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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만의 비밀스러운 꽃 (64)화 (65/113)

64화

건국기념제가 치러지기 닷새 전. 제국까지 마차를 타고 꼬박 나흘이 걸려서 오늘 출발하기로 했다. 워낙 촉박한 시일에 드레스 네 벌을 만들어야 했기 때문에 출발 당일, 왕궁 재단사가 아침 일찍 왕궁 시녀들을 대동하여 저택을 찾아왔다.

“우와, 너무 아름다우세요. 녹색이 이렇게 잘 어울리시다니! 자칫 촌스러워 보일 수 있는 색이라 웬만한 귀족들은 사용하지도 못하는 옷감을, 너무 훌륭하게 소화해내시니. 역시 예비 황후 폐하로서 손색이 없으십니다.”

민망할 정도로 부끄러운 칭찬을 아낌없이 퍼붓는 재단사의 말에 시녀들까지 환하게 웃으며 재잘재잘 떠들어댄다. 이런 게 아첨인가. 권력이 이럴 때 참 무섭구나 싶어서 픽 웃음이 났다.

“촉박한 시간이었는데도 이만큼 완성도 있는 드레스를 제작한 그대의 공이 큽니다. 수고 많았어요. 나와 함께 갈 하녀장에게 착의할 때 주의사항을 알려주고 그만 물러가 보세요.”

“알겠습니다. 조심히 잘 다녀오십시오.”

다시 외출용 드레스로 갈아입고 출발 준비를 마칠 때까지 밀린 영지의 일을 해결하기 위해 아버지의 서재로 향했다.

“아버지. 저 왔…… 응?”

분명히 내가 드레스 착의를 위해 연회장을 가기 전만 해도 아버지께서 에쉬와 함께 서재에 계셨는데. 어디 가셨다는 말을 전해 듣지도 못했는데 서재는 비어있었다.

에쉬는 또 어딜 간 거람? 같이 나간 건가.

나는 소파 테이블에 어질러진 서류들을 모아 하나씩 훑어서 분류했다. 다행히 영지는 별다른 일이 벌어지지 않아 제법 평화로웠다. 본가에도 별일 없는 것 같고.

“……사유지에 침입자가 있었다고?”

한 장 한 장 서류를 넘기다가 눈에 들어오는 문구가 있어 자세히 읽어 내렸다.

사유지, 그것도 어머니의 유골함을 모셔둔 가문의 묘지를 관리하는 이가 달도 없는 새까만 밤에 누군가를 보았다. 관리인의 증언에 의하면 그 무언가가 사람 형상을 하고는 있었는데 마치 빛으로 몸을 감싼 것처럼 희끄무레하여 유령처럼 보였고, 그가 어머니의 묘 앞에서 한참을 서 있었단다.

그때 머릿속을 스치고 가는 이가 있었다. 지난번 에쉬의 쌍둥이라던 그 유령. 자신을 봉인한 내 어머니에게 원한을 품고 어머니의 묘에 나타났던 걸까?

온몸에 한기가 돌면서 소름이 인다. 치사하게…… 설마 마력조차 없는 나를 해코지하러 또 찾아오는 건 아니겠지?

달칵.

“헉!”

갑자기 서재의 문이 활짝 열려서 나도 모르게 비명을 내질렀다. 최악의 상황을 떠올리고 있었던 터라.

“……슈아?”

서재 안으로 자연스럽게 모습을 나타낸 건 에쉬였다. 뺨에서부터 턱까지 이어진 자상의 흔적이 있는.

그럼에도 그 유령이 그의 모습을 똑같이 따라 한 건 아닐까 싶어 조금 경계했으나, 확실히 누가 봐도 나의 에쉬가 분명했다.

나를 향한 다정한 저 진심 어린 눈빛은 아무리 대단한 연극배우라 해도 절대 따라 할 수 없을 테니까.

“아, 잠깐 딴생각을 하고 있어서 놀랐어요. 오늘 제국으로 출발하는 날이어서 좀 예민해졌나 봐요.”

가슴을 쓸어내리며 서류를 내려놓고 자리에서 일어나 그를 맞이하였다. 하지만 내가 비명을 지른 것에 못내 마음에 걸린다는 듯 에쉬의 얼굴에 심각함이 묻어나오고 있었다.

“무슨 생각을 했습니까? 무슨 서류를 보았기에……?”

테이블에 놓인 서류를 집어 들어 걱정스러운 눈으로 훑어보더니 이미 본 내용이라는 듯 입을 꾹 다물었다. 내가 생각하던 것과 같은 추측을 하고 있는 것 같았다.

“그 유령, 맞겠지요? 복수하고 싶은 상대가 없으니 그 분노를 어디에 풀려고 할지 모르겠어요.”

“그냥 궁금해서 다녀간 걸 겁니다. 별 뜻은 없었을 테니 너무 마음 쓰지 마십시오. 제게 단 한 번도 봉인 당했던 분노를 표출한 적이 없었으니까요.”

“그렇다면 다행이지만요.”

하지만 여전히 불안한 건 마찬가지다. 그 유령이 자신의 형제인 에쉬 앞에서 어떤 모습을 보이는지 몰라도, 지난번 내 앞에서 드러낸 행동은 결코 평범한 것이 아니었으니까.

“그런데, 혹시 아버지는 어디 가셨는지 알아요?”

“과거 그 녀석이 봉인되어 있었다던 후원에 함께 갔었는데 갑자기 외출해야 할 일이 생겨 출타하시는 걸 보고 오는 길입니다. 그렇지 않아도 오늘 제국으로 떠나는 당신께 잘 다녀오라 인사를 대신 전해 달라 하셨습니다.”

“인사야 어제도 했는데. 아버지도 참.”

며칠 전부터 계속 수도 없이 제국에 무사히 잘 다녀오라는 말을 건네셨다. 처음에는 벌써부터 왜 저러시나 하다가 나중에서야 그 마음이 이해가 가더라.

일 년 전, 어머니가 본가에서 수도로 떠났을 때 아버지께서 출타 중이셔서 마지막 인사조차 하지 못했던 것을 마음에 두고 계셨음을.

왠지 그 마음이 충분히 이해가 되어 울컥 감정이 샘솟아 오른다. 만약 내게 무슨 변고가 생긴다면, 에쉬도 아버지처럼 그렇게 아파할까?

“……왜 그런 눈으로 보는 겁니까? 불안해지게.”

“이번 일, 잘 해결되면 아버지께 새어머니를 들이라 하고 싶은데. 에쉬 생각은 어때요?”

어머니께서 돌아가신 지도 벌써 일 년. 내가 후계교육을 받는다 해도 아직은 더 배워야 했고, 그것과는 별개로 가문의 내정을 담당해줄 이가 필요하기도 하다.

둘째 언니의 말에 의하면 부모님이 나와 에쉬처럼 첫눈에 반해 맺어진 만큼, 아버지는 새 부인을 맞이하기를 꺼릴 수도 있겠지만.

그러나 에쉬는 내 말에 쉬이 대답하지 않고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리면서 생각에 잠긴다. 굉장히 진지하게 고민하는 것 같아서 그냥 물끄러미 그를 지켜보기만 했다.

심각한 저 표정도 상당히 가슴을 울리게 해서. 대체 무슨 생각을 저리 열심히 하나 궁금하기도 하고. 머릿속을 엿볼 수 있다면 참 좋을 텐데.

“글쎄요……. 왠지 백작이라면 생각해보겠다는 대답만 하고 고려조차 하지 않을 것 같습니다만.”

“왜요?”

“제가 백작이어도 그럴 것 같거든요. 내 옆자리는 세상에 단 한 사람만이 서 있을 수 있다고 여기니까.”

또 한 번 심장이 터질 것 같았다. 그를 떠보려던 건 아니었는데. 예상치 못하게 달콤한 진심을 듣게 되어 또 잔뜩 들떠버리고 만다.

“혼자는…… 외롭잖아요.”

“살아서도 함께였으니 죽어서도 함께라고 생각합니다. 그럼 슈아는 만일 내가 숨을 거두게 되면, 다른 이를 곁에 둘 겁니까?”

그의 반문에 내가 실수했음을 깨달았다. 이 심장은 하나고, 단 한 사람에게만 반응하므로. 그 누구를 만난다 해도 이런 설렘을 다시는 느끼지 못할 것이 분명하니까.

나는 픽 웃으며 그의 가슴팍에 손바닥을 얹어놓고 수줍게 대답하였다.

“그거까지 고려하진 못했어요. 내 일이 아니라고 너무 쉽게 생각했나 봐요. 이 심장에 새겨질 이는 세상 유일한데. 너무 가문의 입장만 따졌네요.”

“충분히 이해는 합니다. 다만, 백작께서 직접 이 이야기를 전해 들었다면 매우 난감해하셨겠지요.”

“역시 모든 일은 당신과 의논해서 해결하는 것이 가장 정확하네요. 고마워요, 에쉬. 덕분에 아버지를 곤란하게 해드리지 않을 수 있어서.”

“고맙다면 감사 인사를 해주십시오.”

해맑게 웃으며 내게 고개를 숙여오는 그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잘 안다. 해서 자연스럽게 살짝 까치발을 들어 그의 입술을 향해 서서히 다가가는데.

“아가씨. 출발 준비를 전부 마쳤습니다. 바로 출발하셔야 합니다.”

서재 밖에서 들려오는 집사의 목소리에 반사적으로 뒤로 휙 물러나 버렸다. 집사가 안에 들어오지 않았으니 망정이지, 하마터면 사용인들의 입방아에 오를 뻔했어.

“그, 그래. 금방 나갈게.”

나는 아쉬워하는 에쉬와 함께 빠른 손놀림으로 흩어진 서류를 모아 정리하고는 함께 밖으로 나가 마차에 올랐다. 제국으로 향하는 첫날은 로안트 후작가의 영지를 지나쳐야 했고, 그곳에서 둘째 언니와 만나 합류하여 하루 묵은 뒤에 출발하기로 하였다.

마차에 나와 하녀장이, 뒤이어 따라오는 짐마차에는 사용인들이, 그리고 에쉬와 카시안은 내 호위를 맡기 위해 따로 말을 타고 함께 출발했다.

제국으로 향해있는 길목은 제법 잘 닦여있어서 본가로 가는 길보다 제법 안정적이었다. 마차 흔들림도 거의 없어서 엉덩이가 아프지도 속이 불편하지도 않았다.

긴 여행길이라 생각하여 쉬엄쉬엄 여유를 부리며 로안트 후작의 영지에 진입하였다. 이미 해는 뉘엿뉘엿 저물어 밝았던 하늘이 서서히 어두운 그림자에 집어 삼켜지고 있었다.

“슈아!”

“……어? 브링?”

후작가의 별장 입구에 다다랐을 때, 나를 마중하러 나온 둘째 언니 옆에서 에브린이 손을 크게 흔들며 나를 부른다. 에브린이 있다는 이야기도, 별장에 간다는 이야기도 듣지 못했는데?

얼떨떨한 마음으로 마차에서 내렸고, 휘둥그레 뜬 눈으로 둘째 언니를 바라보았다. 그러자 언니가 한숨을 푹 내쉬면서 못 말리겠다는 듯 에브린을 흘겨본다.

“얼마 전부터 나를 찾아와서 자기도 동행하겠다고 떼를 쓰더라고. 놀러 가는 게 아니라고 그렇게 설명해도 어떻게든 따라가겠대. 내 보좌를 하는 시녀 노릇이라도 하겠다고 해서 그러라고 했지.”

“그런데 왜 나한테 말 안 했어, 브링?”

“원래 뜻밖의 선물이 가장 감동하는 법이거든. 우리 슈아는 놀란 표정이 제일 귀엽기도 하고!”

하여간 제멋대로는 여전하다. 미리 서찰을 보내지 않고 본가에 쳐들어오는 경우도 종종 있었으니.

“언니는 왜 나한테 말해주지 않았어?”

“에브린이 말하지 말라고 신신당부를 하잖니. 말하면 분명 못 가게 막을 거라고 하길래. 그런 줄 알면 왕국에 얌전히 있어야지, 머리 컸다고 말도 안 들으니 브레이튼 백작 부인께서 얼마나 골머리를 앓고 계실지 안 봐도 알겠다.”

타박에도 굴하지 않는 에브린은 그저 혼자 잔뜩 신난 표정이었다. 나와 둘째 언니는 이번 제국행이 위험해질 수도 있다고 판단하여 목숨을 걸고 가는 만큼 심각한데.

그러고 보니 에브린에게는 그 유령의 존재에 대해서 알려주지 않았다. 알고 있으면 저만큼 해맑은 미소를 보이지 않겠지.

말해줘야 할까?

나는 에쉬를 슬쩍 보았다. 그는 내가 무엇을 물어보고 싶은지 안다는 듯 고개를 천천히 주억거렸다. 알고 있어야 혹시 모를 위험을 방지할 수 있을 테니까.

“브링. 나하고 잠깐 이야기 좀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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