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8화
“에쉬의 그 쌍둥이 형제라는 그 유령, 지금 어디 있는지 아나요?”
“마지막으로 제국을 떠나올 때 제국에서 본 이후로는 모릅니다. 지난번에 슈아 당신이 이곳에서 보았다고도 했으니까. 워낙 이리저리 잘 떠돌아다녀서요.”
저번에 우리 저택을 찾아온 건, 내 어머니에게 복수하기 위해서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어머니를 찾지 못하면 그 딸인 내게 해코지를 할 수도.
“담판을 지어야 할 이가 또 생겼네요. 언니에게 도움을 청해야 하나 싶고.”
“걱정 마십시오. 인간의 감정에는 무지하지만 자신의 혈육인 제게 만큼은 함부로 굴지 못합니다. 그래도 혹시 모르니 슈아에게 접근하지 못하도록 조치를 취하겠습니다.”
일반인이 마법사를 상대하는 건, 드래곤의 레어에 뛰어 들어가는 것이나 마찬가지라고 했다. 게다가 유령을 본 적 없는 내 눈에는 그의 존재가 투명인간과도 같겠지. 실체화를 하지 않는 이상.
어쩐지 조금 겁이 나는 건 어쩔 수 없었다. 평범한 방법으로는 싸울 수 없는 상대이니까.
나는 떨리는 눈으로 욕실을 다시 훑어보며 소리 없는 큰 숨을 천천히 내쉬었다. 그러자 에쉬가 내게 다가와 뒤에서 나를 조심히 끌어안으며 목덜미에 얼굴을 파묻었다.
“나로 인해 슈아 당신이 곤란해지는 것 같아서 마음이 좋지가 않습니다. 내 욕심이 당신의 소중한 가문에 피해를 끼치게 될 줄은…….”
“삶이라는 건 원래 한 치 앞도 예상할 수 없는 거라고 했어요. 당신 잘못이 아닌 것을요? 나는 괜찮아요. 다 감당할 수 있어요.”
내 목숨만큼 사랑하는 에쉬와 행복해질 수만 있다면 그 어떤 시련도 감내할 수 있다. 겁이 나는 건 그저 일차원적이자 지극히 정상인 반응일 뿐. 그렇다고 물러선다거나 포기할 마음은 조금도 없었다.
이미 각오한 일이니까.
“저택 안으로 마차가 들어오는 소리가 들립니다.”
그때 카시안이 내 귀에는 들리지도 않는 소리에 반응하여 소식을 알려주었고, 곧 집사가 손님방을 찾아와 아버지께서 돌아오셨다는 이야기를 전해주었다. 정말 귀가 밝은 사람이구나 싶어서 놀랍기도 했고.
에쉬와 함께 밖으로 나왔는데 아버지는 이미 둘째 언니와 응접실로 들어간 뒤였다. 만약 내가 꼭 있어야 하는 자리였다면 둘째 언니가 나를 불렀겠으나, 그건 아닌 것 같아서 밖을 서성거리며 언니를 기다리기만 했다.
“슈아. 들어가지 않고 여기서 뭐해?”
한참의 기다림 끝에 돌아갈 채비를 하고 저택을 나온 둘째 언니가 나를 발견하고는 한달음에 달려 나왔다. 내 옆에 함께 서 있던 에쉬와 카시안을 힐끔 쳐다보며 고민하는 듯했으나 그저 없는 사람 취급하기로 마음먹은 것 같았다.
“아버지하고 이야기는 잘 끝냈어?”
“그럭저럭. 아버지는 그래도 다 알고 계신 것 같더라. 네가 혼자서만 끙끙 앓았던 건 아닐까 걱정했는데, 둘이 의지하고 있는 것 같아서 마음이 좀 놓였어.”
“몰랐는데 아버지도 은근 팔은 안으로 굽는 편이시더라고.”
“그걸 이제 안 거야? 겉으로 보기에는 차갑게 느껴질 수도 있지만 아버지만큼 속이 따뜻한 분은 없지. 가족에 한해서지만. 티를 좀 내주면 좋을 텐데 아직도 그건 쑥스러우신 모양이야.”
그런 아버지가 그저 귀엽기만 하다는 듯 둘째 언니의 호들갑에 웃음이 절로 나왔다. 그러나 곧 다시 걱정스러운 눈빛을 하고는 나와 시선을 똑바로 맞추었다.
“내게 도움이 필요하거든 꼭 언제든지 말해. 네게는 아버지도 계시고 나 역시 무슨 일이 있어도 네 편이니까. 그런 가족이 있다는 것도 꼭 기억하고.”
그건 아마도 에쉬를 겨냥한 말일 것이다. 만일 이번 일로 에쉬와의 사이가 멀어진다 해도 혼자 힘들어하지 말라는 뜻이겠지.
무조건 내 편인 가족이 있다는 건 참으로 든든했다. 마음도 풍족해지고 여유가 생길 정도로.
“응. 고마워 언니.”
“첫째 언니는 왕국을 위해 너 하나쯤 희생시켜도 된다는 주의겠지만, 나는 어머니와 생각이 같아. 네가 하고 싶은 대로 마음껏 도전하고 싸우길 바라. 투쟁하여 얻는 것이 더 소중한 법이거든.”
“명심할게. 꼭.”
그렇게 당부를 마친 둘째 언니가 후작가의 마차에 올라 백작저를 떠났다. 해가 뉘엿뉘엿 지고 있어서 푸른 하늘에 하얗게 뜬 구름이 서서히 붉게 변하고 있었다.
“에쉬. 오늘부터 내게서 떨어지지 말아요. 절대.”
“……그럴 생각입니다.”
그가 없을 때에 또 그의 모습을 한 그 유령이 나타날 것 같아서 미연에 방지하고 싶었다. 그의 얼굴에 남아있는 상처까지 똑같이 만들어서 나타나면 홀랑 속아버릴 테니까.
대외적으로는 그를 제국에서 보내온 호위 기사라고 은근슬쩍 소문을 퍼트렸다. 내게 구혼서를 보내온 황제라는 대리인이 첫째 언니에게 에쉬와 카시안을 제국의 기사라고 지칭했다고 하니까 그 편이 오해를 사지 않을 거라 여기기도 했고.
그렇게 며칠을 보낸 이후, 왕궁에 다녀온 아버지께서 내게 황제의 인장이 찍힌 서찰을 건네주셨다.
“올해 열리는 제국의 건국기념제에 너를 초대한다는구나.”
결국 그날이 도래하고야 말았다. 내게 이런 장난을 친 황제의 대리인과 대면하게 될 날이.
나는 비장하게 그 서찰을 받아 내용을 확인하였다. 그 안에 ‘나의 소중한 약혼녀’라고 적혀 있는 문구에 눈살이 절로 찌푸려졌다.
어처구니가 없어서. 누가 약혼녀라는 거야? 약혼식을 치르지도 않았건만.
“어쩜 이렇게 미운 짓만 골라서 하시는지 모르겠네요. 진짜 황제도 아니면서.”
콧방귀를 뀌고는 투덜거리자 아버지도, 내 옆에 서 있던 에쉬도 고개를 돌린 채로 소리 없이 웃기만 했다. 물론 아버지 쪽은 행여 누가 듣기라도 할까 봐 헛기침까지 뱉어내며 주위를 경계했지만.
“공교롭게도 나는 처리해야 할 일들이 남아있는 터라 함께 가지는 못할 게다. 대신 둘째가 너와 함께 왕국을 대표하여 참석하겠다고 하니 조금은 안심이 돼.”
“둘째 언니가요?”
다른 사람도 아니고 둘째 언니라면 내게 아주 큰 아군이 생기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아마도 걱정되어 본인이 가겠다고 지원한 것일 터.
제국으로 가면 혹시라도 그 유령을 만나게 될 수도 있을 테니까.
“든든하네요. 그럼 마음 놓고 건국기념제에 참석할 준비를 해야겠어요.”
아마 제국과 모든 왕국에 황제의 약혼녀가 참석한다고 소문이 파다하게 퍼졌을 것이다. 다른 왕국들에서 우리 가문에 대한 정보를 캐내려고 부단히 노력했을 것이고.
내가 국혼을 거절하고자 들였다던 평민 남자 이야기는 제국에서 보내온 호위 기사였다는 사실로 퍼지긴 했지만, 원래 소문이라는 것이 나쁜 이야기에 더 관심이 쏠리기 마련이라. 제국민들도 나를 고운 시선으로 보진 않을 것이다.
‘아무래도 상관은 없지만. 가문의 이미지가 추락하는 건 달갑지 않다 보니.’
나는 바로 왕궁 수도에서 가장 유명한 디자이너를 물색하려고 했는데, 왕국을 대표하여 참석하는 제국의 행사라는 이유로 왕궁 전속 디자이너가 직접 내방하겠다는 내용을 전달받았다.
“아버지. 이런 일을 왕궁에서 관리하는 거예요?”
“황제 폐하께서 직접 선택하신 약혼녀이니 왕국의 체면도 있고. 그저 조용히 따르기만 하거라.”
말하면서도 에쉬의 눈치를 보는 아버지가 목을 가다듬으며 아닌 척 고개를 돌리셨다. 에쉬에게 전처럼 하고 싶은 말을 마음대로 하지 못해 유감이라는 표정이었다.
재미있게도 에쉬는 그걸 굉장히 아쉬워했다. 자신의 이야기를 잘 하지 않는 그가 언제 한번 나와 와인잔을 기울이며 이야기를 나누던 밤.
[아바마마는 너무도 냉정하고 무심한 분이셨습니다. 가까이하기 어려울 정도로 형님들과 아우들에게 정을 조금도 붙이지 않으셨지요. 아들이든 딸이든 자식에게는 관심을 주지도 않으셨습니다.]
[황제의 자리에 있었기 때문일까요?]
[그런 것도 있었겠으나, 정말 어머니를 제외한 누구에게도 살가운 태도를 보이지 않았습니다. 심지어 황후 폐하를 그저 황실에 놓인 장식품이라 여길 정도였으니까요.]
오래전 선황께서 성욕이 너무도 강하여 여자라면 아무나 침실에 끌어들였다는 소문과는 조금 달랐다. 사실 현 황태후께서 낳은 아들은 황태자가 유일하고 다른 황자들은 전부 사생아라던데. 에쉬의 어머니를 그리 사랑하였다면서 또 다른 여자들을 통해 후계를 얻은 건 조금 어불성설이라 생각하지만.
집요하게 물어볼 수가 없어서 그저 에쉬의 말을 듣기만 했다. 그날따라 옛날 생각이 많이 난다는 듯 평소에는 절대 입에 대지 않던 와인을 마시면서도 한숨을 푹푹 내쉬었기 때문이다.
[그때는 아바마마가 원망스러웠습니다. 어머니가 심적으로 힘들어하던 그 모습이 잊혀지지가 않아서. 하지만 그것이 저를 보호하기 위함이었음을, 너무 늦게 깨달았습니다.]
[……저도 그럴 때가 있기는 했어요. 아버지가 너무 무뚝뚝하여 표현을 안 하시니까, 나를 별로 좋아하지 않으신 건가 보다 하고. 어렸을 때는 그게 상처였지요.]
[백작께서도 표현을 잘 안 하시는 편이기는 하지요. 오해받기 좋은 성격이랄지. 슈아는 언제 그 오해가 풀어졌습니까?]
나는 가만히 지난날을 떠올려보았다.
[딱히 언제라고는 답할 수 없는 게, 아마 브링과 다른 영애들의 잦은 다툼을 지켜보면서 깨달았던 것 같아요. 각자 타고난 성품이라는 것이 존재한다는 것도 언니들을 통해 느끼기도 했고.]
[저는 그걸 조금 늦게 깨달았습니다. 너무 제 생각만 했던 것이 원인 아니었나 싶더군요. 그래서 아바마마께서 저를 무척이나 아끼고 귀히 여겼다는 것을, 사망하기 며칠 전에 알게 되었지요. 이미 늦어버렸지만.]
얼마나 속상했을까? 알게 되었음에도 보답할 이가 존재하지 않는다면 평생을 후회 속에서 살게 될 텐데.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그가 앉아 있는 소파의 팔걸이에 걸터앉으면서 두 팔로 그를 꼭 껴안아 주었다. 그의 부드러운 머리카락에 내 뺨을 가볍게 대고 위로하듯 엄지손가락으로 그의 볼을 살살 어루만졌다.
[울고 싶으면 얼마든지 울어요. 내 품에서.]
[그저 안타까울 뿐, 눈물을 보일 정도로 슬프진 않습니다. 말했듯 내 사랑하는 어머니를 힘들게 만든 상대임은 분명하니까요.]
그렇게 안타까운 눈빛을 하고는 마음에도 없는 소리를 한다. 그것과 별개로 선황을 매우 그리워하고 있다는 게 눈에 훤히 보이건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