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5화
“정원은 저쪽이란다, 슈아. 아무도 없어서 비교적 조용할 거야.”
둘째 언니도 내가 에브린에게 할 말을 눈치챈 것 같았다. 정원의 위치를 알려주고는 별장의 사용인들에게 나를 따라온 이들의 거처를 안내하라 명하고, 하녀장과 함께 먼저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해서 나는 비장한 마음을 안고 언니가 가리킨 방향으로 길을 잡았다.
“왜? 무슨 이야기인데?”
어쩐지 비밀스럽고 솔깃한 이야기를 기대한다는 듯 내 뒤를 따라오는 에브린의 얼굴이 잔뜩 상기된 채다. 그런 우리를 에쉬와 카시안도 뒤따랐다.
“너한테 해주지 못한 이야기가 있어. 어차피 다시 왕국으로 돌아가라고 해도 싫다고 할 거잖아.”
“물론. 우리 슈아의 일이라면 내 이 두 눈으로 똑똑히 모든 일의 전말을 확인할 거거든. 어머니도 허락하셨다고.”
“……백작 부인께서 별다른 말은 안 하셨어?”
“좋은 경험이 될 거라고, 잘 다녀오라 하시던데?”
새삼 느끼는 건데, 에브린과 브레이튼 백작 부인과 은근히 닮았다. 그렇게나 외향적인 에브린이 차분한 영애인 척 연기를 할 때가 있는데 그걸 보면 역시 피는 못 속이는구나 싶을 정도로 똑 닮았다고 느끼기는 했지만.
나는 우리 백작저의 정원보다 더 넓고 근사한 정원 입구에 들어서면서 감탄을 금치 못했다. 하나의 커다란 공원 같아서 확실히 고위 귀족의 정원은 다르구나 싶고.
“에쉬. 황궁 정원은 이보다 더 크고 아름다운가요?”
“정원이 몇 군데 있기는 합니다. 관심 있게 보진 않아서 어땠는지 기억이 나질 않는군요. 황궁이니 잘 꾸며놓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산책…… 별로 안 좋아해요?”
“좋아합니다. 아니, 좋아하진 않았는데 당신 덕분에 산책이 얼마나 의미 있는 일인지 알게 되었거든요.”
얼굴이 화르르 달아올라 뜨거워졌다. 항상 산책을 하면 남들 눈을 피해 포옹을 하거나 입을 맞추는 비밀스러운 행위를 하곤 해서. 에쉬가 그걸 의미 있는 일이라고 설명하니 왜 이렇게 민망한지.
우리 대화가 즐겁다는 듯 카시안은 픽 웃으며 고개를 돌려 아닌 척 외면했다. 그에 반해 에브린은 조금 짜증 섞인 가자미눈으로 우릴 지그시 흘겨보았다.
굳이 자기 앞에서 이런 애정행각을 벌여야겠냐고 눈빛으로 구박하는 것 같아 민망함에 헛기침이 절로 나왔다.
“흠, 산책은 정신을 맑게 해주고 건강하게 해주는 중요한 요소예요. 특히 정원사의 손길이 닿아 잘 꾸며진 정원에는 마음을 정화시켜주는 특별한 힘이 있다고 믿어요.”
“동감합니다. 여기도 충분히 아름답지만 역시, 영지의 본가 정원만큼 아름다운 곳은 없다고 생각합니다.”
본가의 정원은 우리에게 아주 소중한 기억이 자리한 곳이니만큼 나 역시 각별하다 생각하는 곳이었다. 내년 봄에도, 그 나무에 겨우살이가 돋아날지 궁금하기도 하고.
“아니, 연애는 나중에 두 분이서 따로 하시고. 나한테 할 말 있다며? 그쪽 둘 사랑 놀음이나 보여주려고 데려온 거야?”
투덜거리는 에브린의 목소리에 다시 분위기를 쇄신시키려 호흡을 골랐다. 에브린에게 할 말을 머릿속으로 다시 정리하면서.
“나는 솔직히, 브링 네가 제국에 가는 것만큼은 반대야. 물론 아무 이유 없이 이런 말을 하지 않아. 지금 제국은…… 네가 상상할 수 없을 만큼 황당한 일도 너무 많고 결정적으로 너무 위험해.”
“알아. 알고 가겠다는 거야. 알기 때문에, 가는 거고.”
에브린이야 내 처지에 대해서 전부 알고 있기는 하다만. 무서운 이야기라면 나보다 더 질색하는 에브린이 과연 이 이야기를 듣고도 저렇게 당당할 수 있을까?
“제국에 유령이 있어. 그것도 마법을 사용할 줄 알아서 언제든지 실체화를 할 수 있는 유령. 죽은 사람의 영혼.”
“응. 그것도 알아.”
“……안다고?”
담담하게 고개를 끄덕거리는 에브린의 고백에 놀란 건 나와 에쉬였다. 어떻게 그 사실을 알고 있나 싶다가 지난번에도 에쉬가 황제임을 나보다 더 먼저 알게 된 계기가 떠올랐다.
해서 나는 두 눈을 가늘게 뜨며 되물었다.
“그날, 파빌리엔이 그것까지 다 떠벌린 거야?”
“취한 사람이 그런 걸 따질 여유가 있었겠어? 고백 한 번 제대로 하지 못하고 마음에 품은 여자를 형님께 빼앗겨 실연을 당했다고 와인을 물처럼 벌컥벌컥 마시던데?”
“어떻게, 어디까지 알고 있어?”
“너는 어디까지 알고 있는데? 아니. 내게 하려던 이야기가 뭐야? 미처 털어놓지도 못했던 그 내용. 나는 네가 궁금한 건 죄다 말해주었는데, 좀 서운하다 너?”
아랫입술을 삐죽거리는 에브린에게 조금 미안함을 느끼기는 한다. 설마 그 정도로 모든 걸 다 알고 있을 줄은 몰랐고, 아마 내가 먼저 이야기를 꺼낼 때까지 모른 척하고 기다려준 것 같은데.
“설명하자면 길어. 일단 옛날이야기부터 해줄게. 내가 겪은 이야기는 아니고 들은 이야기야.”
나는 둘째 언니와 유령, 그리고 어머니와의 관계를 들은 그대로 전해주었다. 어머니의 사망과 함께 봉인되었던 유령이 탈주하였고, 얼마 전에 내 앞에도 모습을 드러냈었다고.
“진짜? 정말 실체화를 해?”
“응. 확실히 그건 에쉬가 아니었어. 얼굴에 상처 하나 없이 깨끗했거든.”
그의 뺨에 난 자상과 온몸에 남겨진 상처들은 여전히 안타까움을 자아냈다. 유령이 실체화한 모습은 깨끗했는데, 상처가 없던 시절의 그겠지. 아직도 그때 욕실에서 마주한 그 유령을 떠올리면 등줄기를 타고 소름이 오스스 돋아났다.
“아무튼 그 유령이 제국에 있다면, 나와 둘째 언니를 위협할 수도 있을 가능성이 아주 커. 그렇기 때문에 너와의 동행이 조금 겁나. 네게 무슨 일이 생길까 봐.”
“유령이 실체화를 한다고 해도 설마 내게 해코지를 하겠어? 우리 가문이 어떤 가문인데. 암만 제국의 황제여도 쉽게 건드릴 수 없는 왕족의 피가 흐르는 가문이라고.”
“그 유령, 마법도 쓸 줄 안대.”
“……마법? 마법사? 그…… 막 사람 뼛조각 하나 남기지 않고 태운다는 지옥의 화염을 다루는 그런…… 마법?”
그제야 에브린이 좀 상황의 위험성을 인지했는지 제법 놀란 태도를 보였다. 해서 나는 진지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거리며 에브린의 두 손을 꼭 맞잡았다.
“나, 진짜 목숨 걸고 제국에 가는 거야. 이번 일은 내가 치러야 할 하나의 역경이라고 생각해. 그 일에 나의 소중하고도 유일한 친구가 휘말릴까 봐 겁나. 그러니까 제국에 동행하는 건, 재고해줘. 부탁이야, 브링.”
나로 인해 누군가가 위험에 빠지는 건 죽기보다 싫었다. 자연적인 재해로 인한 사고라면 몰라도 상대는 물리적인 힘을 부리는 마법사다. 에쉬는 걱정할 것 없다고, 절대 나를 해치지 않는다 할지 몰라도 사람 일은 혹시 모르는 법.
그날 딱 한 번 본 그 유령의 행태를 떠올리면 에브린을 인질로 삼아 나를 겁박하는 일을 하고도 남는다.
“그보다 슈아, 내가 준 비엔의 쪽지는 읽어보기라도 했어?”
며칠 전 둘만의 티타임 이후, 돌아가려던 에브린이 내게 파빌리엔이 보내온 쪽지를 건네주었었다. 그리고 나는 그것을 열어보지도 않고 에쉬에게 건네주었다.
[파빌리엔이 브링 앞으로 보내온 편지래요. 아마 누군가의 눈을 피해 할 말이 있기 때문에 에브린에게 보낸 것 같다고요. 당신이 받아요. 혹시 제게 알려줄 일이 있다면 말해주고요.]
그 뒤로 에쉬가 편지에 대한 이야기를 하지 않아서 잊고 있었는데.
“그거 에쉬에게 줬어. 왜?”
혹시 내가 알아야 할 중요한 이야기가 담겨있었는데 말해주지 않은 거냐고 에쉬를 흘낏 쳐다보았다. 하지만 에쉬는 크게 중요한 일이 아니었다는 듯 어깨를 으쓱거리기만 했다.
그런 에쉬를 지그시 바라보던 에브린이 어처구니가 없다는 표정으로 헛웃음을 흘렸다.
“뭐예요? 그쪽이야말로 목숨이 두 개라도 돼요?”
“……무슨 말이야, 브링?”
“너한테 아무 말도 해주지 않은 거야? 지금 제국에 발을 디디면 안 되는 사람은 내가 아니라 저 사람 같은데.”
그럼 파빌리엔이 에쉬더러 제국에 오지 말라고 편지를 보낸 거였을까? 그렇지 않고서야 저런 말이 나올 리는 없으니까.
하지만 에쉬는 그 경고를 무시했을 가능성이 크다. 지난번에 황궁 시녀도 대리인의 말을 전해 들었을 때, 지금처럼 태연하게 웃으며 아주 가볍게 무시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에쉬의 대답은 예상대로였다.
“저 역시 가서 해결해야 할 일이 있어서 말입니다. 직접 가지 않으면 해결되지 않는 것들이라.”
“제국에 발을 딛는 순간 그쪽을 죽이겠다잖아요.”
“누구도 나를 해칠 수 없습니다. 절대.”
에쉬는 단호했고, 에브린은 대단한 고집이라며 중얼거리고는 혀를 내둘렀다. 나더러 어떻게 좀 말려보라는 눈빛을 보내오는데.
마음 같아서야 나도 말리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다. 왜 그런 이야기를 내게 해주지 않은 거냐고. 숨길 게 따로 있지, 당신 목숨이 걸린 중요한 내용을 왜 나만 모르고 있던 거냐고 멱살이라도 잡아 짤짤 흔들고 싶었다.
또 한편으로는 그의 마음도 충분히 이해가 되어서. 그는 황제의 대리인이 자신을 절대 해치지 못할 거라고 했다. 또한 그가 그리워하는 선황과 사랑하던 어머니를 위해서라도 절대 그 자리를 포기하지 못할 거다.
어떻게 보면 지금 이건 에쉬가 찬탈하였던 그 자리를 또 빼앗긴 거고, 그걸 되찾기 위한 여정이 될 수도 있다. 아마도 빼앗긴다면 차라리 파빌리엔에게 황위를 넘겨줄 생각을 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내가 아는 그라면.
“브링. 이것 또한, 우리가 결판내야 할 하나의 중요한 과제라고 생각해. 이게 해결되지 않으면 지금까지의 행복이 전부 무너져버릴 테니까.”
강요할 수 없는 부분이 분명 존재했다. 그러므로 누구도 원망할 수 없는 거다. 그저 아무도 다치지 않고 무사히 정리되어 평화를 되찾는 것을 바랄 뿐.
“……좋아. 그렇게 나온다면 어쩔 수 없지.”
한숨을 푹 내쉬는 에브린이 입맛을 다셨다. 해서 나 역시 환하게 웃으며 에브린에게 다가가 가볍게 포옹해주었다.
“고마워. 내 부탁 들어줘서.”
“미안하지만 그 반대야. 다들 목숨 걸고 싸운다는데, 나만 꽁지 빠져라 도망치면 내 체면이 뭐가 되겠어?”
“뭐?!”
“나 말리지 마. 진심이니까. 내 이 두 눈으로 역사가 뒤집히는 상황을 똑똑히 지켜볼 테야.”
나를 똑바로 마주하는 에브린의 눈동자는 목숨을 위협받는 일이 있어도 절대 흔들리지 않겠다는 의지를 담은 채였다. 저 고집은 아무리 나라도 꺾을 수 없다는 것을 알아서 더 말리지도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