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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만의 비밀스러운 꽃 (66)화 (67/113)

66화

로안트 후작 영지의 별장에서 하루 묵고 다음 날, 아침부터 일찍 출발 준비를 서둘러 떠났다. 내가 타고 왔던 우리 가문의 마차는 별장에 둔 채로 나는 에브린과 함께 후작가의 마차에 몸을 실었다.

“이렇게 셋이 가니까 정말 여행가는 기분이네. 간만에 육아에서도 좀 벗어나서 좀 홀가분하기도 하고?”

“언니 많이 힘들었어? 유모도 안 들였다며.”

“내 아이는 내 손으로 키우고 싶어서. 어머니도 그랬어. 너한테만 유모를 붙인 이유가 나하고 첫째 언니가 틈만 나면 다투어서였으니까.”

“맞아. 그랬다고 했지. 그래서 어머니가 항상 내게 사랑을 온전히 주지 못한 것 같아서 마음이 쓰이셨나 봐.”

“부모의 마음이란 게 다 그렇지. 너도 네 아이를 낳아 기르다 보면 더 뼈저리게 이해할 수 있을 거야.”

그렇게 셋이서 소소한 대화를 도란도란 나누며 불어오는 초가을의 시원한 바람에 섞인 풀 내음을 반갑게 들이마셨다. 그러다가도 얼핏 창문 너머로 스치듯 보이는 에쉬를 지켜보는 즐거움도 꽤 쏠쏠했다.

내 시선을 눈치챈 듯 슬쩍 나와 눈을 마주치고도 아닌 척 다시 정면을 응시하는 천연덕스러운 행동도.

“그렇게 좋으니, 슈아?”

멍하니 그의 조각같은 옆모습을 훔쳐보고 있다가 둘째 언니한테 딱 걸려서 민망하게 뺨을 긁적거렸다.

“아니 뭐……. 흠흠.”

“후작 부인께서도 놀랐죠? 저 진짜 슈아가 저렇게 사랑에 빠지는 거 처음 봐서 아직도 적응이 안 되는 거 있죠?”

옆에서 에브린이 더 호들갑을 떨어서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 에브린에게는 정말 못 보일 꼴을 너무 많이 보여준 것 같아서 더 초조해졌다.

설마 둘째 언니 앞에서 말실수를 하진 않겠지?

“아, 맞다! 슈아! 지난번에 내가 준 선물은 잘 쓰고 있어?”

“……선물?”

“그 왜, 본가에서 내가 써보고 후기 들려달라고 했던 그 선물 말이야.”

……미치고 팔짝 뛴다는 게 이런 상황이겠지.

에브린이 말하는 선물은 ‘우리 모두 사랑스러운 변태로 거듭나 보아요’라고 쓰여 있던 야한 초급용 기구를 뜻했다. 에쉬에게 들키고 나서 그가 가져가 다시는 볼 수 없던 선물이긴 하다만.

쟤는 지금 여기가 어디라고 저런 질문을 던지는 거람?!

“선물이라니? 뭔데?”

우리의 대화를 들은 둘째 언니도 궁금하다는 듯 물어봐서 심장이 벌렁거렸다. 내게는 어머니와도 같은 언니에게 에쉬와의 그렇고 그런 관계가 발각되면 그만큼 더 부끄러운 일이 어디 있단 말인가. 당장 마차 문을 열고 뛰어내릴 정도로 민망한 상황이었다.

“아, 아무것도 아니야. 그보다 언니가 제국으로 나와 함께 다녀온다고 한 거, 왕비 전하께서 따로 한 이야기는 없어?”

당장 생각나는 질문을 아무거나 던지면서 다른 쪽으로 대화를 유도하였다. 다행히 언니는 아무 의심 없이 내 뜻에 따라주었다.

에브린만은 옆에서 음흉하게 웃으며 내 반응을 즐기고 있었지만.

“뭐, 왕비 전하께서야 네 생각을 여전히 모르겠다고 하시지. 언제는 알려고 한 적이 있었냐고 반문했더니 나더러 대든다더라.”

“그건 예전부터 그랬으니까. 자신의 뜻과 다르면 배신자라고, 자기가 무조건 옳다고 주장하곤 했잖아. 어떻게 보면 참 강단 있고 좋은데, 잘못된 것을 맹신하면 어떤 결과를 초래하는지 보여주고 있어서 장단점이 있는 것 같아.”

“제국의 황제 폐하께서 워낙 베일에 감싸인 분인지라. 인장만 대충 찍어서 보내면 죄다 황제 폐하의 교지로 꾸며낼 수 있겠더라. 그 인장도 3년 전부터 색이 바뀌었다며?”

진짜 황제의 인장을 가지고 있는 건 에쉬다. 아버지께서는 그 이야기까지 말해주진 않았나 보다.

“황자의 난으로 황위에 올랐던 2황자가 황제의 인장을 찾지 못했기 때문이랬어.”

“죄에 대한 벌인가……. 아무튼 건국기념제인데, 이제 슬슬 진짜 황제 폐하께서 모든 제국민들에게 모습을 드러낼 때가 도래한 거지. 아마 그 대리인도 이번 일을 쉽게 넘길 수는 없을 거야.”

“그런데 왜 에쉬를 제국에 발도 딛지 못하게 했을까? 사실 자신이 황제였다, 거짓으로 선동하려고?”

“그럴 수도 있겠지. 과거에도 그 3황자는 공식적인 자리에 잘 모습을 드러내지 않아서 얼굴을 아는 이가 몇 없다고 하더라.”

둘째 언니의 시선이 마차와 걸음을 맞춰 말을 모는 에쉬에게 향한다. 공식적인 자리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기 때문에 그가 지금 저렇게 다닐 수 있던 거겠지? 둘째 언니도 에쉬의 정체를 바로 알아차리지 못했으니까.

정말 그 대리인의 생각이 궁금하다. 에쉬도 그를 믿었기 때문에 그 자리에 앉혀둔 것일 텐데. 에쉬는 자신이 가진 저 황금빛 검과 황제의 인장만으로도 충분히 진짜임을 입증할 수 있는 증거가 되므로 저렇게 자신만만한 것일 테고.

왠지 불안하다. 내가 모르는 무언가가 더 있을 것만 같았다. 에쉬와 똑같이 생긴 유령의 존재도 경계해야 하고.

그날 오후에 열심히 달린 마차가 우리 왕국의 국경을 넘었고, 국경에서 가장 가까운 제국령의 마을에 도착하여 그곳에서 하루 묵었다. 그리고 다음 날에는 제국 수도에서 가장 가까운 마을에 다다랐다.

“휴, 고단하네. 마법으로 이동하면 참 좋을 텐데.”

어깨를 주먹으로 툭툭 내리치며 피곤하다는 듯 끙 앓는 에브린의 중얼거림에 동감한다. 제국에는 마법사들이 마력에 대한 연구를 한다는 마도원이 있다면서 이런 먼 거리를 단번에 이동할 수 있는 도구를 왜 만들지 않는 건지.

나는 해가 지는 반대편 하늘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어깨를 축 늘어트렸다.

“내일이면 제국 수도에 도착하겠네. 제국에서 삼 일이나 머물 생각 하니까 벌써부터 기운이 빠져나가는 기분이야.”

“왜? 황궁에서 삼 일이나 머무는 체험을 언제 또 해보겠어? 어차피 피할 수 없게 되었으니 좋게 생각하자고!”

혼자 들뜬 에브린이 하품을 하며 오늘 머물 숙소 안으로 들어갔다. 제국에서 직접 우리를 위해 내어준 황실의 별장이어서 그냥 훑어만 봐도 압도적이게 화려하고 웅장했다.

에쉬도 이곳에 와본 적이 있을까?

나는 에쉬에게 슬쩍 눈짓을 했고, 분주한 이들을 뒤로한 채 한적한 곳으로 걸음을 옮겼다. 내 뒤에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여 나와 보폭을 맞춰 걷는 에쉬의 발소리에 귀를 기울이면서.

“황실 별장은 정말 다르네요. 거의 하나의 작은 영지처럼 보여요.”

“그만큼 관리하는 비용이 제법 들어가지요. 하나의 골칫덩어리랄까. 이곳은 레이니드가 태어나 자란 곳입니다.”

“아, 정말요? ……혹시 레이니드도, 아버지가 다른가요?”

“확실하게는 모르겠지만, 그 여자의 슬하에 저보다 두 살 아래인 5황자는 확실히 아닙니다. 하지만 레이니드가 가진 푸른 눈동자는 아바마마와 아주 닮아 있어서 의심이 가기는 하더군요.”

내가 레이니드를 처음 보고 에쉬와 혈육이라는 것을 확신한 것이 바로 그 눈동자 때문이었다. 파빌리엔과 너무도 닮아 있던 눈동자에 에쉬와 비슷한 외모라서. 아마 그렇기 때문에 에쉬도 레이니드를 가족처럼 생각하고 있었던 걸 테지.

“레이니드에게 혈육이 따로 있었군요. 5황자에 대한 이야기는 들어보지 못했는데. 아, 그럼 파빌리엔은 몇 번째예요?”

“파빌리엔 그 녀석이 6황자로 황자 중 막내였습니다. 5황자는 황자의 난이 벌어지기도 전에 이미 출궁하여 어디로 갔는지 아무도 모르더군요.”

아직 살아있다는 뜻이겠지. 그렇다면 현재 남은 황자는 그 둘이 전부이리라. 5황자가 황위에 미련이 없다면 더 좋을 텐데. 아직은 위험한 인물이라고 치부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라 마음이 좋지 않았다.

“그 5황자가 당신의 자리를 위협한다거나, 당신이 세워둔 대리인이 그 5황자와 접촉하여 일을 꾸미고 있다거나?”

“가능성이 아예 없다고는 장담할 수 없는 내용이군요. 워낙 속을 알 수 없던 놈이어서 다른 황자들도 상대하기 꺼려했던 인물입니다. 제 어미를 아주 빼닮았거든요.”

레이니드의 어머니하고 에쉬의 사이가 좋지 않다는 것은 알겠다. 황족의 혈육이든 아니든 일단 황자를 낳았으니 황위 서열이 존재할 테니까…….

‘설마, 레이니드가 에쉬 대신 마셨다던 그 독. 그 정부의 짓 아닐까?’

처음에는 파빌리엔을 의심했었는데 보면 볼수록 파빌리엔이 에쉬를 꽤 많이 의지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대놓고 티를 내진 않았으나 은연중에 보이곤 했었으니까.

에쉬와 가까운 사이면서 레이니드를 이용할 수 있는 사람. 그리고 레이니드가 범인에 대한 정보를 꼭꼭 숨겨둔 이유.

증거 없이 의심만 한다고 될 일은 아니지만, 느낌이 좋지 않았다.

“그 정부는, 어디 있어요?”

“현재 살아있는 아바마마의 여자는 황태후와 그 여자뿐인지라. 황자를 낳았으니 그에 상응하는 대접을 받아야겠다기에 북쪽 지역에 있는 별장을 내어주었습니다. 조금 춥고 험한 지역이긴 해도 조용히 살기는 딱 좋을 것 같더군요.”

“그런가요. 그럼 이번 건국기념제에, 참석할까요?”

“으리으리한 황실 연회는 무슨 일이 있어도 참석하겠다는 굳건한 의지도 있고, 레이니드도 있으니 아마 올 겁니다.”

지금까지 황제의 대리인과의 만남만 생각했지, 다른 황실 사람들을 만나는 것에 대한 대비는 해 두지 않았다. 내가 이런 실수를 저지르다니. 가장 중요한 것인데.

“황태후 폐하는 어떤 분이세요?”

“흐음……. 황태후는 삼 년 전에 궁을 옮긴 이후로 두문불출이어서 아마 만날 일은 없을 겁니다. 연회며 건국기념제며 신년 하례까지도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중이어서.”

“내가 조심해야 할 부분은 없을까요? 건국기념제에 황제의 약혼녀로 등장하면 꽤 많은 이들의 관심 대상이 될 것 같은데.”

에쉬는 잠시 고민하는가 싶더니 의미심장하게 웃으며 내 손을 조심스레 잡고는 들어 올려서 자신의 뺨에 손바닥을 얹었다. 따뜻한 온기를 머금은 그의 보드라운 뺨이 피부로 스며들어 심장이 콩닥콩닥 춤을 추기 시작한다.

“슈아는 슈아의 그 모습 그대로 있으면 됩니다. 무슨 일이 있어도 그냥 그대로 그 자리에. 그 어떤 고민도 할 필요는 없습니다.”

“……무슨 뜻이에요?”

“올해 건국기념제는 예정대로 치르지 못할 수도 있거든요.”

내리깐 연갈색 눈동자에 깊게 자리한 감정의 소용돌이가 분노였음을 깨달은 건, 그다음 날 제국의 황성으로 입궁한 이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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