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화
만약 정말 황태자가 내게 마음이 있었다면 그렇게 스치듯 끝난 인연으로 만들지는 않았을 텐데. 나는 그 이후로 황태자에 대한 이야기를 들은 적도 없으니까.
“그런 이야기는 처음 들어요.”
“사랑보다는 자신의 곤고한 위치가 더 중요했으니까요. 겉으로 드러내진 않았습니다. 다만 완전히 숨기지는 못하더군요. 그래서 그리움을 해소시키기 위해 검은 머리카락을 가진 이 여인을 황궁으로 들인 겁니다.”
“……끔찍하네요.”
왠지 소름이 끼친다. 자신의 욕심으로 한 여자의 인생을 뒤흔들어놓고 버릴 생각을 하다니.
그보다 이런 이야기를 저 시녀 앞에서 해도 되는 건지 모르겠다. 반응을 보아하니 몰랐던 내용도 아닌 것 같기는 하지만. 톡 치면 부러질 것 같은 처연한 표정이라 금방이라도 눈물을 쏟아낼 태세다. 겉과 속이 다른 류의 사람일까? 저 겉모습으로만 봐서는 황태자를 살해하라고 남의 등을 떠밀 사람으로 보이진 않아서.
나는 눈가를 촉촉이 적신 시녀를 바라보며 담담하게 물었다.
“이제 그쪽이 말해보세요. 제국에 있어야 할 사람이 왜 이 왕국, 그것도 왕궁 시녀 행세를 하고 있는지.”
“…….”
“무조건적으로 입을 다물고 있는다 하여 능사는 아닙니다. 솔직하게 말하지 않으면 나도 당신을 도울 수가 없어요. 아니면 당장, 저분의 매서운 칼끝이 그대의 목을 베어버릴지도 몰라요.”
위협을 주고 싶진 않았으나 아까부터 입을 꾹 다물고 있기만 해서 서로 곤란해지는 것 같아 일부러 으름장을 놓았다. 어차피 내가 나서지 않으면 카시안이나 에쉬가 가만히 두진 않을 테니까.
그러자 덜컥 겁을 먹었는지 고개를 푹 숙인 채 떨리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저는 그저, 황제 폐하의 명을 받아…… 다, 다른 뜻은 없었습니다. 폐하께서 잠시간 왕비 전하를 뫼시라 하였고, 저는 그에 따랐을 뿐입니다.”
황제. 그 대리인이 참으로 내 속을 박박 긁어놓을 심산인가 보다. 대체 왜 자꾸 이런 짓을 하는 건지. 첫째 언니에게 자신의 심복을 심어 무슨 정보를 얻으려고? 적국도 아닌데.
“왕비 전하께서도 알고 계시는 건가요?”
“……폐하의 제안에, 왕비 전하께서 흔쾌히 수락하였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갑자기 두통이 인다. 분명 첫째 언니에게 황제 폐하와의 구혼서에 대한 것을 정리하겠다고 했는데. 내 말을 믿어주지 않겠다는 걸지도.
한숨이 절로 나와 깊게 푸욱 내쉬자, 에쉬가 내 둥근 어깨를 커다란 손으로 감싸면서 등에 밀착하였다. 그 단단하면서도 뜨거운 체온이 조금이나마 불쾌한 감정을 덜어내 주었다.
“너무 상심하지 마십시오, 슈아. 왕비 전하의 입장에서는 그것이 최선이었을 겁니다.”
“당신 보기 민망해서 그래요. 언니가 왕족이 다 되었구나 싶어서 씁쓸하고.”
“조금도 불쾌하지 않습니다. 왕비 전하의 마음을 충분히 이해하니까요. 그보다…… 이번 일은 아무래도 제가 너무 안일하게 생각한 것 같습니다.”
“그 구혼서 건이요?”
“예. 생각보다 꽤 진심인 것 같아서. 너무 손을 놓고 있었다는 생각이 듭니다. 나의 슈아를 염탐하겠다는 의지는 가상하나, 왜 하필 저 여자를 보냈을까…….”
여전히 금방이라도 기절할 것 같은 창백한 얼굴의 시녀를 바라보다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유리로 만든 꽃병처럼 유약하게 보였는데, 그래도 눈물을 보이진 않는 걸 보니 의외로 굳건한 심지가 엿보인다.
외모를 보았을 때에는 에쉬의 말에 조금도 공감할 수 없었건만. 의외로 그 말이 사실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기도 하고. 에쉬의 배다른 여동생인 레이니드가 떠오르는 순간이었다.
레이니드는 적어도 표정에 감정이 전부 드러나곤 했었는데.
“일단 왕궁 시녀를 붙잡아두면 문제가 생길 수도 있어요. 어차피 정체를 알고 첫째 언니의 관할 아래 있으니 허튼수작을 부리지는 못하겠지요. 일단 돌려보내요.”
“수상한 구석이 한둘은 아니지만, 뒤를 캐는 건 언제든 가능하니 그러겠습니다. 슈아의 앞에서 험한 꼴을 보일 수는 없으니.”
나를 바라보는 따스한 연갈색의 눈동자가 시녀를 향하자마자 서늘하게 가라앉는다. 그 온도 차이가 너무도 극명하였다. 간혹 이런 식으로 에쉬의 근엄하면서도 살벌한 눈빛을 마주하면 너무도 낯설었다. 황제가 미치광이라는 소문이 절반은 맞다는 사실을 또 절실하게 느낀달지.
시녀 역시 에쉬의 싸늘한 눈빛을 마주하지도 못하고 덜덜 떨기만 했다. 옆에서 지켜보던 카시안이 시녀의 팔을 잡아 일으켜 세웠고, 창문 쪽으로 거의 질질 끌려가던 시녀가 다급하게 외쳤다.
“자, 잠시만요! 폐하의 전언이 있었습니다!”
아까는 꿀 먹은 것처럼 조용하더니 갑자기 왜?
정말 모를 사람이다. 왜 에쉬가 수상하다고 여기는지 이해가 되었다. 내가 너무 순진하게 있는 그대로만 생각했나 싶기도 하고.
그런데 폐하의 전언이라. 시녀가 파르르 떨리는 눈동자로 에쉬를 향해 말했으니까 황제의 대리인이 그녀를 이용해 에쉬에게 무언가를 전하려고 했던 모양이다.
카시안도 그 자리에 멈춰서는 에쉬의 눈치를 보았고, 에쉬는 눈을 가늘게 뜨면서 낮게 깔린 저음으로 사납게 읊조렸다.
“정녕 죽고 싶은 것이냐? 네가 감히 분수도 모르고 나를 저울질 해?”
“……그, 그것이 아니오라. 죄송합니다, 폐하. 죄송합니다. 너무 경황이 없어 소인이 죽을죄를 지었습니다.”
에쉬에게 폐하라고 하는 걸 보면 에쉬의 정체는 이미 알고 있었던 것 같다. 두 사람의 관계를 정확히는 모르겠지만, 저 시녀도 참 답답할 정도로 미련하고.
“네 목숨은 내 손에 달려있음을 잊지 마라. 너 하나 죽이는 건 일도 아니니. 한 번만 더 내 심기를 거스르면 멸문을 자초하는 일이 될 것이야.”
그제야 식은땀까지 흘리면서 경련하듯 온몸을 떨었다. 저렇게 두려워할 정도로 에쉬를 무서워하면서 대체 왜 입을 다물고 있었는지. 사서 고생하려는 것도 아니고.
“그래서, 그 녀석이 무어라 지껄이더냐?”
“……가능한, 다시는 제국에 돌아오지 마시라고 하였습니다. 황위를 버리고 떠났으니 더는…… 제국에 관여하지 마시라고…….”
에쉬의 얼굴이 가면처럼 굳어졌다. 나 역시 시녀의 말에 뒤통수를 한 대 얻어맞은 기분이었다.
저 말이 사실일까?
나는 분명 그 황제의 대리인이 에쉬를 다시 제국으로 끌어들이기 위해 내게 구혼서를 보냈다고 여겼었다. 그런데 에쉬더러 제국으로 돌아오지 말라니.
설마 황제의 대리인이 그 자리를 탐내는 건가? 욕심이 나서 자기가 정말 황제라고 착각하는 것?
“……또 다른 말은?”
“어, 없었습니다.”
에쉬는 더 말할 것도 없다는 듯 손을 휘저었고, 카시안은 시녀를 데리고 창문 밖으로 사라져버렸다. 한바탕 폭풍이 불어 닥친 느낌이다. 그 말 한마디에 정신이 초토화되어 머릿속이 새하얗게 변해버리기도 했다.
조용한 침묵 가운데 슬쩍 눈동자를 굴려 에쉬를 올려다보았다. 그는 의외로 평온해 보였다. 물론 겉으로만 그럴 수도 있고. 저 속이 어떨지는 본인만이 알겠지.
“생각보다…… 문제가 커진 것 같은데. 어떻게 생각해요, 에쉬?”
“장난질이겠지요. 그 녀석, 워낙 생각 없이 살아온지라 마음에도 없는 헛소리를 지껄인 겁니다. 깊게 생각하진 마세요.”
그가 그렇다면 그런 거겠지만. 왜 나는 이렇게 불안할까? 대수롭지 않은 일로 여기기엔 너무 충격적인 발언이어서.
평소와 다름없이 밝은 미소로 나를 바라보는 에쉬의 손이 내 뺨을 조심스레 어루만져주는데도 마음이 편해지질 않았다. 그 시녀의 말이 머릿속에 맴돌기만 한다. 에쉬도 내 복잡한 마음을 이해한다는 듯 애써 말을 덧붙이진 않았다.
그리고 다음 날, 우리 저택을 제집처럼 드나드는 에브린과 수도에서 가장 맛있는 디저트로 소문난 가게에서 사 온 케이크로 둘만의 티타임을 즐겼다.
“만날 거대한 곰 두 사람이 매미처럼 들러붙어 있더니. 오늘은 둘 다 안 보이네?”
에브린이 휑한 주변을 둘러보면서 고개를 갸웃거린다. 항상 티타임에는 에쉬와 카시안이 함께여서 그들의 빈자리가 낯선 모양이다.
나는 어제의 일을 떠올리며 입맛을 다셨다. 오늘 아침, 에쉬가 잠시 외출한다고 했을 때 대충 어딜 갔는지 알 것 같아서.
“해결할 일이 있다고 해서 외출했어. 카시안은 곰이 맞지만 에쉬는 곰하고 거리가 멀지 않아?”
“내 눈엔 그게 그거야. 그런데 너 표정이 왜 그래?”
“……티나?”
“어. 엄청. 너 해결되지 않는 일이 생기면 해결될 때까지 끙끙 앓잖아. 지금 딱 그 표정인데? 무언가 큰 사적인 일이 생겼다는 거. 뭔데? 무슨 일이야?”
두 눈을 생기 넘치게 반짝거리며 내 대답을 기다리는 에브린이 오늘따라 조금 얄밉다. 그냥 모르는 척 넘어가 주면 좋을 텐데. 그건 또 내가 아는 에브린이 아닌지라.
“말 그대로 사적인 일이야. 조금, 곤란해져 버렸거든.”
“누가?”
“……그보다 밖에서 황제에 대한 다른 이야기 뭐 들은 거 없어?”
에브린에게 숨길 이유는 없지만 아무리 오래된 친구라고 해도 털어놓기 어려운 내용이다 보니. 조심스럽게 정보를 얻어 볼까 싶어 되묻자, 에브린이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사적인 일이어서 말을 돌리는 거야?”
“또 다른 소문이 있다면 더 말하기 쉬워져서 그래.”
“하긴, 네가 요즘 티파티며 모든 모임에 불참하고 있어서 세상 돌아가는 상황을 잘 모르긴 하겠지.”
차를 호록 마시면서 포크로 케이크를 적당히 잘라 부드러운 맛을 음미하는 에브린이 여유롭게 웃는다. 아니, 자세히 보면 기분 좋은 미소는 아니었다. 특유의 비웃음인 것 같기도 하고.
“왜, 무슨 일 있어?”
“황제도 황제지만, 일단 여전히 마르엘 가문이 도마 위에 항상 오르더라고. 내 앞에서 쉽게 말을 꺼내지는 않는데, 어쩌다가 엿듣게 되면…… 황제 폐하께서 보냈다는 그 호위 기사와 네가 그렇고 그런 사이라고 말이 많아.”
원래 귀족들은 자기들이 믿고 싶은 대로 생각하니까. 완전히 거짓은 아니지만 아직도 그런 뒷말이 오간다고 생각하니 치가 떨렸다.
“더 웃긴 건, 그 호위 기사가 황제 폐하의 숨겨진 연인이래. 세기에 다시없을 삼각관계라나 뭐라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