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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만의 비밀스러운 꽃 (56)화 (57/113)

56화

둘째 언니의 물음에 에쉬가 눈동자를 굴려 나를 슬쩍 보고는 어깨를 으쓱거렸다.

“흠, 스치듯 보았던 것이 전부이긴 합니다.”

“맙소사!”

언니가 놀란 표정으로 안절부절못하면서 얼굴이 창백해진다. 왠지, 에쉬의 정체를 알아버린 것은 아닌가 싶어 가슴이 조마조마하다.

나는 그날 에쉬를 본 기억이 없는데.

“맞잖아요? 그날, 그…… 당시 황제 폐하께서 굉장히 예뻐하던 그 남자…… 그게 당신 아니었어요?”

“……눈썰미가 제법 좋으시군요. 그날에도 웬만해서는 사람들 눈에 띄지 않으려고 노력했었는데.”

“황족이 대체 왜 지금 여기 있는 거예요? 왜 우리 슈아에게……?”

“아시다시피 목숨이 위태로울 때에 마르엘 백작가의 마차에 올라탔고, 슈아가 저를 살려놓았습니다. 그것이 인연을 맺게 된 계기였고, 저는 황족임을 포기한 지 오래입니다.”

결국 둘째 언니에게도 들켜버리고 말았다. 끝까지 숨길 일은 아니었지만, 언니가 너무 충격을 받은 것 같아서 미안해졌다. 미리 말해두었다면 저렇게까지 경악하진 않았을 텐데.

그보다 나도 보지 못한 그날의 에쉬를 언니는 보았다니 조금 부럽긴 하다. 그때 그를 만나게 되었더라면, 지금처럼 이렇게 끌려버리고 말았을까? 당시 나를 떠올리면 거들떠도 안 보았을 것 같기도 하고.

“언니, 많이 놀랐어?”

“……너도 알고 있었구나? 저분의 정체를.”

“알게 된 지는 며칠 안 되었지. 워낙 꼭꼭 숨기고 있어서 말이야.”

허탈하게 웃으며 어떻게 자기한테 그럴 수 있냐는 눈빛을 건넨다. 하고 싶은 말은 많은데 에쉬 앞이라 차마 못하겠다는 느낌이기도 하고.

“그런데 언니는 왜 여기 들어와 있던 거야? 어머니도 여긴 위험하다고 함부로 드나들지 말라 했었는데.”

“아. 갑자기 오래전 일이 떠올랐거든. 혹시나 해서 와봤는데 공교롭게도 상황이 안 좋게 흘러가는 것 같아서 말이야.”

“뭐가?”

늘 밝기만 하던 언니의 얼굴에 그늘이 졌다. 자못 심각한 상황이라는 듯 미간이 좁아지더니 다시 고개를 돌려 뒤에 있는 커다란 고목을 흘겨보았다.

“아주 옛날에 폭주하려던 유령 하나를 이곳에 봉인해두었거든.”

“……유, 유령?”

이건 또 무슨 소리인가 싶어서 혼란스러워졌다. 유령이라니. 말로만 듣던 그 유령이라는 존재가 저 고목 아래 잠들어있었다는 거야?!

단 한 번도 직접 보지 못하여서 유령을 믿지는 않았다. 유령을 보았다는 사람들이 떠들어대면 그저 몸이 약해져 헛것을 본 것이라고 생각했었다. 아니면 겁주려고 꾸며낸 이야기이거나.

그런데 그 현실주의자인 둘째 언니의 입에서 유령이라는 단어가 나올 줄은 꿈에도 몰랐다. 더군다나 봉인. 왜 유령을 우리 백작저의 사유지인 후원 숲속에 봉인해둔 건지.

설마 언니가 나를 놀리려고 거짓말을 하는 건 아닐 텐데.

“좀 정신 나간 유령이었는데 나한테 들러붙길래. 원래는 이곳이 숲이 아니라 우리 저택의 후원이었어. 그때 봉인해두고 후원의 절반을 막아둔 거야.”

“……언니가 유령을 본 거야?”

“아, 네가 유령 이야기를 별로 좋아하는 것 같지 않아서 말 안 했었는데. 맞아. 어머니와 내가 유령을 간혹 보곤 했어. 그 유령은 좀 특이했지. 그때의 나와 비슷한 또래였거든.”

순간 등줄기를 타고 소름이 일면서 한기가 밀려왔다. 살면서 들었던 이야기 중에 가장 오싹했다. 타인도 아니고 어머니와 둘째 언니가 유령을 본다니. 그럼 진짜 유령이라는 것이 존재한다는 거잖아?

“지, 지금도 보여?”

“응. 가끔? 자주는 아니야. 유령이 사람들 사이에 쉽게 나타나진 않거든. 강제로 퇴치를 당해 영원히 사라질 수도 있어서 숨어 지내는 편이니까.”

저런 말을 저렇게 아무렇지 않게 하다니. 나는 내 눈으로 유령을 보게 된다면 그 자리에서 기절할지도 모른다.

억울하게 죽은 유령은 때때로 끔찍한 모습을 하고 나타날 때도 있다고 했다. 목이 졸려 죽은 이들은 목뼈가 부러져 목이 대롱대롱 매달려있는 모습으로 나타나기도 하고, 말에 짓밟혀 머리가 절반쯤 부스러져 죽은 이는 그때의 그 모습을 한 채로 보인다고 하였으니까.

“좀, 무섭겠다…….”

“사람 놀라게 하려고 작정한 것들은 극소수야. 물론 여기 봉인했던 그놈이 그 극소수 중 하나였지. 머리에 피도 마르지 않은 것이 나와 혼인하겠다고 매달리는데, 어처구니가 없어서.”

“혼인? 유령이?”

“그 애가 어떤 마법석을 지니고 있었는데 간혹 자신이 원할 때 실체화를 하기도 했어. 지속시간이 길지는 않았는데 그래도 충분히 위협적이었거든. 걔, 본체가 마법사였던 것으로 추정했으니까.”

들으면 들을수록 미궁 속에 빠지는 기분이다. 상상도 하지 못한 이야기에 마법사라니. 마법사는 세상에 몇 되지 않는 귀한 존재 아닌가? 마법을 부릴 줄 안다면 어느 왕국이든 모셔가려고 부단히도 애를 쓴다던데.

선택은 마법사 본인이 결정하게 되어서 웬만한 왕족만큼의 대우를 받는다고 들었다. 대부분이 제국의 마도원에 소속되어 있기는 하지만.

“지금까지 잊고 있다가 불현듯 떠올라서 부랴부랴 찾아왔는데 아무래도 봉인이 풀린 것 같구나. 그 유령의 흔적도 없는 것을 보니 이미 이곳을 벗어난 것이 분명해.”

“마법사라며. 혹시 복수하려고 우리 왕국에 해를 끼치는 건 아닐까?”

“봉인이 풀린 건 일 년쯤 되었을 거야. 그런데도 여태까지 조용한 걸 보면 그럴 생각은 없는 것 같기도 하고.”

유령은 자신의 원한이 풀리면 망자의 세계로 돌아간다. 오랜 기간 봉인되어있으면서 반성이라도 하여 이승으로 떠나길 바랄 뿐이다.

“그런데 좀 불안하네. 느낌이 영 좋질 않아.”

둔한 편인 나와 다르게 둘째 언니의 촉은 제법 잘 들어맞았다. 그리고 불안해하는 언니의 말에 대꾸한 건 우리 대화를 조용히 듣던 카시안이었다.

“대충 알겠는데요? 그 유령, 내가 아는 이인 것 같거든요.”

픽 웃는 카시안이 놀란 눈을 하고 저를 바라보는 나와 눈을 딱 마주쳤다. 기묘하게 일렁거리는 검붉은 눈동자에 웃음기가 서리면서 살벌한 기색을 띤다.

설마 카시안도 유령을 볼 줄 아는 거야?

“저도 그쪽 계열과 꽤 깊은 인연이 있어서요. 제가 마법사인 건 아니지만 마력을 보는 눈은 가지고 있어서 그런데, 그쪽 아가씨? 부인? 뭐라고 칭해야 할지는 모르겠으나 그쪽도 마법사 아닙니까?”

둘째 언니가 마법사라고?

스무 해를 살아오면서 처음 듣는 말이다. 함께 산 햇수가 얼만데, 단 한 번도 마력 같은 것을 사용하는 모습도 본 적이 없었건만. 부모님들도 그런 언질을 한 적이 없었다.

유령 이야기만큼 황당한 카시안의 말이 농담인 것 같지는 않고. 쓸데없는 말을 하는 사람은 아니니까

“언니, 저게 무슨 말이야?”

게다가 장본인인 둘째 언니의 담담한 반응이 더욱더 궁금증을 증폭시켰다.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고 카시안을 매서운 눈빛으로 마주하더니, 아주 재빠른 손놀림으로 활을 쏘는 자세를 취한다. 그러자 언니의 두 손에서 뻗어 나오는 붉은 불꽃이 활 모형으로 자리를 잡았고, 그 뾰족한 화살 끝이 카시안에게 향한다.

“어, 언니!”

“마력을 사용하지도 않았는데 그 힘을 볼 줄 아는 능력을 가진 이가 있다는 건 또 처음 듣네. 정체가 뭐지? 누구의 명을 받고 이 자리에 있는 거냐.”

그러나 카시안은 자신에게 겨눠진 화살이 조금도 두렵지 않은지 표정 하나 변하지 않았다.

“누구의 명도 받지 않습니다. 제게 명령을 내릴 수 있는 건, 저의 주군뿐이겠지요.”

“주군?”

“이분이 제 주군이십니다만.”

말과 다르게 턱짓으로 에쉬를 가리키는 건방진 태도에 둘째 언니의 미간이 더욱더 좁아졌다. 그러다가 이상함을 감지했는지 눈동자만 굴려 에쉬를 쳐다본다.

“평범한 황자는 아닌 것 같은데…… 도망자의 신세라기에는 대단한 호위 기사를 곁에 두고 있는 것이 영 수상하군요. 당신이야말로 진짜 정체가 무엇입니까?”

이것만큼은 털어놓고 싶지 않았다는 듯 에쉬가 깊은 한숨을 흘리며 내 눈치를 슬쩍 보았다. 어차피 둘째 언니에게는 비밀을 만들고 싶지 않기도 하고, 해서 내가 대신 그의 정체를 밝혀주는 것이 낫겠다고 여겼다.

“에쉬는 제국의 3황자였대. 최근 황위에 올랐다던 그 황제 폐하, 그게 에쉬야.”

순간 언니의 파란 눈동자가 크게 요동쳤다. 저만큼 경악하는 표정은 처음 보았다. 왠지 내게 폭풍 잔소리를 쏟아낼 것만 같은 눈빛이라 그저 죄인처럼 고개를 돌려 시선을 피했다.

“……예상은 했지만 정말이지, 이게 무슨 짓이랍니까? 자신의 상황에 자각이라는 것을 하기는 합니까? 황제라니, 황제라는 분께서 이리 해괴한 짓을 저지르시다니요.”

둘째 언니의 진심 어린 면박은 아무리 나라도 막아줄 수가 없었다. 사실 누구나 이 사실을 알게 되면 똑같은 소리를 할 테니까.

나도 황제의 자리에 오른 그가 나와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대리인까지 세우고 도망쳐 나왔다는 이야기를 듣고 똑같은 생각을 하기는 했으니.

해서 그냥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어깨를 바짝 모은 채 숨죽여 언니의 눈치를 살폈다. 곧 언니의 손에 생성되었던 신비로운 불화살이 순식간에 사라지면서 땅이 꺼져라 큰 한숨을 뱉어내었다.

덕분에 내 어깨는 더욱더 쪼그라들고 말았다.

“슈아.”

“으응, 언니.”

“단둘이 할 이야기가 있으니 응접실로 따라와.”

정말 화가 많이 났나 보다. 둘째 언니가 나를 향해서 저렇게 화를 내는 건 처음이었다. 첫째 언니와 크게 싸울 때만 보았던 표정이라서 주눅이 든 채로 언니를 뒤쫓아 응접실로 향했다.

가는 내내 연신 한숨을 푹푹 내쉬던 언니가 응접실 소파에 풀썩 주저앉으며 손으로 이마를 덮은 채 거친 숨을 골랐다. 분노를 가라앉히려고 노력하는 것 같은데, 아버지도 별말 없이 넘어간 일이라 내가 너무 안일하게 생각했었나 보다.

나는 조심스럽게 맞은편 소파에 앉아서는 마른침을 꼴깍 삼켰다.

“언니……. 심란하게 해서 미안해. 하지만 에쉬도 에쉬 나름의 사정이 있었어. 나도 좀 어처구니가 없긴 하지만…….”

“혹시 저 황제 폐하, 쌍둥이야?”

“……쌍둥이?”

뜬금없이 웬 쌍둥이가 나오나 싶어 어리둥절했다. 에쉬에게 형제가 있기는 해도 쌍둥이가 있다는 이야기는 들어본 적이 없는데. 현재 제국의 황제가 쌍둥이라는 소문을 들어본 적도 없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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