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1화
아니면 이번 일 역시 황제 대리인이 꾸민 짓일지도 모르겠다. 저번에 왕궁으로 꽃차를 선물로 보냈다는 것도 그렇고.
“에쉬. 혹시 이 여자, 아는 사람이에요?”
“저와 친분이 있지는 않습니다. 제국 황실의 시녀가 왜 이곳에서 왕궁 시녀 노릇을 하는지, 저도 꽤 궁금하군요.”
역시. 서로 아는 사이인 건 확실하다. 황궁 시녀라는 건 조금 놀랍지만.
우리의 눈을 피하는 것도 그렇고, 부정하지도 않고 불안하다는 듯 두 손을 꼭 맞잡는 행동도 수상하기 그지없다. 들키면 안 될 잘못을 저질렀기 때문일 터.
“그런데 카시안은 왜 이 시녀를 몰래 잡아 왔어요? 에쉬가 명령한 것 같던데.”
“그야 주군께서 아시겠지요. 분명 제 손에 죽었어야 할 그 쥐새끼 같은 목숨을 주군께서 넓은 아량을 베풀어 살려주었는데. 제국에서 얌전히 쥐죽은 듯 있어도 모자라건만, 이 왕국에서 재회하게 된 이유도 궁금하고.”
나는 다시 에쉬를 바라보며 눈빛으로 물었다. 너무도 흥미로운 이야기라서 더 자세한 설명이 필요했다.
그러자 내리깐 눈으로 시녀를 흘겨보는 에쉬가 한쪽 입꼬리를 삐딱하게 끌어올린다. 그 모습이 꼭 비웃는 것 같아서 낯설었다.
“오래전, 황태자인 형님께서 곁에 둔 시녀입니다. 형님이 가까이했던 자작가의 영식이 하나 있었는데 그 영식의 여동생이었지요. 이 여자는 황족과 긴밀한 사이임을 이용하여 황후의 자리를 탐냈으나 형님은 그저 적당히 거리를 두었답니다.”
“고위 귀족이 아니어서?”
“형님은 그저 정부쯤으로 여긴 것이지요. 가까이 두고 싶은 장난감 정도로만. 형님은 특별히 황실의 피를 가진 황후감을 원했거든요.”
“……그거, 근친 아니에요?”
제국도 마젠티스 1세가 황좌를 쟁취한 이후부터 근친결혼의 싹을 뿌리 뽑았다고 들었다. 그 이전부터 황실이 근친으로 문제가 꽤 많았었다고 역사서에 기록되어 있었으며 마젠티스 1세가 당시 모든 황족을 몰살하면서 더는 비극이 일어나질 않길 바란다는 말을 남겼다고.
듣기로는 오랫동안 근친으로 이어졌던 마지막 황족들이 전부 불치병을 앓았고, 마젠티스 1세가 사랑했던 황녀도 병으로 숨졌다는 소문이 있었다. 해서 제국을 포함한 모든 왕국 역시 사촌 간의 결혼까지 폐지되었다.
그런데 그 황태자라는 사람이 왜 다시 근친에 눈을 돌린 걸까?
“아는 사람이 몇 되지 않는 사실이 하나 있지요. 내 아바마마께서는 살아생전 단 한 번도 황태후의 침소에 드신 적이 없습니다. 밤이든 낮이든.”
황제가 황후의 침소에 든 적이 없다면…….
“죽은 황태자가 황제의 혈육이 아니었다는 거예요?”
“황태후는 자신의 자리를 곤고하게 다지기 위하여 아바마마와 닮은 남자를 찾아내 침소로 들였습니다. 그것을 어머니께서 보았답니다.”
에쉬의 어머니가 당시 황후의 수석 시녀였다고 했다. 황후의 일거수일투족을 확인해야 하는 수석 시녀이니 당연히 모든 사실을 알기는 했겠지만. 당시 황후는 에쉬의 어머니와 선황의 관계를 알고는 있었을까?
참으로 복잡하게 꼬인 관계라서 입맛이 썼다. 국혼을 치르면 당연히 후계에 대한 압박이 있었을 것이지만,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어떻게 다른 남자와 내통하여 낳은 아들을 황족, 그것도 황태자의 자리에 앉힐 생각을 한 걸까?
“선황께서…… 알고 계셨음에도 왜 황태자 책봉을 내렸을까요?”
“황태후가 어머니를 협박하여, 술에 취한 아바마마께서 황태후와 동침하였다는 거짓말을 하도록 지시하였답니다. 아바마마께서는 자신의 아들이라 여겼던 것이지요. 그 모든 사실을 알게 된 건 사망하기 몇 달 전이었습니다.”
“말도 안 돼. 소문으로는 선황의 성욕이 왕성하여 시도 때도 없이 시녀들을 침소로 끌어들였다던데…….”
“그건 황태후가 흘린 거짓 소문입니다. 그 시녀들을 밀어 넣은 건 황태후의 짓이었고, 그녀들이 낳은 자식들은 아바마마의 혈육이 아닙니다. 저와 파빌리엔만이 유일한 아바마마의 자식이었지요.”
그래서 황위를 에쉬에게 넘겨주려고 했던 거였구나. 황태자를 비롯하여 다른 황자들이 전부 자신의 혈육이 아님을 알게 되었고, 황태자는 그 비밀을 숨기기 위해 선황을 살해하는 패륜을 저지른 것.
또한 황족의 피를 간직한 배우자를 원하던 것 역시 자신이 황족이 아님을 알기 때문에 은연중에 느낀 자멸감일 터. 황족의 핏줄인 황태자비를 맞이하여 아이를 낳으면 정통 후계자로서 온전히 인정받을 수 있을 테니까.
“에쉬는 언제 알았어요, 그 사실?”
“어머니께서 남긴 일기장에 적혀 있었습니다. 황자의 난이 발발하기 반년 전쯤, 우연찮게 어머니께서 머물던 처소 바닥 아래에서 찾았지요. 그 안에 어머니의 살아생전 모든 이야기가 담겨있었습니다.”
“……그럼 형님의 정부였다던 저 시녀는 왜 곁에 두고 있나요?”
자신이 황족이 아님을 아는 황태자가 정부와 깊은 관계를 맺어도 아이는 허락하지 않았을 것이다. 게다가 황태자가 2황자에게 배신당해 죽었다면, 가장 먼저 2황자의 타깃이 되었을 텐데.
그러자 에쉬가 코웃음을 치며 팔짱을 끼고는 삐딱한 시선으로 시녀를 노려보았다.
“다른 황자들과의 사이가 제법 좋았거든요. 황태자가 자신과 혼인해주지 않아 홧김에 2황자를 도발한 것도, 또한 4황자를 등 떠밀어 그 사달을 만든 여자라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권모술수의 달인인가 보네요. 설마 에쉬와도 친분이 있는 거예요?”
“황태자가 왜 저 여자를 품었는지, 그 이유가 더 궁금하지 않습니까?”
“이유가 있어요?”
나는 시녀를 다시 샅샅이 살펴보았다. 새까만 머리카락에 창백하리만큼 하얗고 고운 피부. 제법 풍만한 가슴에 잘록한 허리까지, 남심을 자극하고도 남을 아름다움을 가지기는 했다.
가녀린 한 떨기의 우아한 백합처럼 약해 보여서 보호 본능을 자극하는 외모인데. 방금 에쉬가 말한 것처럼 계략을 꾸밀 만큼 나쁜 사람으로 보이진 않았다.
역시 인간은 생긴 걸로 판단할 수 없다는 뜻일까?
“슈아. 칠 년 전 일을 전혀 기억하는 바가 없습니까?”
갑자기 또 내게 질문을 던진 에쉬의 말에 어릴 때의 기억을 더듬어보았다. 칠 년 전 일이라면 저번에 둘째 언니에게도 말했던 첫째 언니의 국혼을 치를 때고, 그 국혼 날 내게 조금 슬픈 일이 있었다는 것만 어렴풋이 기억이 난다.
첫째 언니의 혼인 때문에 슬펐던 건 아니었고, 무언가를 잃어버렸던 것 같은데. 그게 내게는 꽤 소중했던 물건이었고. 뭐였더라……?
“워낙 좋지 않은 기억은 빨리 잊어버리려고 해서. 그날 무언가를 잃어버리긴 했었던 것 같아요. 다른 건 잘 모르겠는데. 혹시 에쉬가 그날 나를 봤어요?”
“아주 깨끗하게 기억하고 있습니다. 당시 황태자가 검은 머리카락을 가진 이 여자를 곁에 둔 이유는 바로 슈아 당신 때문이었으니까요.”
그게 무슨 말이냐는 듯 둥그렇게 뜬 눈으로 에쉬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때, 흐릿하게 지워져있던 기억 하나가 불현듯 떠올랐다.
“……아. 기억났어요. 맞아, 그때 황태자라는 분과 짧게나마 대화를 나눴었어.”
얼굴은 잘 기억나지 않았다. 제국의 황제 폐하께서 친히 국혼을 축하해주기 위해 우리 왕국을 방문한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도 심드렁했다. 그래서 황제 폐하도, 각국에서 온 사절단까지 너무 많은 외부인의 방문이 있어서 빨리 그 국혼과 축하연이 끝나길 바랐을 뿐이었다.
[이 작은 비엔트 왕국에서 이처럼 아름다운 나비를 보게 될 줄이야. 어느 가문의 귀한 영애이신지?]
축하연이 막 시작되던 때, 가족들은 다들 여러 귀족에게 붙잡혀 있었고 나는 혼자 구석진 곳에서 쿠키만 오독오독 먹고 있었는데 황태자가 내게 말을 걸었다. 사실 황제의 얼굴만 살짝 보았던 터라 그가 황태자라는 것도 바로 알아차리진 못했다.
[……마르엘 백작께서 제 부친 되십니다.]
[아하, 이번에 국혼을 치른 왕세자비의 가문이로군. 이름은? 아직 성인이 된 건 아닌 것 같은데.]
[르슈아입니다. 올해 열두 살 되었습니다.]
[한창 좋을 나이군. 그런데 왜 여기 혼자 있는 거지? 아, 괜찮다면 나와 잠시 조용한 곳으로 가서 소소하게 대화나 나누어볼까?]
언제부터 나를 봤다고 초면부터 반말인지. 귀찮게 굴어서 살짝 짜증이 났었다. 그게 표정으로 드러나기 직전, 누군가 그에게 다가와서 귓속말로 살짝 말을 전하는데, 그때 ‘황태자 전하’라는 호칭으로 그를 불러서 순간 뜨끔했었지.
설마 황태자가 내게 말을 걸 줄은 몰랐으니까.
하지만 황태자는 알았다는 듯 대충 손을 휘저었고, 무언가 전달해준 남자가 눈치껏 자리를 피했다. 하필 엮여도 황태자랑 엮일 줄은 몰라서 최대한 빨리 어떻게든 그 자리를 피해야겠다는 생각뿐이었다.
[마침 곡이 바뀌었는데 한 곡 추지.]
[죄송합니다. 며칠 전에 다리를 삐끗하여 지금도 겨우 서 있는지라.]
[저런. 그럼 우리 황실 주치의에게 진찰을 받는 것이…….]
[저희 가문의 주치의도 유능합니다. 아주 살짝 삐끗한 것이라 휴식을 취하면 금방 낫는다 하였습니다.]
[그렇다면 나의 휴게실로 안내해주마.]
[일개 백작가의 여식이 어찌 감히 황족이 머무는 휴게실을 이용할 수 있겠습니까. 마음은 감사하나 도를 넘는 친절은 미천한 소녀에게 아주 부담스럽습니다. 감히 황태자 전하의 선의를 받아들이지 못하는 저를 용서하십시오.]
대충 그렇게 둘러대고 예의를 갖춰 인사한 뒤에 바로 에브린을 찾아가 꼭 붙어있었다. 그리고 그날, 어머니께서 주신 나비 모양의 팔찌를 잃어버렸었다. 예뻐서 소중하게 간직하던 거였는데.
결국 찾지 못했지만.
“딱히 기억에 담아둘 만한 내용도 아니어서 잊고 있었네요. 그런데 그게 다 연유가 있단 말이에요?”
“형님이 처음으로 원했던 여자가 당신이었습니다. 그렇게 계산적으로 황태자비감을 고르던 황태자가, 첫눈에 반해 상사병을 앓도록 만든 이가 슈아 당신이라는 뜻이지요.”
첫눈에 반해? 상사병? 황태자가?
말도 안 되는 이야기라 생각하여 헛웃음이 절로 났다. 당시 나는 열두 살이었는데. 당시 황태자는 성인이었을 테고.
하여간 황족들이라는 사람들이 왜 그렇게들 첫눈에 잘 반하는 건지. 파빌리엔도 그러더니 황태자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