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5화
뱃속이 얼어붙는 기분이다. 내가 안일했다는 생각이 든다. 언니가 나를 설득하기 위해 부른 것이 아니라 기정사실로 하여 빼도 박도 못하도록 만들기 위해서 부른 것임을 너무 늦게 깨달았다.
“전하, 저는…….”
“제국의 사절이 전하기를, 네게 다른 남자가 있다 하더라도 과거의 일이 될 테니 그에 대해서 책잡을 일은 없을 거라고 하셨다. 솔직히 그저 흉포한 폭군이라 여겼으나 참으로 아량이 넓으신 분이더구나.”
그 황제도 참 웃기지. 상대가 에쉬이므로 그런 말이 가능한 것이다.
진짜 황족은 에쉬니까.
“그런 분께서 너의 부군이 된다면 나는 걱정할 것이 없어. 원한다면 각서라도 써주시겠다고 하시더라. 더는 황위를 노릴 황자는 남아있지 않고, 무슨 수를 써서라도 너를 지켜주겠다고 하여 매우 안심했고.”
“……그 말을, 믿으시는 건가요?”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네가 국혼으로 인해 완전히 황족이 된다면 쉽게 네 목숨을 위협할 이는 아무도 없을 거라고. 오히려 지금이 더 위험하다 판단해서 네게 실력 좋은 기사도 붙여두었다고 하던데.”
힐끔, 언니의 눈이 내 뒤에 서 있는 에쉬와 카시안에게 향했다. 그 말에 코웃음이 나오려는 걸 겨우 참았다. 그 대리인, 아주 건방지네. 감히 에쉬를 실력 좋은 기사 따위로 여기는 걸까?
“전하께 이런 말씀 드리기 참 조심스럽지만, 혈육이니만큼 솔직해지고 싶어요. 저 그 결혼, 안 합니다. 제겐 결혼할 상대가 따로 있어서요.”
흐뭇해하던 언니의 얼굴에 미소가 서서히 사라졌다. 정색하면 나타나는 특유의 살벌한 표정이 덧그려져 목이 바짝 말라간다. 이래서 내가 첫째 언니를 대하기가 무서운 거다. 표정으로 욕하는 게 어떤 건지 제대로 보여주고 있어서.
“그 소문을 듣기는 했었는데 믿지는 않았다. 오랫동안 너를 봐오면서 네가 그런 철딱서니 없는 짓을 저지르는 아이가 아님을 알기 때문이지. 다시 한번 말해보렴. 방금 네가 뱉은 그 말.”
“……저는 어머니의 유언에 따라 제가 사랑하는 남자와 결혼하여 가문을 이어갈 생각입니다. 황제의 구혼서보다 어머니의 유언이, 제게는 더욱더 소중하고 귀하니까요.”
“그래. 그 어머니의 유언에 대해서는 나도 들었다. 네가 어머니를 무척이나 따랐다는 것도 잘 알지.”
여전히 사나운 얼굴을 하고는 잘 우려낸 찻물을 찻잔에 담아 내 앞에 놓아주었다. 그 묘한 붉은빛 찻물을 빤히 바라보는 나를, 언니가 지그시 쳐다보며 입꼬리를 살짝 끌어올렸다.
“하지만 잘 생각해보렴. 네가 그 구혼서를 거절하면 벌어질 일들. 네가 그토록 사랑하던 어머니가 나고 자란 이 왕국이 어떠한 위기에 처하게 될지. 그게 어머니의 유언을 지키는 것보다 더 중요한지.”
유난히 마른 미소를 그리는 언니의 눈빛이 싸늘한 얼음 조각 같았다. 한낱 사람의 진심보다는 대의를 위해 희생하라고 등 떠미는 행동이 저렇게나 자연스럽다니.
오늘 확실히 느끼는 건, 가족이니만큼 어떻게든 정을 붙이고 싶어도 저 냉정한 태도에 있던 정마저 떨어진다는 거다. 이해를 해 주길 바라지도 않았지만, 적어도 왕국을 위해 좋은 결정을 내리길 바란다고 말해주었더라면 이렇게 실망스럽진 않았을 텐데.
나는 테이블 아래 떨리는 손을 꼭 맞잡으며 대수롭지 않게 웃어 보였다.
“걱정 마세요, 전하. 어머니의 유언도, 전하의 소중한 이 비엔트 왕국도 제가 지켜낼 겁니다. 걱정하지 않으셔도 돼요.”
“……무슨 의미니?”
“황제 폐하께서 보내온 구혼서, 제 선에서 해결할 수 있습니다. 저를 믿고 조금만 더 기다려주세요. 폐하께서 원하시는 건 제가 아니거든요.”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언니의 얼굴이 혼란으로 물든다. 바로 표정을 수습하고 조용히 차를 마셨으나 눈동자가 흔들리는 것을 숨기진 못하였다.
예상하지 못한 대답이기 때문일 것이다. 책임지고 내가 모든 것을 떠안겠다고 하니 무언가 믿을 만한 구석이 있는 건가 싶겠지. 내가 허투루 장담하는 성향이 아니라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을 테니.
해서 나는 그저 언니를 따라 조용히 차를 음미하였다. 꽃차라 하여 향이 좋은 줄 알았더니 딱히 내 취향은 아니었다.
“제게 내어주신 차는 잘 마셨습니다. 더 하문하실 것이 없다면 이만 일어나도 되겠습니까?”
“대체 너, 무슨 생각인지 모르겠구나. 고작 백작 영애인 네가 무슨 수로 이번 일을 해결하겠다는 건지 모르겠어. 황제 폐하와 거래라도 할 참인 게야?”
“황제 폐하와 저, 특별한 인연이 있었거든요. 지금 폐하께서는 짓궂은 장난을 치고 계시는 것이라고밖에 말씀드릴 것이 없습니다.”
“인연이 있다고? 폐하를 뵙기라도 했었다는 거니?”
“제가 황제 폐하께서 아주 소중히 여기는 분의 목숨을 구해드렸거든요.”
에쉬에 대한 이야기를 자세하게 털어놓을 수는 없어서 대충 그 정도로 둘러대고는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만일 이번 일을 제 선에서 처리하지 못한다면 국법에 의거하여 처벌을 달게 받도록 하겠습니다. 그럼 문제가 없겠지요? 제게도 단 한 번의 기회를 주십사 부탁드립니다.”
“슈아.”
“귀한 차를 내어주셔서 감읍하며, 제가 몸이 좋지 않아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각오는 했었지만 다른 것보다 에쉬에게 이런 말을 듣게 하는 것이 싫었다. 겉으로는 아무렇지 않게 행동할 수는 있어도 속은 분명 시끄러울 테니까.
나는 정중하게 예를 갖춰 인사를 하고 응접실을 벗어나 빠르게 마차에 올라탔다.
“로안트 후작저로 가자. 둘째 언니를 만나고 싶어.”
“예, 아가씨.”
달리는 마차 안에서 두 눈을 꾹 감고 등받이에 몸을 기대어 한숨을 폭 내쉬었다.
첫째 언니야 예상하던 반응이어서 놀랍지도 않지만, 둘째 언니의 생각이 궁금했다. 둘째 언니는 에쉬를 본 적도 있고 나와 그의 관계를 어느 정도 눈치를 채고 있으니 내게 좋은 해답을 줄 거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누구보다 나를 먼저 위해주던 가족이기 때문에.
그러나.
“우리 백작저에 가셨다고?”
“예. 조금 전에 향하셨는데, 뵙지 못하셨습니까?”
로안트 후작가의 집사가 둘째 언니의 행보를 전해주어 헛걸음을 하게 되었다. 그보다 백작저로 갔다니. 그냥 저택으로 돌아갈 것을 괜히 들른 것 같다.
그나저나 친정은 무슨 일로 갔을까? 방문하겠다는 편지를 받은 적이 없는데.
다시 마차에 올라 최대한 빨리 저택으로 향했다. 정말 우리 백작저에 로안트 후작가의 마차가 서 있었다. 그리고 마침 밖에 나와 있던 집사가 나를 맞이하였다.
“후작 부인께서는 어디 계시지?”
“후원으로 향하셨습니다.”
“아버지는?”
“페란 백작가에서 주최하는 모임에 참석하기 위하여 외출하셨습니다.”
집사의 설명에 고개를 끄덕거리고는 바로 후원으로 길을 잡았다. 후원은 저택의 뒤쪽 울창한 숲과 이어져 있었고, 그 안쪽은 우리 백작저의 사유지라서 출입을 금하는 철문이 세워져 있었다. 가문의 사람 이외에는 출입하지 않아 굳게 닫혀있기만 하던 철문이 오늘은 반쯤 열린 채다.
둘째 언니가 들어간 걸까? 그런데 저기에 왜 들어갔을까? 그냥 숲일 뿐인데.
“슈아. 숲 안에서 인기척이 느껴지기는 합니다.”
“확인해봐야겠어요. 혹시 모르니 주변을 경계해주세요.”
숲에는 야생동물이 살고 있어서 혼자 들어가면 위험한데. 물론 아직까지 이 높은 철문을 넘어 저택으로 들어온 짐승은 없었지만.
우리 집안사람들은 몸 쓰는 일엔 영 소질이 없어서 간단한 호신술을 배우는 것조차 오랜 시간이 걸렸다. 만약 큰 맹수라도 만나게 되면 어쩌려고 안으로 들어갔는지.
불안한 마음에 빠른 걸음으로 철문을 지나 오솔길로 진입하였다. 어머니가 여기는 절대 들어가지 말라고 당부하여서 내게는 그저 낯설기만 하다. 굽이굽이 이어진 길을 따라 주변을 둘러보는데, 굉장히 오래되어 보이는 고목 앞에 서 있는 둘째 언니가 시야에 들어왔다.
“언니!”
내게서 등을 진 채로 바닥을 바라보던 둘째 언니가 내 목소리에 반응하여 나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여전히 환한 미소를 지으며 나를 반긴다.
“이제 돌아오는 거야? 왕비 전하께서 너를 불렀다는 이야기는 들었는데. 잔소리 좀 듣고 왔겠네.”
보지 않아도 알겠다는 듯 픽 웃는 둘째 언니가 내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정말이지 꼭 어머니와 느낌이 비슷해서 본능적으로 의지하게 된달지.
“마젠티스 황제 폐하께서 꽃차를 선물해 주셨다고 하시기에 시음하고 왔어.”
“꽃차? 어땠는데?”
“내 입맛엔 별로.”
“황제 폐하께서 네 취향을 제대로 고려하진 못하셨나 보네. 마음에 품은 여성의 취향조차 파악하지 못했다니. 상당히 실망스러운걸?”
농담인지 진담인지. 짓궂은 미소를 짓는 둘째 언니의 시선이 내게서 에쉬로 옮겨간다. 가문의 기사들이 입는 제복을 차려입은 그를 보고 두 눈이 동그래졌으나 이내 가늘어지더니 의미심장한 눈빛을 담아 지그시 바라보았다.
“……왜 그래, 언니?”
“혹시 어렸을 때, 우리 왕국에 온 적이 있었나요?”
에쉬를 향한 질문에 나는 물론이고 에쉬 본인도 어리둥절해 한다. 그는 생각에 잠긴 듯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리면서 고개를 갸웃거렸다.
“어렸을 때라면 어느 때를 말씀하시는 겁니까?”
“열 살 되기 전쯤?”
“제 기억상으로 이 비엔트 왕국 땅을 처음 밟았을 때가 지금으로부터 칠 년 전쯤입니다. 그전에는 없습니다.”
“흐음, 그런가요? 왜 이렇게 낯이 익나 했더니…… 그때 뵈었던 걸까……?”
왜 갑자기 그런 질문을 하는 건지 모르겠다. 그보다 에쉬가 칠 년 전에 왕국을 방문한 적이 있었단 말인가?
칠 년 전이라면 아직 그의 아버지인 선황이 살아있을 때다. ……가만, 칠 년 전이면 내가 열네 살 때인데. 그때 분명 현 국왕 전하께서 당시 왕세자였던 시절이었고, 첫째 언니와 국혼을 치르던 해이기도 하다. 그리고 그때 기억상으로 제국에서 선황이 직접 축하를 전하기 위해 방문하셨던 걸로 안다.
그 국혼이 딱히 즐겁지도 않았을뿐더러 그 당시의 나는 지금보다 더 사람을 좋아하지 않아서 최대한 피해 다녔던 기억이 있다. 게다가 그날, 어렴풋이 아주 속상했던 일이 있었던 것 같기도 하고.
둘째 언니도 그날의 기억을 더듬는 듯 눈동자를 바쁘게 움직였다. 그러더니 무언가 생각난 듯 두 눈을 크게 뜨고는 나와 에쉬를 번갈아 쳐다본다.
“그때 우리 슈아를 보았던 건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