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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만의 비밀스러운 꽃 (67)화 (68/113)

67화

우리 비엔트 왕국의 성만큼 화려한 별장에서 불편한 마음을 안고 새 아침을 맞았다. 머릿속이 너무 복잡하여 잠을 푹 자지 못했다. 어제 전신마사지에 목욕까지 했는데도 말이다.

“뭐야, 슈아. 너 왜 이렇게 피곤해 해? 밤새 무슨 짓을 한 거야?!”

제일 먼저 식당에 도착해 있던 에브린이 퀭한 나의 얼굴을 보자마자 너스레를 떨어댔다. 무언가 큰 오해를 하고 있는 그런 느낌이라 새침하게 반박해주었다.

“내 인생에서 처음으로 맞이하는 고비를 목전에 두고 잠이 오겠어? 생각해보니까 다른 황족과의 만남에 대한 대비를 전혀 하지 않았더라고. 아직 황궁에 남아있는 황녀 전하라던가, 황태후 폐하도 계시고.”

“웬일이야? 우리 슈아가 그런 고민을 다 하고? 너, 국왕 전하를 뵈어도 마음의 준비 같은 거 조금도 안 하잖아?”

“흠흠, 그러게. 이번에는 좀 신경이 쓰이네.”

에쉬와 가까운 사람들을 만나는 건 항상 긴장이 되곤 하였다. 카시안도 처음에는 믿어도 되는 사람인지 모르겠어서 경계했었고.

그의 주변에는 위험하다고 판단되는 이들이 너무 많기 때문이었다.

“좋은 아침이야.”

환하게 웃으며 마지막으로 식당에 들어온 둘째 언니도 내 얼굴을 빤히 바라보고는 알만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거리고 자리에 앉았다.

“우리 막내가 긴장을 다하네? 마차에서 눈 좀 붙여야겠다, 너. 굉장히 피곤해 보여.”

“괜찮아, 언니.”

“보는 우리가 안 괜찮아. 온 제국민이 네 표정 하나하나 집요하게 살필 텐데. 미래의 황후가 될지도 모를 귀족 영애가 꼭 도살장에 끌려온 소처럼 다 죽어가는 얼굴이더라, 하는 소문이 나면 너도 곤란해지지 않겠어?”

그 정도로 낯빛이 좋지 않은 건가 싶어 의기소침해졌다. 그러자 둘째 언니가 냅킨을 펼쳐 무릎에 얹으면서 흐뭇하게 웃었다.

“이 시대 최고의 고귀함을 담아 조금 더 당당해져 봐. 평소의 너처럼.”

“……평소의 내가 어떤데?”

“강철심장이라고 유명한 그 아버지에 그 딸이라잖니? 절대 틈을 내보이지 않으려고 짓는 무표정이 제법 귀엽지. 선한 눈매와 조금 어울리지 않는 당돌함도 네 커다란 매력이고.”

아버지에 대해 그런 소문이 있었나. 강철 심장이라니. 괜히 웃음이 픽 나와 버렸다. 귀찮은 일에 휘말리기 싫어서 최대한 눈에 띄지 않으려고 노력했던 것뿐인데.

“알았어. 가면서 조금 쉴게. 표정도 재정비하고.”

“좋은 생각이야.”

굳은 결의를 마치고 아침 식사를 한 뒤, 이제 정말 얼마 남지 않은 결전의 장소로 출발하기 위해 마차에 올랐다. 그렇게 몇 시간을 달려 드디어 제국에 입성하게 되었다.

“제국에 방문하신 것을 환영합니다. 바로 황궁으로 안내해드리겠습니다. 이쪽으로 따라오십시오.”

수도 입구를 지키는 기사들이 우리를 반겨주었고, 방문자의 인적사항과 인원을 꼼꼼히 파악한 뒤에야 안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그 중 꽤 계급이 높아 보이는 기사가 직접 안내해주어 저 멀리 장난감처럼 작게 보이는 높은 황성으로 향했다.

‘드디어 왔구나. 절대 올 일이 없을 거라 여겼던 그곳에.’

일단 가장 먼저 수도의 분위기를 살펴보았다. 대로를 따라 느리게 굴러가는 마차 덕분에 충분히 살펴볼 여유가 있었다.

내일이 건국기념제 당일이라는 것을 증명하듯 수도는 아주 활기찼다. 그야말로 축제라는 듯 길거리 상점들이 줄줄이 늘어져 있었고 인파도 제법 대단했다. 축제를 즐기는 이들의 표정도 생각보다 아주 밝았다.

보통 겉으로 드러나는 것보다 숨겨진 사실이 더 큰 법. 빈부격차는 햇빛과 그늘로 나뉜다고 했으니까.

해서 일부러 후미진 골목 쪽을 더 주시해보았다. 수차례 황위의 주인이 바뀌었고, 선황 이후의 황자들이 즉위하였을 때부터 흥청망청 국고를 낭비하며 실정이 엉망이라 원성이 자자했다고 들었기 때문이다.

“제법 평화로운 것 같구나. 그늘진 얼굴들이 없어. 그래도 그 황제의 대리인이 제법 능력은 있는 모양이야.”

둘째 언니의 말대로 생각보다 골목도 깨끗하고 굶주린 이들이 보이질 않았다. 마음껏 뛰노는 아이들의 표정도 해맑았고 멀리서 들려오는 악기 연주 소리도 제법 흥겨웠다.

“소문과는 너무 달라서 더 이질적이게 느껴지는 건, 내 기분 탓일까? 언니도 황제에 대한 소문을 들었지?”

“제국민에게 해코지를 하지 않고 잘 베풀었나 봐. 그러니까 이만큼 빠르게 안정을 되찾은 걸지도 모르잖니?”

“그런가 보네. 내가 너무 부정적으로만 생각했었나 봐.”

그 황제의 대리인이 에쉬에게 한 나쁜 짓들만 뇌리에 깊숙이 박혀있다 보니. 믿을만한 사람이어서 앉혀놓았는데 배신이나 하는 그 낯짝이 참으로 궁금했다. 권력을 탐내는 건 에쉬의 형제들도 마찬가지였으니까.

축제가 한창인 대로를 벗어나 황궁으로 향하는 길목은 지대가 조금씩 높아지는 얕은 언덕이자 듬성듬성 커다란 나무들이 세워진 숲이었다. 적군이 침공해도 성벽에서 그들의 움직임을 육안으로 확인이 가능해서 지리적으로도 꽤 완벽한 방공 지역이었다.

‘하지만 내부의 적을 막을 수는 없었지.’

이처럼 완벽한 요새를 자랑하는 황궁이라 해도 안전한 공간은 아님을 또 한 번 뼈저리게 느낀다. 그 위험천만한 곳에 발을 들이게 된 지금, 그 어느 때보다도 심히 긴장되었다.

높은 성벽의 굳게 닫힌 커다란 아치형 문 앞에서 마차는 멈췄다. 곧 묵직한 소리를 내며 문이 안쪽으로 열렸고, 그 안에서 오랜만에 보는 파빌리엔이 황실 기사들을 대동하여 모습을 드러내었다.

기사들을 뒤로하고 홀로 말에 탄 채로 마차에 가까이 온 파빌리엔이 마차 창문 안의 나를 바라보며 씩 웃었다.

“초대에 응하여 이리 참석해주시니 영광입니다, 미래의 황후 폐하. 앞으로 볼 일이 없을 거라고 장담하셨으나 어떻게든 또 만나게 되는군요. 사실, 방문하지 않을 가능성이 크다고 여겼는데 말입니다.”

하여간 저 빈정거림도 여전하고. 사람이 변하면 죽을 때가 가까워진다던데 그럼 아직 살만한가 보다.

나는 최대한 여유로운 미소를 그리며 정중하게 화답해주었다.

“제가 세상에서 가장 상종하기 싫은 부류가 박쥐 같은 교활한 사람이거든요. 특히나 생사가 갈린 상황에서 자기만 살겠다고 혈육을 내팽개치고 도망간 짐승만도 못한 이를 마주하는 건 꽤 고단한 일이라서.”

해사한 파빌리엔의 웃는 얼굴이 그대로 가면처럼 굳어졌다. 아마 내 말의 의미를 단번에 알아들었나 보다. 조금 분한지 아주 잠깐, 애써 웃음을 참고 있는 에쉬를 찌릿 노려보다가 아닌 척 헛기침을 뱉어내며 눈웃음을 살살 지어 보였다.

“황제 폐하께서 당신이 입성하였음을 듣고 굉장히 기쁜 마음으로 목이 빠져라 기다리고 계십니다. 단, 저 두 사람은 황궁에 출입을 엄히 금하라는 명령이 있는지라 여기서 기다려주셔야겠습니다.”

파빌리엔이 말하는 두 사람이란 에쉬와 카시안이었다. 지난번에도 그 대리인의 편에 서서 본인의 안전만을 꽤하더니. 에쉬를 도와주려는 건지 해치려고 마음먹은 건지 도무지 모르겠다. 카시안이 있으니까 에쉬가 위험해지진 않겠다 싶어 그냥 입을 다물고 가만히 있었다.

파빌리엔이 우리를 안내하던 기사에게 눈짓을 보냈고, 마차는 다시 움직여 성문 안으로 진입하였다. 에쉬와 카시안을 뒤로하고 말이다.

“괜찮겠지, 언니……?”

“뛰어난 검술 실력을 자랑하는 두 사람이라며. 일단 너부터 걱정해. 황궁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는 사람들일 테니, 무슨 일이 생기면 알아서 도망가겠지.”

하긴, 지난번에도 황제의 궁을 짧은 시간에 조용히 침입할 정도라고 했으니 목숨만 유지하면 어떻게든 안전한 곳으로 몸을 피할 수 있을 것이다.

곧 마차가 멈추고, 나는 호흡을 고르며 불안한 마음을 애써 다스렸다. 그리고 최대한 기품을 유지하려고 노력하며 에스코트를 받아 마차에서 내렸다.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로안트 후작 부인. 마르엘 백작 영애. 브레이튼 백작 영애.”

우리를 맞이한 이는 황궁의 시종장으로 보이는 이였고, 그 시종장의 뒤에도 스무 명이 넘는 시종과 시녀들이 서 있었다. 나는 그들을 한번 슥 훑어보았다. 정말 소문대로 시녀들의 머리카락 색이 전부 무채색이었다.

검은색을 비롯한 고동색이나 짙은 갈색 같은.

‘황제의 대리인이 검은 머리카락 성애자라더니 진짜였나 보네.’

어쩐지 조금 불쾌해졌으나 애써 감정을 다스리면서 시종장을 향해 부드럽게 웃어 보였다.

“환영해주어 감사합니다. 이처럼 아름다운 곳은 처음 보네요.”

“황제 폐하께 바로 안내해드리겠습니다. 본궁으로 가시면 됩니다.”

내 말은 뚝 자르는 시종장이 정면에 보이는 커다란 궁을 가리키며 길을 비켜섰다. 제국에서도 내 소문이 그렇게 좋은 편은 아닌가 보다. 고작 시종장에게 무시를 당할 줄이야.

둘째 언니도 불쾌하다는 듯 시종장을 일별하고 본궁 안으로 들어갔다. 놀랍게도 본궁은 그냥 궁이 아니었다. 하나의 거대한 연회장이라고 해도 무방할 그 본궁을 지나치자 다시 실외가 나타났고, 또 다른 궁과 지붕이 있는 복도로 이어졌다.

둘째 언니도 고개를 갸웃거리며 시종장에게 물었다.

“방금 지나왔던 건 무슨 용도의 궁인가요?”

“외부인의 출입을 관리하는 곳입니다. 마력으로 운용되어 혹시 모를 침입자를 걸러내는 역할을 합니다.”

“마법으로 외모를 바꾸는 이들을 걸러낸다는 뜻이군요.”

“그렇습니다.”

새삼 왕국과는 너무도 다른 규모에 그저 대단하다는 말밖에 나오지 않는다. 내부에서는 위험할지 몰라도 외부에서 침입해오는 이들을 걸러내는 것만큼은 최상위일 듯.

지붕이 있는 복도를 지나 다른 궁으로 건너왔고, 정면으로 보이는 화려하고 커다란 문을 활짝 열자 광활한 크기의 연회장이 모습을 드러낸다. 위압적으로 느껴질 만큼 너무 커서 짓눌리는 느낌이었다.

“폐하께서는 이미 안에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일단 세 분만 모시겠습니다.”

우리를 따라온 사용인들을 뒤로하고 우리 세 사람은 시종장의 뒤를 따라 황제의 대리인이 있다던 그 연회장 안으로 결연하게 걸어 들어갔다. 거의 건물 3층 높이의 천장에 매달린 커다란 샹들리에를 훑어보고 있었는데.

“드디어 왔군. 나의 귀여운 피앙세.”

순간 에쉬의 목소리가 들려와서 흠칫 놀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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