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3화
“삼각관계?”
“응. 들을수록 기가 차서 웃음을 참느라 혼났어. 아주 자기들끼리 소설을 쓰고 계시더라고.”
이미 에쉬의 정체를 알고 있는 에브린은 그런 망발을 지껄이는 이들이 가소롭다는 듯 비웃었다. 에쉬가 황제와 그렇고 그런 사이라니. 지난번에 에브린이 황제에 대한 소문이 그렇게 퍼졌다고 하긴 했는데, 이제 아예 멋대로 상상의 나래를 펼치고 있구나.
“재미있네. 또 다른 건?”
“황제 폐하께서 고작 왕국의 백작 영애를 황후로 불러들이는 것, 그리고 그 상대가 남자에겐 쥐뿔도 관심 없는 슈아 너를 콕 집은 이유도 다 그 호위 기사 때문이래. 그런데 그 호위 기사가 슈아 너한테 푹 빠진 것 같다고, 이래도 저래도 큰 난리가 한번 일어나긴 하겠다더라.”
그래. 난리가 나긴 하겠지. 다른 의미로.
“자, 내가 정보를 건네주었으니 너도 이제 말해봐. 무슨 일이야? 혹시…… 그분과 싸우기라도 했어?”
“싸운 건 아니고…….”
나는 한숨을 푹 내쉬면서 어제 있었던 이야기를 대충 전해주었다. 하소연하듯, 아버지에게도 차마 꺼내지 못하겠던 그 이야기를.
“황제의 대리인이 진짜 황제의 자리를 넘보고 있나 보네. 그 대리인도 황족이래?”
“그건 아닌 것 같아.”
“황족도 아닌 자가 그 자리를……. 그래서 너의 그분은 뭐라고 하셔?”
“크게 신경 쓸 일은 아니라고 하는데. 그 의미를 모르겠어. 정말 황위를 넘겨줄 생각이기 때문인지. 아니면 제 손으로 그 대리인을 처리할 힘이 있기 때문에 여유를 부리는 건지.”
후자에 가깝긴 하겠지만, 그렇다고 배신감을 느끼거나 불쾌해하진 않았다. 그저 어린아이의 귀여운 장난질 혹은 투정이라고 생각하는 듯 여겨서 오히려 내가 걱정하는 것이 이상할 정도였으니까.
괜히 또 울적해져서 어깨를 축 늘어뜨리자, 에브린이 코웃음을 치고는 등받이에 완전히 기대서 팔짱을 꼈다.
“너도 참 사서 고생한다. 너의 그이가 아무 일도 아니라잖아? 그럼 그냥 아무 일도 아닌 거지, 왜 혼자 걱정해?”
“……그런가? 내가 너무 혼자 최악의 상황만 염두에 두고 있는 걸까?”
“응. 쓸데없는 걱정. 대단한 실력의 호위 기사도 매미처럼 들러붙어 있겠다, 마젠티스 제국의 황제만 사용할 수 있는 인장도 너의 그이에게 있다며. 그렇게 사랑한다면서 너의 그이를 믿지 못하는 거야?”
순간 내가 실수했다는 생각에 머릿속이 멍해졌다. 에쉬에게 너무 미안해지기도 했고.
에브린의 말처럼 내가 그의 말을 믿어주지 못하고 혼자 전전긍긍해 했다. 에쉬는 그걸 보면서 어떤 생각을 했을까? 내가 자신을 믿지 못한다고 생각해 상처받진 않았을까?
“나…… 너무 큰 실수를 한 것 같아.”
“백작 부인께서도 그러셨잖아. 생각이 적으면 인생에서 실수를 하지만, 생각이 많으면 인생을 망친다고. 망치는 것보다는 실수가 훨씬 낫지.”
“맞아. 어머니께서 항상 너와 나를 적당히 섞으면 아주 알맞을 거라고 하셨던 거, 기억나?”
“그래서 우리가 친구지. 괜히 친구겠어? 아무튼 적당히 고민해. 고민한다고 해서 바로 해결될 문제는 아니잖아?”
나와 다르게 단순한 성향의 에브린이 이럴 때는 부러웠다. 지금 이 대화로 마음이 아주 많이 편해졌으니까.
“응. 그럴게.”
그렇다고 아예 신경이 쓰이지 않는 건 아니었다. 애써 최악의 경우들을 떠올리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것이 전부였다. 성향이 그렇게 쉽게 변하지는 않으니까.
에브린과의 티타임을 마치고 배웅하기 위해 저택 밖으로 나왔다. 마차에 오르려던 에브린이 무언가 생각났다는 듯 고개를 돌려 나를 보았다.
“아참. 며칠 전에 비엔에게서 편지가 왔었어. 답장은 보내지 말래서 보내진 못했는데.”
“……파빌리엔? 둘이 편지도 주고받아?”
“아니, 이번에 처음 편지가 온 거였어. 내가 그 말해준다는 게 잊고 있었네.”
그러더니 손에 든 작은 가방을 뒤적거리다가 꼭꼭 접어놓은 종이를 내게 건넸다.
“이건데 아마 나더러 보라고 보낸 건 아닌 것 같아. 직접적으로 네게 보내지 못해서 우리 가문으로 보내온 것 같더라고.”
“내가 못살아, 정말.”
그 종이를 받아들면서도 괜히 찝찝했다. 파빌리엔이 아직 무사한 것 같아서 안도도 되지만. 할 말이 있으면 에쉬를 통해 하라고!
“걱정할만한 내용은 아니었어. 그러니까 벌써 그렇게 썩은 표정 보이지 말고. 그럼 나 간다!”
마차에 올라 우리 백작저를 완전히 벗어난 모습을 물끄러미 보고 있을 때.
“요즘 브레이튼 백작가를 염탐하는 이들도 있다던데.”
갑자기 뒤에서 들려오는 에쉬의 목소리에 심장이 툭 떨어지는 줄 알았다. 바로 고개를 돌려 뒤를 바라보자, 꽤 오래 그 자리에 서 있었다는 듯 부드러운 미소를 짓는 에쉬가 내 손을 잡으려다가 만다.
여기가 밖이라는 사실을 잠깐 잊었다는 듯 민망해하는 것 같기도 하고. 그나저나 인기척도 없이 언제 돌아온 건지.
“언제부터 있었어요?”
“방금이요. 두 분이 너무 즐거운 대화를 나누는 것 같아서 차마 끼어들진 못하고 기다렸습니다.”
“……우리 이야기 뭐 들었어요?”
“브레이튼 백작 영애가 어떤 영식을 욕하는 이야기?”
이번에 에브린이 구혼서 하나를 받았는데, 상대 역시 차남인 데다가 미래를 조금도 계획하지 않고 될 대로 사는 주제에 자기를 탐냈다고 아주 불쾌해 했었다. 나도 아는 영식이었고, 워낙 술과 여자를 좋아하는 남자라서 아예 상대조차 하지 않았던 기억이 있다.
그래서 더 열정적으로 에브린과 함께 그 영식의 뒷담화를 퍼부었는데.
그리고 이어진 에쉬의 말에 얼굴이 화끈 달아올라 버렸다.
“나의 슈아가 그만큼 사람을 미워하는 건 처음 봐서 놀랐습니다. 항상 예쁘고 고운 말만 사용하던 슈아가 그리 험한 말을 할 줄도 알아서, 욕먹지 않으려면 열심히 살아야겠다는 생각도 들었고요.”
“……이, 잊어줘요. 그 대화는.”
나쁜 짓을 하다가 들킨 것 같아서 괜히 민망함에 손바닥으로 뺨을 감싸는데, 그러다가 에쉬가 했던 말이 떠올라 찬물이 끼얹어지는 기분이었다.
“그런데, 방금 브레이튼 백작가를 염탐하는 이가 있다고 했나요?”
“목적이 백작가인지 브레이튼 영애인지는 잘 모르겠습니다만. 혹시 몰라 더 알아보라고 카시안을 보냈으니 곧 정확한 정보를 들고 오겠지요.”
대체 누가? 왜?
브레이튼 백작가가 우리 가문보다 더 영향력이 있는 가문이긴 하다. 브레이튼 초대 백작이 왕족이었다고 했으니까. 현재 왕족의 피를 이어받은 귀족은 브레이튼 백작가가 유일하고.
대체 어디서부터 뭐가 잘못된 걸까? 아니면 이미 모든 것이 내가 모르는 사이에 은밀히 진행되고 있었던 걸까?
“하나가 정리되면 또 하나가 터지고. 인생 참 한 치 앞도 모를 만큼 다채롭네요.”
“걱정시키려고 한 말은 아니었는데. 내가 또 실수를 했군요. 그렇지 않아도 심란한 마음을 더 흔들어놓았으니.”
“아, 괜찮아요. 아직 일어나지도 않은 일에 걱정부터 하는 거, 이제 좀 자중하기로 했거든요.”
“……갑자기?”
“네. 갑자기. 우리, 가볍게 후원 산책이나 좀 할까요?”
에브린에게 들었던 이야기를 그에게도 전달해줘야 할 것 같아서 그를 데리고 후원으로 향했다. 예전에 그가 황제라는 것을 몰랐던 때에 황제에 대한 소문을 알려주고 난 뒤 당황하던 그 표정이 생생하게 떠올라 웃음이 절로 나왔다.
이번에는 어떤 표정을 지을지.
“방금 브링에게 들었는데, 황제가 힘도 없는 우리 가문을 선택한 건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 때문이래요. 그 황제가 사랑하는 사람이 누군지 알아요?”
“……당신이 그렇게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보니까 두려워지는군요. 또 무슨 어처구니없는 말이 도는 겁니까?”
“바로 제게 보낸 호위 기사래요. 그 사랑을 지키려고 나를 선택한 거라고 하더래요.”
아니나 다를까, 크나큰 시련을 눈앞에 둔 사람처럼 땅이 꺼져라 깊은 한숨을 내쉬는 에쉬가 손바닥으로 눈두덩을 덮는다. 그러더니 자조 섞인 웃음소리를 흘렸다.
“이젠 내가 나를 사랑하게 되는 겁니까? 아주 구체적이자 시답지 않은 내용이군요. 제 평소 행실이 그리 좋지 않았나 싶어 반성하게 됩니다.”
“사실도 아니니 민감하게 받아들일 필요가 있나요? 원래 영애들이 좀 남의 말을 꾸며내는 걸 좋아해요. 그냥 웃어넘기면 되죠. 어차피 나는 그 말을 믿지 않는걸요?”
내가 지금까지 보고 느낀 그대로가 에쉬의 진짜 모습이다. 간혹 의외의 모습을 보이고는 있어도 본질은 사라지지 않았다. 그건 지금까지 그가 황족으로서 지내온 세월이 있기 때문이라 생각한다.
왠지 가슴이 뭉클해져 나도 모르게 그를 와락 끌어안아 버리고 말았다. 그냥 그러고 싶었다. 그의 과거가 어땠을지 생각하면 생각보다 감정이 먼저 앞서버렸다.
“슈아?”
“잠시만. 잠시만 이러고 있어요, 우리.”
누구보다 이성적일 수 있다고 자부하였는데. 그와 관련된 일이라면 항상 평정을 잃어버리고 만다. 그도, 이런 기분일까? 그렇기 때문에 황제의 관도 져버릴 수 있었던 걸까?
에쉬는 혹시라도 누군가가 우리를 볼까 봐 나를 품에 안은 채로 나무가 우거진 안쪽으로 몸을 숨겼다. 그리고 마음껏 나를 두 팔로 꽉 안아 주었다.
“갑자기 이런 귀여운 행동을 보이면 곤란한데……. 무슨 좋지 못한 생각이라도 한 겁니까?”
“조금요. 한 가지만 명심해줘요. 내가 그 어떤 말을 하고 어떤 행동을 해도, 나의 진심을 꼭 믿어주기로.”
앞으로의 일은 알 수 없다. 제국으로 건너가게 되면 어떤 일이 펼쳐질지도 모르고. 서로에게 상처뿐인 시간이 될지도 모른다.
그렇다 하여도 내가 그를 사랑하는 것, 그가 나를 귀히 여겨주는 것만큼은 절대 변하지 않을 거라 믿는다.
이 심장 깊숙이 새겨진 나만의 비밀스러운 꽃은 영원히 지지 않을 테니까.
“믿습니다. 믿을 겁니다. 당신이 나를 밀어낸다 해도 나는 절대 멀어지지 않을 거고, 내게 포기란 없습니다. 이 숨이 끊어지는 한이 있다 하더라도.”
조금도 흐트러지지 않은 굳건한 대답. 그것만으로 자신감이 샘솟는다. 무엇이든 해낼 수 있다는 용기가, 그의 진심에 힘을 얻어 가득 차올랐다.
‘어머니. 제게 이 마음을 지킬 수 있는 힘을 주세요.’
그렇게 결전의 날이 다가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