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8화
나만 놀란 건 아니었다. 둘째 언니도 에브린도 갑자기 들려온 목소리가 에쉬와 똑같다는 것을 느꼈는지 둥그렇게 뜬 눈으로 주변을 살폈다.
그런데 아무도 없다. 우리와 시종장을 제외하고는 그 누구의 모습도 보이지 않았다.
‘설마, 그 유령?’
손바닥에 식은땀이 배어나기 시작했다. 지난번 그 유령도 에쉬와 똑같은 목소리를 가지고 있었으니까.
혹시 그 황제의 대리인이라는 게 그 유령은 아니겠지?
실체화를 할 수 있다고는 하지만 둘째 언니가 장담하기를 유령이 실체화를 하는 시간이 그리 길진 못할 거라고 했다. 그만큼 마력을 많이 잡아먹어서 최대한 유지해봐야 단 몇 분.
그런 불안정한 상태에서는 대리인으로서의 역할도 해내지 못할 것이 뻔해서. 에쉬가 그런 모험을 했을 리는 없을 테고.
분명 현 황제는 공개석상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숨긴 채로 대리인을 내세워 모든 국정을 독단으로 처리한다고 들었다. 하지만 이만큼 제국이 안정되었다면 이제는 황제의 존재에 대해서 궁금증을 불러일으킬 텐데. 언제까지 숨길 수 없는 것이 바로 황제의 자리.
방금 그 목소리는 누구이며, 어떤 방식으로 국정을 이끌고 있는 걸까?
“황제 폐하께서는 저쪽에 계십니다.”
시종장이 가리키는 곳은 검붉은 커튼이 벽면 전체를 가리고 있었다. 입구에서 정면이면 보통 계단으로 이루어진 단상이 있기 마련인데. 아마 저 커튼은 그곳을 가리기 위한 용도일 거라 생각된다.
그 의구심은 시종장이 직접 커튼을 중앙에서부터 양쪽으로 걷어내면서 조금은 해소되었다.
그 두꺼운 커튼 너머에는 세 개의 계단으로 이루어진 단상이 있었다. 그리고 그 세 번째 계단에 또 다른 얇은 상아색 커튼이 존재했다. 그 상아색 커튼 너머로 실루엣이 살짝이나마 보이고 있었다.
웅장함과 고아한 멋을 간직한 스테인드글라스의 빛이 새어 나오는 그 앞. 황제의 옥좌로 보이는 커다란 그곳에 누군가가 앉아 있는 형상이 어렴풋이 드러났다. 이상하게 소름끼치는 묘한 분위기를 가진 물체였다.
모습을 감추고 있다더니. 저런 식으로 귀족들과 대면하고 있었던 거였나.
“황제 폐하께 인사드립니다. 비엔트 왕국의 축하사절단을 통솔하는 로안트 후작 부인이며, 고귀하신 황제 폐하를 이리 뵙게 되어 광영이옵니다.”
우리 중 가장 먼저 침착함을 되찾은 둘째 언니 덕분에 나와 에브린도 재빨리 허리를 숙여 예를 취했다. 그러자 황제라는 이의 옅은 웃음소리가 번졌다. 묘하게 기분 나쁜 비웃음이다.
“제국까지 먼 길을 오느라 수고가 많았소. 여정이 길어 고단했을 테니 준비한 거처에서 잠시 휴식을 취하도록.”
“배려해주셔서 감사합니다, 폐하.”
“나의 피앙세는 잠시 남지. 나와 할 이야기가 있을 것 같은데.”
딱히 대면하고 싶지 않은 상대이긴 하나 저 정체가 궁금하긴 했다. 이대로 임시 거처로 갔다면 찝찝했을 테니까.
해서 둘째 언니와 에브린만 다시 허리를 깊게 숙여 인사한 뒤에 시종장과 함께 나가버렸다. 달칵, 문이 닫히는 소리와 함께 이 넓고 공허한 홀 안에 오로지 나와 저 남자만이 남았다.
“…….”
잠시 이어진 침묵을 깨트린 것은 여전히 음산한 분위기를 자아내는 낮은 웃음소리였다. 아주 즐겁다는 듯, 그야말로 폭군이 타인을 짓밟으며 흐뭇해하는 그런 느낌이어서 불쾌감이 스멀스멀 피어올랐다.
“파빌리엔은 그대가 오지 않을 거라고 호언장담을 하던데. 나는 그 어떠한 일이 있어도 그대가 온다는 쪽에 걸었지. 결국 내가 이겼군.”
아무리 들어도 에쉬의 목소리여서 혼란스럽다. 그 목소리를 가진 사람은 분명 그 유령이었기 때문에.
“당신…… 누구예요?”
“지난번과 똑같은 질문을 다시 듣게 되니 감회가 새로워. 와서 직접 확인해 보도록. 내가 누구인지.”
에쉬가 장난치는 건 분명히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 유령이 틀림없다. 하지만 저 옥좌에 앉아있는 이는 대체 누구란 말인가. 유령이 실체화를 하고 있는 걸까?
실체화엔 마력이 사용되고, 그 마력이 사용되는 것을 둘째 언니가 알아차리지 못했을 리가 없다. 그래서 더 궁금해졌다.
에쉬가 숨기고 있던 것. 저 커튼 너머의 진실이.
나는 벅찬 호흡을 고르며 떨리는 손으로 치맛자락을 움켜쥔 채로 다가가 단상 위로 조심조심 올랐다. 커튼 너머 옥좌에 앉아 있는 사람의 형체가 아까보다 조금 더 선명하게 보인다.
“그럼 잠시, 실례하겠습니다.”
조심스럽게 커튼의 갈라진 부분을 살짝 열고 그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정면을 바라보자마자 온몸의 피가 한순간 식어버리는 한기에 그대로 얼어버리고 말았다.
처음에는 에쉬인 줄 알았다. 에쉬와 너무도 똑같이 닮아 있어서. 하지만 에쉬의 뺨에 나 있는 상처 자국은 없었다.
‘유령이 실체화를 한 걸까?’
초점 없는 혼탁한 연갈색의 눈동자에 생기가 조금도 없었다. 정면을 바라보고 조금의 미동도 없이 가만히 앉아만 있는 그것은 마치 시체 같았다. 아니면 정교하게 만들어진 인형 같아 보이기도 하고.
아까부터 이상하다 싶을 정도로 소름이 일었던 건 역시 이유가 있었구나. 설마 이 인형이 말을 한 건 아니겠지? 그 유령이라기엔 지난번에 욕실에서 보았던 그 사실적인 느낌이 없어 혼란스럽던 찰나.
“어때, 마음에 드나?”
에쉬를 닮은 인형이 앉아 있는 옥좌 옆에 갑자기 나타난 또 다른 에쉬가 팔짱을 낀 채로 나와 시선을 맞추고는 흐뭇하게 웃는다. 인형처럼 뺨에 상처가 없는 것과 갑자기 실체화를 하여 나타난 것만으로도 그가 그 유령임을 짐작할 수 있었다.
“……무엇이 마음에 드냐는 겁니까?”
“네가 그토록 사랑해마지않는 이의 인형 말이다. 내가 아주 정성 들여 세공했지. 너의 새로운 부군이자 곧 네 것이 될 인형.”
역시 저건 만들어진 인형에 불과하다. 에쉬의 인형을 만들었다는 뜻일까? 대체 왜?
“황제의 대리인이라는 사람, 설마 당신인가요?”
“왜 설마라고 하는 거지? 내가 대리인이라는데 무슨 문제라도?”
설마 했던 일이 실제로 벌어질 줄이야. 그래서 인형을 내세워 남들 눈에는 드러내지 않고 황제 노릇을 할 수 있었던 걸까.
나는 떨리는 눈으로 인형을 다시 바라보았다. 정말 숨만 쉬지 않을 뿐이지, 꼭 최면에 걸린 에쉬 같아서 시선이 오래 머물러지지가 않는다. 기분 나빠. 거슬려.
“원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에쉬에게 제국에 발을 들이지 말라고 전하라 했던 이유도, 그저 그 자리가 탐이 나서입니까?”
“흐음, 글쎄?”
“……구혼서는 왜 보내신 겁니까? 에쉬를 다시 황궁으로 돌려보내라 종용하기 위함이었습니까? 그를 죽이려고?”
“나의 소중한 혈육을 내 손으로 죽일 수야 있나. 내가 어떻게 살린 나의 귀한 동생인데. 녀석을 죽이는 건 내가 아니어도…… 이 제국에 널리고 널렸지.”
에쉬와 똑같은 얼굴을 하고 내가 가장 싫어하는 태도를 보이는 저 유령이 너무 얄밉고 언짢다. 확실히 느낀 건데, 그는 절대 에쉬의 편이 아니다. 에쉬가 잘못 여겼던 거다. 에쉬가 믿었던 쌍둥이 형제는 결국 그를 배신한 것이나 마찬가지다.
나는 끓어오르는 분노를 애써 눌러 담으며 침착하게 읊조렸다.
“당신 뜻대로 되진 않을 거예요. 한번 죽음의 문턱에서 살아 돌아온 에쉬에게 두 번의 위기는 없을 테니까.”
그러나 별다른 표정 변화를 보이지 않는 그가 어깨를 으쓱거리며 나와 천천히 거리를 좁힌다. 지난번처럼 의미심장하게 웃으면서.
본능적으로 뒷걸음을 치려다가 뒤가 단상의 계단이었음을 뒤늦게 깨달았다. 하지만 이미 발이 허공에서 휘청거렸고, 심장이 바닥으로 곤두박질치면서 몸이 뒤로 기울어져 버렸다.
‘안 돼……!’
이대로 넘어지면 적어도 타박상을 입을 것이다. 최악의 경우 머리를 다칠 수도 있음을 예상하고 최대한 몸을 웅크리려는데, 어디선가 부드러운 바람이 내 등 뒤로 불어오면서 나를 일으키듯 앞으로 밀어냈다. 덕분에 넘어지진 않고 다시 똑바로 설 수 있었다.
‘방금, 뭐지?’
초자연적인 현상을 직접 피부로 느낀 이후라서 혼란이 더욱 가중되었다. 그래서 바로 나와 한 발자국 떨어진 곳까지 다가온 그 유령의 인기척을 너무 늦게 눈치챘다.
“조심성이 부족하군. 다치면 곤란해. 그럼 복수를 완성할 수 없으니까.”
“……복수?”
가늘게 뜬 눈꼬리가 둥글게 휘고 가지런한 치아가 드러나게 입꼬리를 끌어올리는 그가 손을 뻗어 내 뺨에 살짝 얹었다.
그건 살아있는 사람의 온기가 아니었다. 아니, 체온이라곤 조금도 없는 시체처럼 차갑기만 했다. 그가 실체화를 하더라도 완벽한 인간으로 변모할 수 있는 건 아님을 알았다.
“나를 버린 나의 쌍둥이 동생이 가장 괴로워지는 방법은 사랑하는 이의 부재겠지. 지금 그 녀석은 네게 푹 빠진 것 같으니까.”
에쉬가 버렸다고?
“그리고 또…….”
픽 웃으며 고개를 숙이는 그가 반대쪽 귓가에 나직이 속살거렸다.
“십수 년이 넘도록 나를 저 더러운 땅속에 봉인시켜둔 네 어미에 대한 복수를, 너를 통해 아주 천천히 갚아줄 생각이거든.”
에쉬의 생각은 틀렸다. 어머니의 무덤에 찾아왔다던 그 낯선 이가 바로 이 유령이었고, 더는 영혼조차 남지 않은 내 어머니에 대한 복수심을 품은 것이 분명했다. 그것을 아무 연관도 없는 내게, 단지 어머니의 딸이라는 이유로 나를 말려 죽일 심산인 것이다. 비열하게.
쾅!
“슈아!”
고요하던 연회장의 문이 크게 열리는 소리와 함께 둘째 언니의 외침이 울려 퍼졌다. 그리고 동시에 씩 웃고 있던 유령이 눈앞에서 갑자기 사라졌다.
분명 사라지기 직전, 생기 있게 반짝거리던 눈빛이 사뭇 가라앉았는데. 과거 그가 둘째 언니에게 결혼하자며 쫓아다녔다가 거절당했다고 했던가.
“슈아, 괜찮니? 분명 여기서 마력이 느껴졌는데.”
성큼성큼 내 쪽으로 다가오는 둘째 언니가 주변을 경계하며 내게 묻는다. 열린 문 근처에서 창백한 안색으로 어쩔 줄을 몰라 하는 시종장이 재빨리 문을 닫았다. 아마 시종장은 황제가 고작 인형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것 같았다.
해서 나는 살짝 열려있는 얇은 커튼을 다시 치고는 굳은 입꼬리를 최대한 끌어올리려 노력했다. 기밀인 만큼 아직은 이 모든 사실이 알려지면 안 된다고 생각되었기 때문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