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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만의 비밀스러운 꽃 (69)화 (70/113)

69화

“아, 폐하께서 제게 무엇을 좀 보여주신다고 하셨는데 그게 마력이었나 봅니다. 한데 아무리 후작 부인이라 해도 황궁을 이리 휘젓고 다니시면 곤란하지 않겠어요?”

시종장도 있고 해서 웃는 소리로 둘째 언니에게 존칭을 쓰며 눈치를 보았다. 그제야 언니도 아차 싶었는지 자세를 똑바로 하고 여유를 되찾았다.

“죄송합니다, 폐하. 제가 너무 예민했나 봅니다. 저의 하나뿐인 소중한 여동생이라 그만, 크나큰 우를 범하였습니다. 부디 넓으신 아량으로 저의 무지함을 용서해주십시오.”

등 뒤로 느껴지는 그 유령의 침묵에 오싹해진다. 둘째 언니 역시 황제의 대리인에게서 즉각적인 대답이 나오질 않아 눈동자를 바쁘게 굴리기만 했다.

설마 아직도 둘째 언니에게 미련이 남아있는 걸까? 솔직히 따지고 보면 복수를 해야 할 대상은 내가 아니라 봉인하게 만든 둘째 언니일 텐데. 그럼에도 굳이 내게 복수를 하고자 하는 이유가 있다면…… 그날 치기 어린 시절의 고백이 설마 진심이었던?

‘그건 그거대로 더 어처구니가 없는데.’

설마 저 인형을 놔두고 사라진 걸까 싶어 내 선에서 해결하려고 입을 여는 순간.

“내 선에서 용서해줄 범위를 넘어선 것 같다고 생각하지 않는가? 겨우 제국 산하 왕국의 후작 부인에 지나지 않는 이가 황궁을 멋대로 누비는 건 상당히 눈에 거슬려.”

확실히 저건 사적인 감정이 쌓인 투정에 가까웠다. 두 사람의 관계를 알고 있기 때문에 더 확실하게 느껴졌다. 또한 저 유령이 정말 배워먹지 못했다는 것도.

보통 이런 경우는 주의를 주고 넘어가는 것이 대부분인데. 황제의 그릇에 어울리지 않게 좁아터진 밴댕이 소갈머리 같은 저 마음 씀씀이가 조금 우습기도 하고.

둘째 언니도 아주 잠시 긴장하는 듯했으나 다시 여유로운 미소를 그리며 커튼 너머의 인형을 바라보았다.

“벌을 주신다면 달게 받겠습니다. 하지만 위대한 마젠티스 제국의 건국을 기념하는 이 뜻깊은 날을 축하하기 위하여 찾아온 소인이니, 작게나마 관용을 베푸시는 미덕을 보여주셨으면 합니다.”

“내가 왜 그래야 하지?”

“……아랫것의 실수를 한 번쯤은 덮어주는 것이 윗사람으로서의 도리가 아닐는지요.”

“하, 실수라…….”

언니도 저렇게 당당하게 나올 수 있는 이유가 가짜 황제라는 것을 알기 때문이겠지. 아마 속으로 나와 똑같은 생각을 하고 있을 것이다.

황제 대리인이라는 놈이 저렇게 형편없어서야. 에쉬의 사람 보는 눈이 그렇게 최악일 줄은 꿈에도 몰랐다.

“꼴도 보기 싫으니 썩 물러가라. 당장.”

유령의 호통에 둘째 언니의 눈빛이 서늘하게 가라앉는다. 해서 일단 이곳을 벗어나는 것이 먼저라고 여겨 내가 먼저 마무리를 지었다.

“분부대로 물러가겠습니다, 폐하.”

그리고 노기로 가득 찬 둘째 언니를 데리고 그 커다란 홀을 빠져나왔다. 아마 언니도 살면서 저런 말을 처음 들었을 테니 얼마나 충격을 받았을지 대충 짐작이 갔다.

나는 그저 말없이 시종장의 안내를 받아 우리가 머물 별궁으로 들어왔다. 배정받은 내 방에 언니를 끌고 들어가면서 시종장에게 감사 인사를 표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언니, 괜찮아?”

두 주먹을 불끈 쥐고 바르르 떠는 둘째 언니가 속에서 천불이 난다는 듯 거친 숨을 길게 고른다. 왠지 예전에 첫째 언니와 언성을 높이며 싸우던 그때 모습이 겹쳐 보여서 난감하기 이를 데가 없다.

어떡하지? 저 대리인의 정체에 대해서 말해주어야 할까?

“익숙한 마력이었어, 분명. 똑똑히 기억하고 있단 말이지.”

“……마력이 익숙해? 그걸 어떻게 알아?”

둘째 언니가 신경질적으로 머리를 쓸어 넘기고는 팔짱을 낀 채 입술을 잘근 씹었다. 덕분에 단정하게 정리한 머리카락이 헝클어졌지만 개의치 않아 했다.

“지금까지 살면서 마법사를 만난 적이 굉장히 드물어. 마법사마다 지닌 마력의 분위기? 향기? 뭐 그런 게 있어서 아는 마법사는 얼굴을 가려도 한 번에 알아볼 수 있거든. 그런데 지금 저 마력은 딱, 그놈이니까…….”

나와 똑같은 청록색 눈동자가 매섭게 빛난다. 그 시선이 내게로 꽂혀서 괜히 뜨끔했다.

“나는 이 마력이 누구의 것인지 잘 알아. 말해봐, 슈아. 황제의 대리인과 그 쌍둥이라던 유령이 무슨 관계가 있는지. 너는 알고 있지?”

숨긴다고 숨겨지는 것이 아님을 깨닫고 나 역시 기다란 한숨을 내쉬면서 손가락으로 미간을 살살 긁었다.

“나야말로 에쉬에게 묻고 싶은 게 많아. 하필 사람도 아닌 유령을 황제의 대리인 자리에 앉혀둘 생각을 하다니.”

“역시. 그놈이었어. 어쩐지, 느낌이 영 껄끄럽더라니. 말투도 그때처럼 재수 없고.”

“어, 언니……?”

진짜 화가 많이 났는지 언니 입에서 저런 험한 말이 나오는 건 정말 오랜만에 보는 것 같다. 행여 누가 듣기라도 할까 봐 나는 언니를 끌고 실내의 더 깊숙한 곳으로 자리를 옮겼다.

“듣자 하니 그 유령이 에쉬에게도 원한을 품은 것 같더라고. 에쉬가 자길 버렸대.”

“웃기는 소리 하네. 자기가 엄한 인간한테 들러붙어 봉인 당한 거지, 버리긴 누가 버렸다는 거야?”

“그거야 둘만 아는 이야기가 있겠지. 저번에 에쉬가 그랬어. 어렸을 때 거의 한 몸처럼 붙어 있었는데, 수업을 계속 방해해 크게 싸운 적이 있었고 언제부턴가 갑자기 나타나지 않았다고.”

아마 에쉬가 말했던 그 당시에 유령이 우리 왕국으로 넘어왔을 가능성이 크겠지. 수업을 방해했다고 하니까 에쉬의 입에서 좋은 말이 나왔을 리는 없겠고. 그래서 홧김에 누군가를 괴롭히려고 세상을 배회하다가 하필 둘째 언니를 건드렸던 걸지도.

한참을 아무런 말도 없이 울분을 삭이며 생각에 빠져있던 둘째 언니가 갑자기 나를 빤히 쳐다봐서 뱃속이 오싹해졌다. 마치 나를 꿰뚫어 보는 듯한 느낌이어서.

“설마 그놈이 네게 구혼서를 보내온 게, 우리 가문에 대한 복수를 위해서인 거 아니니?”

“……그런 것 같아.”

“하, 찌질한 새끼.”

내가 할 말을 대신 해주기는 하지만, 여기는 황궁인데 누가 들으면 어쩌려고 저렇게 솔직한지. 옛날부터 나와 관련된 일이라면 항상 예민하게 반응을 보이곤 했었지만, 이번에는 자기 때문에 이 지경이 되어 속상함을 더욱 내비치는 것 같았다.

“에쉬를 만나야겠는데. 에쉬와도 이야기를 좀 해봐야 할 것 같…….”

“그렇지 않아도 언제 나가도 되나 고민했습니다. 저를 찾아주니 참으로 기쁘군요.”

유령도 제 말 하면 온다더니. 갑자기 창문 커튼이 걷히면서 에쉬가 나타나 깜짝 놀랐다. 그 유령인가 싶어서 자세히 보니 뺨의 상처와 허리춤에 채워진 황금빛 검이 그가 에쉬임을 증명해주고 있었다.

“에쉬!”

그의 얼굴을 보니 왜 이렇게 안심이 되던지. 혼자 남아 불안해하던 전신의 신경이 순식간에 안정을 되찾으면서 가슴이 콩닥콩닥 뛰었다. 해서 둘째 언니와 함께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본능적으로 그를 향해 뛰어가 와락 껴안아 버렸다.

행여나 그가 위험에 빠지기라도 하면 어쩌나 걱정했던 마음이 컸기 때문에.

“어떻게 들어왔어요? 카시안은요? 파빌리엔이 그냥 보내주던가요?”

“황궁 지리는 누구보다 제일 잘 압니다. 아무도 모르는 쥐구멍이 상당히 많아서요. 카시안은 원래 황궁에서 남들 눈에 띄지 않게끔 교육을 받았기 때문에 어딘가 숨어있을 겁니다.”

“카시안은 원래 모습을 드러내면 안 되는 거였어요?”

“비밀호위랄까……. 일단 존재 자체가 비밀이기도 하고, 카시안을 본 이들 중에서 살아있는 자가 별로 없습니다. 마주치면 목숨을 내놓아야 하기 때문에 죽음의 사신이라고들 하지요.”

그건 또 그거대로 소름이 돋는다. 비밀리에 에쉬를 보호하고 에쉬에게 해를 끼칠만한 이가 나타나면 그 자리에서 목을 베는 것도 서슴지 않을 그 상황을 떠올리니 또 어깨가 바르르 떨리기도.

에쉬는 그런 나를 가볍게 안아주었다가 내 이마에 입술을 포개었다. 말랑한 감촉이 전해져와 흐뭇하다가도 아차 싶었다.

고개를 슬쩍 돌려보니 예상대로 둘째 언니가 경악스러운 얼굴로 우리를 바라보았고, 나는 또 민망함에 얼굴을 붉히며 뺨을 긁적거렸다. 아마도 하고 싶은 말은 많은데 에쉬 앞이라서 뭐라고 말도 못하겠다는 듯 한숨까지 내쉬길래 어깨가 더 쪼그라들고 말았지만.

“방금 두 분의 이야기를 듣자 하니 제 혈육인 그 녀석이 꽤 진심인 것 같더군요. 제게는 티를 내지 않아 몰랐는데, 저 역시 마음이 복잡합니다. 무례했다면 대신 사과하겠습니다.”

아마도 나와 언니의 대화를 처음부터 다 듣고 있었던 모양이다. 은근슬쩍 언니의 눈치를 보는 에쉬가 이어서 궁금했던 과거 이야기를 털어놓았다.

“슈아 당신의 말을 듣고 생각해봤는데, 그 녀석이 내게 버려졌다고 생각하는 사건을 자세하게 설명해드리겠습니다. 사건이라고 하기엔 거창하지만…….”

말하기도 민망하다는 듯 헛기침을 뱉어내는 에쉬가 뺨을 긁적거리며 눈동자를 데굴 굴렸다.

“그러니까, 아시다시피 황자들은 전부 황족으로서 기본적인 교육을 받습니다. 그러다가 아홉 살이 되던 때였나, 갑자기 수업량이 늘어 눈코 뜰 새 없이 바빠졌더랬지요.”

“……설마 그전에는 자주 같이 있어 주었는데, 그 이후에 함께 놀아주지 않아서 버려진 거라고 생각하는 걸까요?”

“아마 그런 게 아닐까 싶습니다만. 어떻게 알았습니까?”

“브링이 다른 영애들과 그런 사소한 이유로 다투는 것을 많이 봤었거든요.”

아홉 살이면 충분히 그럴 수도 있겠다고 생각된다. 더군다나 그때 이후로 계속 봉인되어 있었으니 정신적으로 성장하는 계기도 없었을 테고.

그러니 저렇게 애처럼 구는 것이겠지. 어느 정도 이해는 가지만, 그 위치가 황제의 대리인인데 사사로이 권력을 휘두르면 앞으로도 문제가 커질 것이다.

“그 유령이 제게 복수하겠다고 했어요. 나를 자신의 손바닥에 올려두고, 에쉬 당신에게서 빼앗아 서서히 말라 죽게 만들 심산인 것 같았어요.”

“예상은 하고 있었습니다. 내 잘못된 선택으로 인해 마르엘 백작가의 사람들을 곤란하게 만드는 것 같아 마음이 좋지 않군요.”

“당신 탓이 아니에요. 미래에 벌어질 일은 누구도 예상하지 못해요. 그 미래를 바꾸기 위해 노력하는 것만이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일이겠지요.”

항상 그래왔듯 과거는 바꿀 수 없고, 최선을 다해 현재를 살아가는 것이 우리 인간의 목표라고 하였다. 일단은 우리에게 칼을 갈고 있는 그 유령과의 꼬여버린 관계부터 청산해야 할 터.

에쉬도 무언가를 다짐한 듯 결연한 표정으로 둘째 언니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후작 부인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가능하시다면 저희를, 도와주시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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