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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만의 비밀스러운 꽃 (70)화 (71/113)

70화

황제의 대리인에 대한 정보가 유출되면 곤란하다. 아마 에쉬도 그것을 알기 때문에 믿고 부탁할 수 있는 이가 둘째 언니뿐이겠지. 카시안이 대단한 호위 실력을 갖추긴 했어도 마력을 가지고 있지는 않은 것 같았으니까.

둘째 언니의 성격상 이번 일에 우리가 연루되어 있지 않았다면 조금의 고민도 없이 거절했을 것이다. 언니에겐 지켜야 할 가족이 누구보다 소중하기 때문에.

“…….”

하지만 쉬이 결정할 수 없다는 듯 머뭇거렸다. 공적으로도 사적으로도 물러설 수 없는 상황임을 언니도 알고 있기 때문일 터.

결국 싫어도 해야 한다고 결심한 둘째 언니의 눈동자가 결연하게 빛났다.

“얼마나 도움이 될지 모르겠습니다만, 저 유령이 저렇게 활개를 치고 다니는 것만큼은 막아야겠습니다. 어머니만큼 대단한 마력은 아니어서 장담할 수는 없지만요.”

“힘을 보태주시는 것만으로도 그저 감사드립니다. 단지 혈육이라는 이유만으로 곁에 있는 것이 당연하다 여겼던 것부터 반성하겠습니다.”

“망자는 망자의 세계로 떠나야지요. 만약 그 유령이 계속 이 세계에 남겠다고 한다면 다시 봉인을 해두는 수밖에 없을 겁니다. 어머니께서 말씀하시길, 마력을 가진 유령이어서 퇴마가 불가능할지도 모른다고 하셨거든요.”

퇴마가 불가능하다니. 아무리 봉인이어도 봉인한 이가 사망하면 풀리기 때문에 영구적인 힘은 아니라고 했는데.

“가능한 방법은 없는 거야?”

“마력을 가진 퇴마사를 찾아야 할 거야. 쉽진 않겠지만.”

이 쌍둥이 유령이 그렇게 대단한 존재였음을 새삼 깨닫는 순간이었다. 에쉬도 꽤 심각하다는 듯 미간을 잔뜩 좁힌 채로 눈동자를 빠르게 굴렸다.

“말씀하신 퇴마사를 조용히 찾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오랜만에 파빌리엔을 이용할 때가 왔군요.”

“아, 파빌리엔은 어떻게 하고 들어온 거예요?”

“카시안에게 붙잡혀있을 겁니다. 어차피 파빌리엔은 저를 거역하지 못하니까 애초에 적이 될 수 없는 놈이고요.”

싱긋 웃는 에쉬가 다시 나를 똑바로 내려다보면서 내 뺨을 가볍게 어루만졌다. 아아, 그래. 내가 기억하는 이 따뜻한 온기. 굳은살이 박인 거친 손바닥의 느낌도 진짜다. 그 유령의 천년설만큼이나 차갑고 매끄럽던 그 손과는 확연하게 달랐다.

“오늘은 여정이 길었으니 일단 푹 쉬길 바랍니다. 후작 부인이 계시니 그 녀석이 이곳에 쉽게 발을 들이진 못하겠지요. 부인과 떨어지지 말고 꼭 함께 있어요.”

“그럴게요. 에쉬도 조심해요.”

당장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없다. 그저 닥치는 일을 그 자리에서 해결할 수 있을 만큼 긴장을 늦추지 않는 것만이 최선이겠지.

해서 나는 둘째 언니와 같은 방을 쓰기로 하여 짐을 옮기도록 지시하였다. 에브린은 자기만 쏙 빼놓고 자매끼리 좋은 시간 보낸다고 투덜거렸으나, 내게서 상황 설명을 듣고 나서는 배부른 투정이었음을 실토하며 인정했다.

“그런 줄도 모르고 혼자 실망할 뻔했네. 정말 이게 장난으로 웃어넘길 수 없는 일이긴 했구나.”

“이해해줘서 고마워, 브링. 내일모레까지만 잘 버텨보자.”

“나는 걱정 말고 너나 신경 써. 만약 네 말이 사실이라면 인형이 움직일 수는 없을 테니까 만찬에는 참석하지 않겠네. 그건 좀 다행인가?”

에브린의 말대로 그날 오후 일정으로 인해 만찬에는 방문하지 못하게 되어 미안하다는 황제의 전언을 받았다. 과연 오후 일정이라는 것이 정말 일 때문인지, 사적인 감정 때문인지. 실체화를 오래 하지 못하기도 하고 유령이니 식사 자체를 못할 테니까 의미 없다 여기는 걸지도 모르고.

침체된 분위기 속에서 셋만의 만찬을 진행하였다. 제국에서 가장 유명하다는 연어요리를 맛보았는데 에브린은 극찬을 아끼지 않을 만큼 너무 맛있다고 하지만 나는 무슨 맛인지도 모르겠고. 살면서 이렇게까지 맛을 느끼지 못할 정도로 다른 곳에 정신이 팔린 건 처음이라.

“…….”

마지막으로 나온 홍시 디저트를 맛보고 있었는데 갑자기 둘째 언니가 움찔거리며 눈동자를 파르르 떨었다. 시선을 들어 올려 나를 보는가 싶더니 내 옆의 허공을 빤히 쳐다보아서 순간 등줄기에 식은땀이 오스스 돋아나버린다.

내 옆에는 아무도 없는데. 인기척 하나 느껴지지 않는데. 설마 그 유령이라도 나타난 걸까?

그렇지 않아도 없던 입맛이 더 뚝 떨어졌다. 끔찍해. 존재조차 보이지 않는 유령이 내 주위를 맴돌고 있다 생각하니까 비명이라도 지르고 싶은 공포가 나를 집어삼켰다.

“비겁하게 숨지 말고 당당하면 제대로 나와서 이야기해. 그렇지 않아도 그쪽하고 할 말 많아.”

그때 둘째 언니가 디저트 스푼을 탁, 소리 나게 내려놓고는 허공을 집요하게 노려보며 경고를 날렸다. 그런 줄도 모르고 신나게 디저트를 즐기던 에브린이 스푼을 입에 문 채로 얼음이 되어 눈동자만 데굴데굴 굴렸다.

나 역시 조용히 스푼을 내려놓고 혹시 몰라 언니의 시선이 꽂힌 그곳을 시선만 돌려서 훑어보았다. 역시, 내 눈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그저 빈자리일 뿐.

심장이 벌렁벌렁, 폭죽이 터지듯 종작없이 날뛴다. 대범해지고 싶지만, 보이지 않는 적과 싸우는 건 아무리 마음을 굳게 먹는다 해도 내 쪽이 불리한 싸움이라서. 그저 가만히 유령의 행태를 둘째 언니의 반응을 통해서 짐작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래. 네 말대로 오랜만이긴 하지만, 우리가 그렇게 인사를 나눌 사이는 아니지 않던가? ……내가 너를 어떻게 잊겠어? 주제 파악도 하지 못하고 살아있는 인간에게 결혼하자 따라붙었는데. 그게 나를 죽여 영혼이라도 갈취하려던 목적이 아니면 뭔데?”

그 유령은 실체화를 하지 않으면 목소리도 들을 수 없는가 보다. 살면서 유령을 본 적이 없었던 건 역시 보이지도 들리지도 않았기 때문일지도. 한편으로는 다행이긴 한데, 지금 대체 언니에게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건지 아주 궁금해졌다.

대충 언니의 표정과 대답으로 짐작이 가능하긴 했지만.

“그딴 식으로 감성팔이 할 생각 하지 말고. 나는 그때와 생각이 같아. 인간은 인간 세계에, 망자는 지하 세계에.”

언니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서늘한 공기가 목덜미를 스치고 지나간다. 초가을의 기분 좋은 바람은 아니었다. 기분 나쁜 냉기를 머금고 있어서 오싹하고 뱃속이 쪼그라드는 그런 느낌의 불쾌감이 스멀스멀 스며든다.

동시에 언니의 미간이 확 좁아지면서 포악한 맹수처럼 돌변하였다.

“호박은 떡잎 날 때부터 좋아야 잘 자란다더니. 못된 버릇은 여전하구나. 어디서 배워먹었는지는 몰라도 그 마력 당장 거둬.”

이게 마력이었던가. 눈에 보이지 않는 힘이라서 더욱 정신이 혼미해졌다. 적어도 지난번 언니가 보여준 불의 활은 육안으로 확인이 가능하기라도 했는데.

하지만 경고에도 불구하고 목을 휘감는 서늘한 기운은 사라지지 않았다. 그 증거로 둘째 언니가 분노를 이기지 못하고 그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서는 당장 공격하려는 듯 손바닥에 불꽃을 만들어낸다.

“내 동생, 함부로 건들면 나도 내가 어떻게 나올지 몰라. 잘 생각해. 너는 나를 봉인할 수 없지만, 나는 너를 봉인할 수 있어. 아주 손쉽게. 내 몸에 들러붙은 벌레를 사뿐히 눌러 죽일 수 있을 만큼.”

저렇게까지 화내는 모습은 처음 보았다. 늘 온화하던 청록색의 눈동자가 손바닥에 생성된 불꽃만큼이나 뜨겁게 일렁거렸고, 당장이라도 물어뜯어 버릴 듯 맹수처럼 포악하게 일그러졌다.

곧 뱀처럼 내 목을 느릿하게 조여오던 그 냉기가 한순간에 사라졌다. 그러나 언니는 손에 든 불꽃을 꺼트리지 않았고, 그저 죽일 듯 허공만 노려보았다.

그 유령이 엄청 불쾌한 말을 지껄이는지 이를 부득부득 가는 둘째 언니의 노기가 정수리까지 치솟는 게 눈에 훤히 보였다. 그리고 어느 순간, 묘한 바람이 살랑 불어오면서 언니가 두 눈을 꾹 감고 깊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

아마 유령이 떠나갔나 보다. 해서 나 역시 안도의 숨을 뱉어내었다.

“언니……. 괜찮아?”

“아니. 안 괜찮아.”

“……미안해.”

왠지 사과가 절로 나온다. 저만큼 분노하게 만든 것이 전부 나 때문인 것 같아서. 에쉬와의 인연을 끊어낼 수 없다고 욕심을 부렸던 것이 이런 사달을 만들어낼 줄은 꿈에도 몰랐으니까.

그런 내 마음을 안다는 듯 둘째 언니가 다시 자리에 털썩 주저앉아 홍시 디저트를 크게 퍼서 한입에 욱여넣었다.

“자학하지 마. 네가 그분과의 인연이 없었다 해도 저 유령은 어떻게든 나를 포함해 우리 가족을 지금처럼 귀찮게 했을 거야. 어머니께서 봉인에 대한 후속조치를 해두지 않고 돌아가신 건 누구의 탓도 할 수 없는 거니까.”

“이해해주어 고마운데, 그것과 별개로 곤란하게 한 것 같아서 그래.”

“여기가 우리 왕국이 아닌 제국이어서 더 잘된 거야. 적어도 내 가족과 내 아이들을 안전하게 지킬 수 있고 내 숨겨둔 본모습을 드러내지 않아도 되니까.”

그러다가 옆에서 스푼을 입에 문 채로 그대로 얼음이 되어있는 에브린을 힐끔 보고는 삐뚜름하게 웃었다.

“브레이튼 영애의 입이 제법 무겁다는 건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으니까, 나를 실망시키지 않길 바라.”

“……여부가 있겠습니까. 입에 자물쇠 열 개라도 달아놓겠습니다.”

“좋아. 아주 바람직해.”

둘째 언니는 그저 방금 일을 해프닝으로 끝낼 생각인지 더는 그에 대해서 거론하지 않았다. 그래서 그 유령이 무슨 말을 했냐고 묻지도 못했다. 보아하니 묻는다고 답해줄 마음이 조금도 없어 보이기도 하고.

디저트를 마저 다 먹고 만찬을 끝내려 자리에서 일어나는데 노크 소리와 함께 시종장이 안으로 들어왔다.

“식사는 마음에 드셨는지요?”

“손님에 대한 예를 갖춘 것 같아 마음에 들었습니다. 한데 보통 건국기념제를 개최하면 삼 일 내내 연회를 치른다 들었는데, 이번에는 당일에만 행사와 연회를 치르는 이유가 따로 있는 겁니까?”

“지극히 높으신 황제 폐하께서는 건국의 영광을 모든 제국민에게 돌리시어, 귀족들을 위한 연회보다는 수도에서 진행되는 축제에 국고를 지원하시는 방향으로 결정하셨습니다.”

한 가지 확실한 건 알겠다. 그 유령과 인형은 말 그대로 그저 황제의 대역에 지나지 않음을. 저런 결정을 내릴 수 있는 건 에쉬밖에 없기 때문에.

덕분에 지난번 파빌리엔의 말이 더욱 가슴에 와닿았다. 에쉬가 고작 영지 하나를 이끌기에는 너무도 아까운 인재라던 그 말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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