다.

“식사를 늦게 시작한 만큼 지금은 늦은 시간입니다만. 아무리 약혼녀라 하나 정식으로 국혼을 치르기도 전인 지금, 조금 자중하고 싶습니다. 황궁만큼 소문이 빠르게 흐르는 곳도 없을 테니까요.”

“폐하의 명이십니다.”

시종장은 단번에 내 조심스러운 제안을 딱 잘라냈다. 나를 데려가지 않으면 시종장 역시 큰 화를 면하지 못한다는 듯 의연하게 대처하였다.

별수 없지. 설마 내 목숨을 위협하진 않을 것이다. 그저 둘째 언니에게 했던 것처럼 내 속을 박박 긁어놓을 심산일지도.

“알겠습니다. 따르지요. 안내해주십시오.”

“슈아…….”

가지 말라고, 가면 안 된다는 애절한 눈빛으로 나를 보는 둘째 언니를 안심시키기 위해 밝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

“대충 ‘그’가 어떠한 목적을 가지고 있는지 충분히 알았으니까 괜찮아요, 후작 부인. 아무리 잔혹한 폐하라는 소문이 있기는 해도 당장 저를 해칠만한 명분이 없어요.”

“…….”

“공식적으로 대면을 청하셨으니 이번엔 제 선에서 해결해보도록 하겠습니다.”

만약 내가 오랫동안 돌아오지 않는다면 둘째 언니가 나를 찾으러 올 것이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든든한 지원군이 있으니 조금이나마 안심이 되어 마음이 편안해졌다.

유령이 원하는 건 복수. 당장 내 목숨을 거두는 것보다 괴롭히는 것이 목적임을 안다. 그렇기 때문에 절대 지지 않을 강인한 정신력만 있으면 두려울 것도 없다. 호랑이 굴에 들어가도 정신만 차리면 산다고 했으니까.

해서 나는 둘째 언니에게 가볍게 묵례하고 여전히 창백하게 얼어붙은 에브린을 향해 미소를 보인 뒤에 시종장을 따라 밖으로 나갔다.

만찬이 제공된 곳은 처음 황제를 알현하던 그 궁과 가까운 곳에 위치해 있었다. 시종장의 안내에 따라 조경이 잘 꾸며진 돌길을 무거운 발걸음으로 걸었다.

차분한 표정을 유지하고는 있으나 머릿속은 이미 포화상태다. 둘째 언니를 조금이나마 안심시키려고 했던 말은 그저 나의 생각일 뿐. 최악의 경우 죽임을 당할 수도 있다는 생각이 지워지질 않았다.

만약 나를 죽이려 하면 어떻게 하지? 조건을 걸어서라도 유예를 해야 나중을 도모할 수 있지 않을까?

“혹시…… 폐하께서 다른 말은 없으셨나요?”

“그저 마르엘 백작 영애를 모셔오라는 명령만 받았을 뿐입니다.”

“……그렇군요.”

황제의 정체에 대해서 나 역시 알고 있음을 알면서도 표정 하나 변하지 않는 것을 보니 충성심이 아주 대단한 시종장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혹시 그 인형이 유령의 장난이라는 것을 아느냐고 묻고 싶었으나 꾹 참았다. 아무리 황제의 약혼녀라 해도 아직은 타국 사람이니 나를 경계하고 있을 것이다.

그렇게 몇 발자국 더 걷다가 시종장이 우뚝 멈춰서는 황급히 고개를 조아렸다.

“폐, 폐하? 어떻게 이곳까지…….”

해서 나 역시 그 자리에 서서 시선을 들었다. 동시에 온몸이 싸늘해지는 한기를 느껴버리고 말았다.

에쉬와 똑같은 얼굴의 그가 우리 앞에 나타나 길을 막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서늘하게 가라앉은 연갈색 눈동자가 당황해하는 시종장을 지나쳐 나와 눈이 딱 마주쳤다.

순간 나도 모르게 시선을 피하느라 고개를 슬쩍 돌렸다. 심장이 격렬하게 뛰어서 머리가 다 어질어질하다. 당연히 인형과 마주할 줄 알았는데, 설마 저렇게 실체화를 하여 나타날 거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해서.

“도저히 기다릴 수가 없어서 직접 나왔다. 영애는 내가 데려가도록 하지.”

그러더니 내 앞으로 성큼성큼 다가와서 나는 힉, 숨을 들이키며 뒤로 한발 물러났다. 대체 나를 어디로 데려가 무슨 짓을 하려는 거냐고 비명이라도 냅다 지르고 싶은 심정이었다. 아직 마음의 준비가 다 끝나지 않았건만!

그러나 그가 생각보다 더 빠르게 다가와서는 내 손을 덥석 잡았다.

‘……어?’

맞잡은 손이 따뜻하다. 그것은 익숙한 온기였다.

온기……?

혹 내 손이 너무도 차가워서 그렇게 느껴지는 걸까 싶어 고개를 들어 그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매끈하고 보드라운 뺨에 난, 목과 이어져 있는 자상의 흔적.

“에쉬?”

그는 별다른 말 없이 나를 데리고 얼어붙은 시종장을 뒤로한 채 그 자리를 빠르게 빠져나갔다. 정말 에쉬가 맞는 걸까? 유령이 에쉬의 상처까지 똑같이 만들어낸 걸지도 모르잖아?

하지만 체온까지 에쉬와 똑같다면…… 그렇다면 너무도 끔찍한데.

“놔요. 이거 놔요!”

유령 따위에게 농락당하는 건 죽기보다 싫었다. 더군다나 지금 나를 인적이 느껴지지 않는 으슥한 곳으로 끌고 가는 것 같아서 덜컥 겁이 났다. 유령이어도, 실체화를 오래 하지 못한다 해도 이렇게 닿는 것조차 불쾌하다.

해서 냅다 손을 뿌리쳤고, 그는 예상하지 못했다는 듯 내 손을 놓쳐버렸다. 그러나 조금도 동요하지 않고 걸음을 멈춘 뒤에 몸을 돌려 나와 똑바로 마주 보고 선다.

나는 그에게 잡힌 손을 반대편 손으로 감싸 잡고 뒤로 한 발 더 물러나 적정거리를 유지하였다. 그러자 그가 어깨를 축 늘어뜨리며 긴 호흡을 내쉬었다.

“접니다, 에쉬. 오해하지 마십시오.”

정말, 에쉬일까? 내가 마지막으로 보았던 에쉬는 우리 가문의 기사복을 입고 있었는데 지금은 그 유령처럼 간단한 의복을 착의한 채였다.

“증명해 봐요. 당신이 진짜 나의 에쉬임을.”

“증명이라면…… 흠, 지금 당장 키스를 하면 알아주겠으나 그랬다가는 나의 슈아에게 미움받을 것 같고. 무엇으로 증명을 해야 할지.”

혼자 흐뭇하게 웃으면서 진지하게 고민하는 그가 손가락으로 턱을 매만지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정원은 마르엘 영지에 있는 본가의 정원이고, 우리가 처음 진한 키스를 나눈 곳이 그 정원의 겨우살이 아래였었지요. 또한 내가 가장 사랑하는 이의 등허리 왼쪽에 두 개의 작은 점이 있는 건, 남자들 중에서 나만 알고 있는 것 아닙니까?”

그와 첫날밤을 보냈던 그날, 나도 모르는 내 몸의 점을 손가락으로 어루만지면서 귀엽다고 했던 기억이 다시금 떠올라 얼굴이 발갛게 달아올라 버렸다. 아무리 유령이어도 나와 에쉬가 첫 키스를 나누던 장소까진 알지 못할 것이다. 그건 둘만 아는 비밀이기도 했으니까.

“정말, 에쉬예요?”

“유령은 실체화를 해도 인간이 아니기 때문에 인간과 같은 체온을 유지할 수 없습니다. 실체화 자체가 그저 하나의 인형일 뿐이지요. 아무리 대단한 마력을 가졌다 해도 인간의 체온을 품는 것 자체가 불가능합니다.”

그가 내게 한 발자국 더 다가와서 꼭 쥔 내 손을 두 손으로 감싸 쥐었다. 그래, 아까 익숙하다 느꼈던 그 에쉬의 온기가 착각은 아니었다.

“에쉬……!”

그립던 그의 품에 와락 안기자 에쉬도 나를 두 팔로 꽉 끌어안아 주었다. 행여나 내가 진짜와 가짜를 구분하지도 못하고 의심해서 상처를 받지 않았나 싶어 미안한 마음도 있었고.

“어떻게 된 거예요? 내가 그쪽으로 가는 걸 어떻게 봤어요?”

“그 녀석을 주시하고 있었습니다. 카시안이 말하기를, 그 녀석이 당신이 있는 만찬실로 유령인 채 입실하였다 전해주었고요. 그쪽에서는 아무 일도 없었습니까?”

나는 에쉬에게 디저트를 음미하고 있을 때 갑자기 나타난 유령과 둘째 언니의 대화를 아주 자세하게 털어놓았다. 조용히 듣던 에쉬도 나와 같은 기분임을 표정으로 드러내며 씁쓸하다는 듯 입맛을 다셨다.

“정말 작정한 것 같군요. 그 녀석이 만찬실로 향하기 전에 잠깐 찾아가서 직접 대화를 나누어봤습니다.”

“뭐라고 해요?”

“조금도 물러서지 않겠다고 으름장을 놓더군요. 과거 황제의 대리인 제안을 받았던 것 역시 오늘을 위해서였다고 했습니다. 고양이에게 생선을 맡긴 격이 되어버렸더군요.”

에쉬도 속은 거였구나. 만약 유령이 내 어머니에게 봉인당한 이유를 미리 알았더라면 상황은 달라졌을까?

“하지만 그래 봐야 어차피 상대는 유령입니다. 걱정할 것 하나 없습니다, 슈아. 나 역시 그저 당하고만 있진 않을 생각이거든요.”

에쉬는 여전히 자신만만했다. 뛰어봐야 벼룩이라는 것처럼 하찮은 존재라 여기는 듯했다.

“어떻게 할 건데요?”

씩 웃는 에쉬는 대답 대신 내 뺨을 손으로 어루만지며 고개를 숙여와 입술을 겹쳐왔다. 이 상황에 갑자기 키스라니, 하다가도 얇은 피부 속을 파고들어 오는 아찔한 감각에 금세 취해버리고 말았다.

말캉한 혀가 스르르 열린 입술 사이를 비집고 들어와 격렬하게 나를 탐하였다. 낮은 숨결이 비강을 타고 스며들어와 나를 들뜨게 만든다. 불안하여 긴장만 맴돌던 전신이 질퍽한 키스에 잔뜩 풀어져 엉망이 되어 버린다.

키스만으로도 전해지는 쾌감의 열꽃이 아랫배를 자극하여 하체가 뜨겁게 끓어올랐다. 자연스럽게 그의 목을 끌어안고 매달리던 찰나, 그가 입술을 떼어내어 아쉬움이 물밀 듯 몰려든다.

“하여간 나의 슈아는 참으로 솔직하여 더욱더 사랑스럽습니다. 나도 당장 당신을 품고 싶으나, 저쪽 상황이 심상치 않은 것 같아 긴장을 늦출 수가 없군요.”

“……저쪽 상황이라니요?”

“카시안이 당신 대신 그 녀석을 상대하러 갔거든요.”

그 말이 끝나기 무섭게 쾅! 하는 폭발음이 들려와 고개를 돌려 그 방향을 쳐다보았다. 붉은 불꽃과 푸른 불꽃이 서로 얽혀들며 군청색의 하늘을 찌르듯 솟아올랐다. 그 불꽃이 너무도 아름다운 색이어서 장관이긴 한데, 황궁에 불이라니.

“저건……?”

“카시안과 그 녀석이 충돌한 모양입니다만. 조금, 곤란한 상황이 되어버린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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