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9화
하여간 은근히 귀여운 구석이 있는 남자여서 더 사랑스럽게 느껴졌다. 마음을 다쳐 슬픈 눈빛을 한 그를 바라보는 내 가슴이 덩달아 아프기도 했고.
[선황께서 당신에게 황위를 넘겨주고 싶어 하셨다는 이야기는 들었어요. 그것이 선황께서 당신을 크게 애정하고 있었다는 증거겠지요. 그리고 당신은 목숨을 걸고 그 자리를 되찾았으니 그것만으로도 선황께 보답한 것과 마찬가지라고 생각해요.]
[……내 아바마마께서 그리 관대하신 분일까요.]
[억울하게 돌아가셨으니 그 한을 풀어드리려면 시간이 걸리기는 하겠지만. ……왠지 제가 미움받고 있을지도 모르겠는걸요? 당신이 제 자리를 지키지 않고 방치하게 했다고 저 혼나는 거 아니에요?]
[글쎄요. 사랑하는 이를 지키지도 못하신 분께서 주접스럽게 누굴 욕하겠습니까.]
그렇게 웃고 그리워하며 오랜 시간 대화를 나누면서 알게 되었다. 그의 진심을, 또 그가 내 아버지를 통해 선황을 보고 있다는 사실도.
차라리 전처럼 자신의 정체를 모를 때의 아버지 행동이 그립다는 말도 했으니까.
그래서인지 몰라도 요즘 조금 고민되긴 했다. 그를 고작 백작인 나의 배우자로 들이는 것이 잘하는 일인지. 처음에는 그가 원하는 대로 따르고자 하였는데 그에 대한 이야기를 점차 알아갈수록 내가 실수하고 있다는 생각이 자주 들곤 하였다.
물론 이걸 에쉬에게 말하지도 표현하지도 못하지만. 그렇다고 그 위험천만한 황실에 그를 다시 돌려보내는 것도 싫고 나 역시 살얼음판을 걷는 일에 뛰어들고 싶지 않은 것이 내 욕심인지라.
“아가씨. 왕궁 전속 재단사께서 내방하셨습니다.”
“어디로 모셨지?”
“조금 더 넓은 장소가 필요하시다 하여 연회장으로 안내해드렸습니다.”
“금방 가마.”
황제가 약혼녀를 건국기념제에 초대했다는 소문이 하루아침에 수도를 들썩이게 했다는 증거로 내게 보내오는 초대장과 편지가 급격하게 증가했다.
가문을 욕보이고 있다며 나를 신랄하게 비난할 때는 언제고. 이제 와 친한 척 친근하게 구는 귀족들의 새까만 속내에 코웃음이 절로 나왔다. 이것도 은근히 사람 피곤하게 만드는 일임을 새삼 깨닫는다.
내게 온 편지들을 남에게 맡기지 않는 편이었는데 나와 에쉬만으로는 도무지 해치울 수 없는 양이라서 유모와 하녀장까지 부를 수밖에 없었다.
“나머지는 저희가 처리하겠습니다, 아가씨. 어서 연회장으로 가보세요. 귀한 손님께서 기다리시잖습니까.”
“하던 일은 마저 해야…….”
“이보다 더 중요한 일이잖습니까? 왕궁에서 오신 분들을 맞이하는 것 말입니다.”
결국 하녀장이 등 떠밀어 에쉬와 카시안을 데리고 연회장으로 향했다. 이 또한 원치 않는 일이지만, 별수 없지.
“고단해.”
계단을 터덜터덜 내려가면서 괜한 불평을 토로하자, 카시안이 한심하다는 듯 나를 흘겨보며 건방지게 투덜거렸다.
“그러게 왜 그렇게 어려운 길을 돌아가려는 겁니까? 쓸데없이. 아가씨께서 주군에게 딱 한마디만 하면 서로 좋게 해결될 문제 아닙니까? 자신의 원래 자리로 돌아가라고 말입니다.”
“……나더러 암살자가 판치는 호랑이 굴 속으로 들어가라는 거예요?”
“황후는 기본적으로 보호받을 수 있는 위치에 있습니다. 더군다나 암살이라면 제가 책임지고 보호해드릴 수 있지요. 원하신다면 그들의 뼈와 살을 깔끔하게 발라서 보여드릴 수도 있습니다만.”
“그렇게 대단한 사람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에쉬는 그 자리가 전혀 안전하다고 판단하지 않은 것 같은데요.”
카시안의 검술 실력이 출중하다는 건 알겠다. 보통 사람에 비해 공기 중의 흐름과 변화에 민감하게 반응하기도 하고, 우락부락한 덩치임에도 저런 스피드가 나올 수 있나 싶을 정도로 빠르기도 하고. 청력도 무척이나 밝은 편이고.
못 믿을 상대는 아니지만 카시안은 한 명 뿐이고, 나보다는 에쉬가 더 중요하게 지켜야 할 상대일 것이다. 무엇보다 아무리 뛰어난 능력을 가진 이라 할지라도 악을 품은 사람이 내 음식에 독을 탄 것까지 알아내지는 못할 것이고. 이미 선황과 2황자가 독살당해 사망하였으니, 아무리 치밀하게 보호한다 해도 독을 구별할 수 있는 눈을 가진 건 아닐 테지.
만약 제국에 피바람이 불지 않은 채로 에쉬가 황위에 올랐다면, 그래서 내게 구혼서를 보내왔다면 결과적으로 운명에 순응했을까?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아가씨. 왕궁 전속 재단사 메비앙이라고 합니다. 연회용 드레스를 준비하라는 왕비 전하의 명을 받고 방문하였습니다.”
복잡한 생각을 뒤로하고 연회장에 들어서자, 열 명이 넘는 왕궁 시녀들과 함께 재단사라는 이가 내게 정중히 인사를 건넸다. 한쪽으로 줄지어놓은 휘황찬란한 드레스 수십 벌과 기다란 테이블 위에 펼쳐놓은 색색별의 원단 등등. 마치 의상실을 방불케 할 정도로 모든 준비를 완벽하게 마친 채였다.
그걸 보니 이제야 좀 실감이 나기도 하고.
“일단 치수를 재야 하니 남성분들은 잠시 자리를 비워주십시오.”
치수를 재려면 얇은 속옷을 제외하고는 다 벗어야 한다. 해서 에쉬와 카시안이 자리를 피해주어야 하는데 왕궁 시녀들을 쭉 훑어보던 카시안의 검붉은 눈동자에 서서히 웃음기가 스며들고 있었다.
“카시안. 무슨 문제라도 있나요?”
느낌이 좋지 않다. 늘 무덤덤하게 세상만사 귀찮은 표정을 짓던 그가 저렇게 웃는 것이 꼭 재미있는 장난감을 발견한 어린아이 같아서.
“흐음……. 아닙니다. 그럼 잠시 물러가 있겠습니다. 가시지요, 주군.”
에쉬와 함께 연회장을 벗어나는 카시안의 시선이 누굴 향했는지 내 눈으로 똑똑히 보았다. 재단사와 함께 온 왕궁 시녀 중 어떻게든 내 시선을 피하려고 노력하는 검은 머리카락의 여자. 나와 같은 머리 색인 것도 눈에 띄는데 다른 시녀들과 다르게 소극적으로 움직이며 내 눈치를 보고 있어서 더욱더 수상했다.
카시안은 저 여자에게서 무엇을 본 걸까?
“드레스 색상은 아가씨의 눈동자 색에 맞추어서 녹색계열로 진행하자는 황제 폐하의 명이 있었습니다.”
“……드레스도 색을 맞추는 겁니까?”
“예. 왕비 전하께서도 아가씨께 그리 전달하라 명하셨습니다.”
약혼식을 진행한 것도 아닌데 드레스 색을 맞추라니. 조금 불쾌해져서 나도 모르게 미간이 절로 좁아지고 말았다.
“어쩔 수 없지요. 그보다, 여기 왕궁 시녀들은 전부 재단사인 당신의 소속인가요?”
“의상 담당은 세 명이고 다른 분들은 왕비 전하의 시녀들로 알고 있습니다.”
“저 검은 머리카락 저 시녀도?”
카시안이 수상하게 바라보던 그녀를 콕 집어 묻자, 시녀의 짙은 갈색 눈동자가 동요하듯 흔들렸다. 그래서 더욱더 수상해진다.
생각해보면 이상했다. 첫째 언니의 시녀라는데 왕비궁에서 검은 머리카락의 시녀를 본 기억이 없단 말이지. 그만큼 검은 머리카락이 워낙 흔하지 않은 색이라서 눈에 띄었을 텐데.
내 질문에 분위기가 술렁거리는 게 느껴진다. 아무렇지도 않게 하던 일을 하는 시녀들이 서로 눈치를 보기 시작하는데, 저들도 저 검은 머리카락의 여자와 친분이 있어 보이지는 않았다.
재단사 역시 당혹감으로 물든 표정을 애써 감추며 새로운 레이스를 집어 들어서는 내 어깨에 두르며 태연하게 대꾸하였다.
“자세한 건 모르겠으나 왕비 전하께서 제게 추천해주신 시녀분이신지라. 저 시녀님 덕분에 아가씨의 드레스 색상을 정하기가 수월하였지요. 한데 무슨 문제라도 있으십니까?”
“아닙니다. 왕국에서 보기 힘든 머리카락 색인지라. 궁금해져서 물어본 겁니다.”
재단사까지 수상해진다. 카시안이 저 시녀에게서 무엇을 보고 느꼈는지도 궁금해지고.
드레스의 소소한 디자인부터 세밀한 장식품까지 대충 고른 뒤에야 길고 길었던 왕궁 재단사와의 대면이 끝났다. 왕궁에서는 매일 이렇게 드레스를 제작하는 건가. 나는 장식의 별다른 차이점을 모르겠는데 이걸 하면 우아해 보이고 저걸 하면 귀여워 보인단다.
조금도 공감할 수 없음을 느끼면서 내가 드레스에 욕심이 없었음을 절실히 깨달았다. 워낙 관심도 없었던 분야지만.
출발할 때 입을 것과 건국기념제에 참석할 때 입을 것, 그리고 돌아올 때 입을 것과 여벌까지 한 벌. 총 네 벌의 드레스를 제작하는 건 너무 과소비가 아닌가 싶은데, 왕족들도 연회용 드레스를 두 번 입지는 않는다고 당연하게 말하니까 그저 입 다물고 얌전히 있었다.
다른 것도 아니고 황제 폐하의 약혼녀이시니 그에 준하는 채비가 필요하다고 하길래.
“그럼 잘 부탁합니다. 최대한 과한 장식은 제외해주길 바라요.”
“노력해보겠습니다.”
저 노력하겠다는 의미가 내 뜻대로 되진 않을 것이다, 라고 들리는 것 같지만 애써 무시했다. 급격하게 피곤하여 손으로 어깨를 조물조물 마사지를 하며 연회장을 벗어나려고 문을 열었는데, 마치 기다렸다는 듯 에쉬가 그 자리에 떡하니 서 있어서 순간 피로감이 훅 날아가 버렸다.
“계속 이러고 있었나요?”
“이렇게까지 오래 걸릴 일이라는 것을 예상하지 못했습니다.”
“동감이에요. 왕궁 연회에 참석하는 것만큼이나 진을 다 빼놓네요. ……그런데 카시안은요?”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 잠시 몸을 숨겼습니다. 일단 고생했으니 잠시 쉬어야겠지요? 서재에 차를 준비하라 일렀습니다.”
에쉬가 저 검은 머리카락의 시녀에 대한 뒷조사를 시켰나 보다. 해서 나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방긋 웃으며 에쉬와 함께 서재로 돌아와 편안하게 차를 음미하였다.
“드레스를 한 번에 이렇게나 많이 맞춘 적은 처음이에요. 매번 언니들이나 어머니께서 입던 드레스를 수선해 입었던 게 전부라. 새 드레스는 데뷔탕트를 치를 때 처음 맞춰보았는데.”
“슈아가 유난히 욕심이 없는 축이었군요. 누구나 남이 입었던 헌 의복보다는 새 의복을 지어 입는 것을 더 의미 있게 받아들이기는 하던데.”
“물론 새 드레스는 좋아요. 새롭고 예쁘기도 하고. 수요가 있어야 공급이 있는 법이고, 그로 인해 경제가 활성화되는 법이라 배우기도 했고. 하지만 여전히 생애 한번 입을 연회용 드레스에 큰 거금을 들여 제작하는 건 달갑지 않네요.”
나는 차를 홀짝거리면서 나와 마주 보고 앉아 있는 에쉬를 가볍게 훑어보았다. 제복이라는 것이 워낙 근사한 태를 자랑하긴 하지만, 그가 입으니 또 색달라서.
오래전에 읽었던 귀족과 기사의 사랑 이야기도 떠오르고.
그 장면을 떠올리니 나도 모르게 픽 웃음이 나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