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0화
“무슨 생각을 하기에 그리 웃습니까?”
“에쉬를 만나기 전에 저를 잠깐 떠올려봤어요. 사실, 운명 같은 거 믿지 않았거든요. 소설 속에서나 나올법한 우연적인 만남으로 사랑에 빠진다는 거, 솔직히 바보 같은 짓이라고 생각했었어요.”
“왜지요?”
“첫눈에 반한다는 거, 솔직히 얼굴 보고 반하는 거잖아요. 상대의 속마음이 어떨지 어떻게 알아요? 예전에 대외적으로 착하다 소문난 귀족 남자가 사실은 부인을 학대하던 변태였음이 드러난 경우도 있는걸요?”
말 한번 섞지 않은 남자에게 사랑에 빠지던 에브린을 옆에서 오랫동안 지켜보면서 운명 따윈 없다고 여겼다. 그저 자기합리화를 위해 운명이라는 단어를 제멋대로 끌어다가 보기 좋게 포장한 것이라고 확신했으니까.
자고로 사람은 겪어봐야 아는 법이니. 솔직히 내가 사랑이라는 것을 하게 될 줄도 몰랐고. 그와의 만남을 운명이라고 여기는 나 자신이 너무 신기하고 웃기기도 하다.
과거의 내가 지금의 나를 보면 무슨 말을 할지 궁금해진다. 아마 믿지 못할 것이다. 말도 안 된다며 부정할 게 뻔해.
“그런데 지금 내가 그 소설 속에 나올 법한 사랑을 하고 있네요. 지극히 현실주의자였는데. 유령도 그렇고 진짜 황제 폐하께서 우리 가문의 기사 제복을 입은 채로 함께 마주 보고 앉아 차를 마시는 지금도 그렇고.”
“아까도 말했지만 황위를 포기한 지 오래입니다.”
“그렇다고 에쉬 당신이 황족이라는 건 변하지 않잖아요. 또 대리인을 세운 것일 뿐, 즉위식 때 당신 이름을 기재하였으니까 사실을 따져보면 황제인 것도 변하지 않아요.”
“……달갑지는 않지만,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라 반박할 말도 떠오르지 않는군요.”
“지금도 간혹 당신에게 조언을 얻고자 제국에서 전서구가 날아오는 것도 알고 있어요. 영원히 떼어낼 수 없는 당신의 반쪽이긴 하겠지요.”
그걸 어떻게 알았느냐는 듯 에쉬의 두 눈이 동그래진다. 내가 잠귀가 밝은 건 아직 알아채지 못한 것 같았다.
나는 흐뭇하게 웃으며 차를 한 모금 마시고는 눈썹을 휙 들어 올렸다.
“이른 새벽마다 새의 날갯짓 소리에 깨곤 해요. 다시 조용해지다가 당신이 종이에 펜으로 무언가를 쓰는 소리가 들리고는 곧 다시 새가 날아가던데. 그 횟수가 꽤 빈번하기도 했고, 당신이 그 전서구에게 제국까지 무사히 귀환하라고 말했었잖아요?”
“그걸, 들었습니까?”
“잠귀는 밝은 편이에요. 요새 고민도 많아서 쉽게 잠들지 못하기도 하고요.”
“속이려는 건 아니었습니다. 숨길 생각도 없었으나 굳이 말을 꺼내 봐야 괜히 심란하게 만들 것 같아서…….”
혹여 내가 기분 나빠하고 있을까 봐 재빨리 설득하려는 그의 표정이 제법 진지하다. 말을 고르는 듯 머뭇거리는 그의 머릿속이 얼마나 복잡한지 눈에 잘 보여서 또 설핏 웃음이 터지고 말았다.
“유능한 대리인도 해결하지 못하는 문제들은 있을 거예요. 아무리 대리인이라 해도 황제는 아닐 테니 혼자 결단내리기 어려운 부분도 있을 거고. 그 마음 충분히 이해는 해도, 당신의 진심이 궁금해져요.”
“어떤 진심 말입니까?”
“당신이 결정한 선택들, 후회하지 않을 자신 있어요?”
그의 아버지인 선황께서 그에게 황위를 물려주고 싶어 한 이유가 있을 것이다. 지금껏 내가 에쉬를 보고 느낀 그의 성향을 보면 주변 환경에 굉장히 민감했다. 본인의 영역이라고 확신하는 곳에서 분란이 일어나는 것을 싫어하고 문제가 생기면 해결하는 능력이 제법 정확하고 빨랐다.
감정이나 친분에 의해 휩쓸리는 일 없이 모두에게 평등했다. 물론 나와 관련된 일에 대해서는 쉽게 결단을 내리지는 못하는 것 같았다. 아마 이성과 감정 사이에서 수없이 널뛰기를 하는 생각 때문이겠지.
지난번 파빌리엔이 그를 고작 백작의 영지를 다스리는 자리에 앉혀두기엔 아까운 인재라던 그 말이 이제 좀 이해가 되었다. 아마 선황께서는 이미 오래전부터 그를 후계로 삼기 위해 교육을 해온 것이 아닐까 추측이 되기도 하고.
최근에 에쉬도 생각이 많아진 듯하여 그의 생각을 듣고 싶어졌다. 만약, 아주 만약에 그가 황실로 다시 돌아가길 바란다면 나는 어떤 결정을 내려야 할까?
“너무하는군요, 슈아.”
그런데 그가 굉장히 기운 없는 목소리로 중얼거리며 눈썹 끝을 쭉 내려 서운하다는 듯 입을 삐죽 내밀었다. 갑자기 저런 귀여운 표정이라니. 순간 심장이 몸 안에서 터지는 줄 알았다.
“뭐, 뭐가 너무해요?”
“제국 황실이 위험천만한 곳임을 잘 알면서, 왜 자꾸 저를 그곳으로 밀어 넣으려는 겁니까. 내가 무얼 서운하게 했습니까? 아니면 혹시 실망한 거라도 있습니까?”
그것도 모자라 벌떡 일어나더니 다급히 내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아 내 손을 잡길래 내가 더 깜짝 놀랐다.
“에쉬!”
“애초에 나는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었습니다. 내가 나의 형제를 죽인 이유는 단 하나, 나를 비롯해 당신까지 위협하려던 놈을 벌한 것일 뿐입니다. 조금도 욕심내본 적 없는 자리입니다. 지금 역시 마찬가지고요.”
그가 나를 떠났다가 다시 돌아와서도 똑같이 말했었다. 가진 것이 없으므로 아무것도 줄 수 없다고. 그때와 똑같은 눈빛과 똑같은 표정으로 애절하게 나를 바라보고 있어서 미안해졌다. 쓸데없이 그의 마음을 떠본 것 같아서.
그냥 도움을 요청하여 거절하지 못하는 거였을지도 모른다. 그 대리자와 친분이 있던 걸지도 모르고, 파빌리엔이 보내온 전서구일지도 모르지. 내가 너무 혼자만 생각하고 결정한 것 같다.
나는 그의 손등을 겹쳐 잡고 상체를 숙여 그의 이마에 내 이마를 조심히 맞추었다.
“미안해요, 에쉬. 나도 어쩔 수 없는 사람인가 봐요. 당신이 너무 좋아서 함께 있고 싶은데, 가끔은 내 욕심 때문에 모든 것을 망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싶어서 무서워지곤 했거든요.”
“그랬으면 내게 이야기를 했어야지요. 혼자 속으로만 생각하지 말자고 하지 않았습니까.”
“정리가 되지 않았어요. 두서없이 말하면 더 오해할까 봐. 예전에도 제국이 와해되면 가장 먼저 침략을 당할 왕국이 우리 왕국이라고 모두 걱정이 이만저만 아니었거든요.”
첫째 언니가 걱정했던 것도 그것일 테지. 나를 황제의 방패로만 여겼을지도 모르겠지만. 어머니께서 가족과 영지를 사랑했던 것처럼 첫째 언니는 왕국을 매우 아끼고 사랑하고 있으니까.
“건국기념제에 초대받아서 지금 좀 예민해진 것 같기도 해요. 최근에 너무 갑자기 많은 이야기를 알게 되기도 했고요.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 여긴 것들 말이죠.”
“충분히 이해는 합니다. 하지만 나는 여전히 슈아 당신의 곁이 아니면 의미 없어요. 내 목숨만큼 당신을 사랑하기 때문에, 어떻게든 보호하고 지켜낼 겁니다. 당신과 당신이 사랑하는 그 모든 이들을.”
그를 지키고자 했던 건 나인데. 그도 나와 똑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던 거다. 서로의 마음과 생각이 통하는 상대. 나 역시 에쉬만이 나의 전부라는 것을 확실히 깨닫게 된다.
“주군. 잡아왔습니다.”
그때 또 문이 아닌 창문으로 소리 소문 없이 들어온 카시안의 목소리에 흠칫 놀랐다. 저건 진짜 암살에 특화된 움직임 아니냐고.
그러나 에쉬는 예상하고 있었다는 듯 흐뭇하게 웃고 있던 표정 그대로 카시안을 쳐다보았다. 나 역시 시선을 들어 올려, 카시안과 그의 어깨에 짐처럼 얹어진 사람을 보고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사람? 납치?!’
이제 하다 하다 납치까지 했나 싶어 어처구니가 없었는데 자세히 보니 익숙한 옷차림이었다. 왕궁 시녀 의상. 게다가 검은 머리카락.
“어? 아까 그 시녀?”
정신을 잃었는지 축 늘어진 여자는 분명 아까 그 왕궁 시녀였다. 카시안이 수상하게 여겼던 그 여자. 에쉬가 카시안에게 저 시녀를 데려오라고 시킨 건가? 그래도 그렇지, 왕궁 소속의 시녀를 기절시켜서 납치해오는 건 보통 문제가 아닐 건데.
나는 걱정스럽게 에쉬를 바라보았지만 에쉬는 별 대수로운 일이 아니라는 듯 고개를 끄덕거린다.
“들키진 않았겠지?”
“나 잡아줍쇼, 하고 혼자 있더군요. 깨울까요?”
“입부터 막아. 소리라도 지르면 곤란하니까.”
두 사람 대화만 들어도 오싹하다. 카시안도 카시안이지만, 에쉬가 웃는 얼굴로 저렇게 말하는 건 조금 낯설었다. 괜히 마른침이 꼴깍 넘어가 버릴 정도로.
에쉬가 자리에서 일어났고 나도 덩달아 주춤하면서 일어나 나란히 섰다. 그러자 카시안이 어깨에 들춰 멘 시녀를 아까 에쉬가 앉아 있던 소파에 던지듯 놓아버린다. 그러자 시녀가 그 충격으로 앓는 소리를 내더니 눈꺼풀을 파르르 떤다.
“으…….”
카시안이 주머니에서 손수건을 꺼내 시녀의 입속에 밀어 넣으려고 하길래 재빨리 저지하고 작게 읊조렸다.
“거기까지요. 어차피 소리를 내지른다면 내 선에서 해결할 수 있어요. 인간적으로 해결해요, 우리.”
저 시녀가 무슨 잘못을 저지르고 있는지는 몰라도, 확실하게 죄가 밝혀지기 전까지는 험하게 다루고 싶지 않았다. 저렇게 기절한 것도 분명 급소를 공격당해서일 거다.
끙끙거리던 여자의 눈꺼풀이 파르르 떨리면서 천천히 움직였다.
“정신이 드나요? 여기는 저희 마르엘 백작저예요.”
“……마르엘, 백작저?”
“당신이 방금 왕궁 시녀들과 함께 온 곳 말이에요.”
아직 정신이 혼미한지 몇 번이나 두 눈을 꾹 감았다가 뜬다. 그러다가 초점을 맞춘 진한 고동색의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리다가 하필 카시안을 제일 먼저 발견하더니 당장 비명이라도 지를 것처럼 안색이 창백해졌다.
해서 나는 재빨리 말을 덧붙였다.
“놀라지 마요. 당신을 해칠 생각은 없어요. 협조만 잘해준다면 저들이 당신에게 해코지를 하지 못하도록 도와줄 수 있고요.”
그제야 내 목소리에 반응하여 고개를 휙 돌려 나와 눈을 맞춘다. 그러더니 이번에는 불안하다는 듯 초조한 기색을 내비치며 입술을 살짝 말아 물었다.
무언가 숨기고 있는 것이 있음을 증명하는 표정이었다.
“먼저 묻겠는데, 이 두 사람하고 아는 사이인가요?”
“…….”
“전혀 모르는 사이로 보이진 않던데. 혹시, 그쪽도 제국에서 왔나요?”
시녀의 눈동자가 잘게 흔들리는 걸로 봐서 정곡을 찌른 듯했다. 그런데 아까 재단사가 분명 왕비인 첫째 언니가 추천해준 시녀라고 하지 않았어? 그 말이 사실일까? 첫째 언니의 시녀 중에 검은 머리카락은 없었던 것이 확실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