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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만의 비밀스러운 꽃 (54)화 (55/113)

54화

왜인지 모르게 마음이 불안해진다. 하지 않는 행동을 했을 때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는 법이라.

“파빌리엔이 당신에게, 도움을 요청하는 건 아닐까요?”

“도움?”

“가령 자신이 수습할 수 없는 일이 벌어졌다든지. 쪽지를 주고받은 적이 없다면 그게 꼭 마지막 유언 같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어서요.”

언제 죽을지 모르는 제국에 돌아가는 것만으로도 굳은 결심을 해야 할 터. 더군다나 제국에 빨리 가봐야 할 일이 생긴 거라면, 혹시 에쉬가 세운 대리인에게 무슨 문제라도?

“에쉬. 그 황제의 대리인이 위험해진 건 아니겠죠?”

“하늘이 두 쪽 나도 그럴 일은 없을 겁니다. 드래곤의 위협을 받게 된다면 또 사정이 달라지겠지만.”

“그 드래곤일 수도 있잖아요?”

“만약 그런 사건이라면 이 비엔트 왕국도 지금쯤 불바다가 되었을 겁니다.”

역병보다 더 무서운 것이 드래곤의 출몰이라고 했다. 몇백 년 전에 드래곤에 의해서 초토화되었다던 왕국이 지도에서 사라지고 말았다는 역사도 있어서 제발 긴 수면에서 깨어나지 않길 바랄 뿐이라던데.

“걱정이네요. 별다른 일이 없어야 할 텐데.”

“……그 녀석이 걱정됩니까?”

쪽지를 손으로 움켜쥐어 구기는 에쉬의 눈빛이 따끔하다. 나는 그저 배시시 웃으며 에브린을 위해서 우린 찻물을 찻잔에 따랐다.

“어쨌든 당신 남동생이고 가족이잖아요. 솔직히 아예 신경이 안 쓰이는 건 아니에요. 그럴 수도 없어요. 당신이 에브린을 걱정하는 것처럼, 나도 마찬가지예요.”

파빌리엔은 지금까지의 안락한 삶을 유지하고자 현 황제 대리인과 손잡은 거라고 했다. 그럼 적어도 목숨이 유지될 수는 있기 때문이겠지. 사람마다 삶의 이유가 다를 테니 강요할 수는 없어도, 그 위험한 곳에서 안전할 수만 있다면 좋으련만.

에쉬와 내가 동시에 한숨을 푹 내쉬자, 에브린이 팔꿈치로 나를 툭 치면서 소곤거렸다.

“아, 그래서 앞으로 진짜 어쩔 건데? 소문이 걷잡을 수 없이 더 커질 거라고.”

“당분간 어느 모임도 참석하지 않으려고.”

“이대로 괜찮겠어? 백작께서도 꽤 곤란하실 일이 잔뜩인데?”

“그런 건 신경 쓰지 말고 좋을 대로 하라 하셨으니까. 조만간 제국에서 건국기념제가 열린다고 했으니 그때까지 너도 잘 참고 기다려줘.”

사실 지금도 초대장이나 영애들에게 개인적인 편지들이 봇물처럼 쏟아지듯 들어오고 있었다. 일단 침묵은 하고 있지만 아마 내가 가만히 있으면 에브린이 표적이 될 가능성이 다분해서 걱정이다. 나 이외의 누구도 피해를 입는 건 달갑지가 않아서.

그 이후에 에브린의 걱정대로 소문은 수습할 수 없을 만큼 커졌고, 우리 가문이 왕국을 위협하는 매국노라는 말까지 나돌았다. 차마 우리 가문을 건들지는 못하고 일방적으로 에쉬에게 모든 화살이 돌아가고 있어서 국정에서도 그의 이름이 하루에도 수없이 오르내린다고.

아버지가 그저 모르쇠로 일관하고 계셔서 더 난리라던데. 그들이 에쉬의 진짜 정체를 알게 되면, 어떤 반응을 보일까?

“아가씨. 아가씨 앞으로 온 편지입니다.”

“내 앞으로 온 편지는 그냥 두라고 하지 않았…….”

수도에 머물 이유가 없어서 슬슬 본가로 돌아 가볼까 고민하며 에쉬와 함께 산책을 하고 있었는데, 집사가 내게 내민 편지의 봉인문양을 보고 말문이 턱 막혔다. 그건 왕궁에서 온 편지였다.

“……누가 보내오셨지?”

“왕비 전하께서 빠른 회신을 원한다고 하셨답니다.”

생각보다 늦긴 했지만 언젠간 벌어지리라 예상했던 일이었다. 왕국의 존폐가 걸린 문제라고 떠들어대는 귀족들이 분명 첫째 언니를 닦달했을지도 모를 일이니.

착잡한 마음으로 편지의 봉인을 조심히 뜯어 편지를 읽어 내렸다. 역시나, 하루속히 왕궁을 방문하여 차 한잔하길 바란다는 내용이었다.

“정말 수습하기 어려운 상황인가 보네요. 지금껏 첫째 언니가 내게 먼저 초대장을 보낸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는데.”

옆에서 나와 함께 편지를 살핀 에쉬가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어깨를 토닥거려주었다.

“가문에 누를 끼치는 것 같아 마음이 좋지 못합니다. 당신에게도 몹쓸 짓을 하는 것 같고.”

“어차피 벌어질 일이었어요. 나는 소문 따위 두렵지 않아요. 다만 언니들이 나 때문에 시달리고 있는 것 같아서 미안하죠.”

“왕궁은, 슈아 혼자 다녀와야겠군요. 평민은 출입할 수 없으니.”

그가 나와 정식으로 결혼하여 부부의 연을 맺었더라면 그도 당당히 왕궁을 출입할 수 있는 귀족의 신분이 될 것인데. 그 생각만 하면 그 황제의 대리인이라는 사람이 너무 미워졌다. 종이 하나로 내 행복을 앗아가는 것 같아서.

“혼자 가기 싫은데…… 어떡해요?”

“나도 혼자 보내기 싫습니다. 떨어지면 불안해져서.”

“불안해요? 뭐가 불안한데요?”

“아름다운 내 여자에게 반한 귀족이 한둘이 아니라고 들어서요. 그들에게 당신을 보이고 싶지 않은 건 순전히 내 욕심이긴 하지만. 그래도 싫습니다.”

“나도 싫어요. 에쉬 아닌 다른 남자는 관심도 없고. 또 에쉬를 보고 설레지 않을 여자가 없을 거라서 나야말로 불안한걸요?”

집사가 얼어붙은 그대로 눈동자만 데굴데굴 굴리고 있는 것도 모르는 척, 에쉬와 찰싹 달라붙어 애정 어린 눈빛을 교환했다. 보여주기 위함이 아닌 진짜 애정을 듬뿍 담아서.

그러다가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

“에쉬. 우리 같이 갈 수 있을 것 같아요.”

“……네?”

“왕궁. 같이 가요. 카시안도 함께.”

나는 싱글벙글 웃으며 첫째 언니에게 내일 오전 중으로 방문하겠다고 회신을 한 뒤, 저택 기사들에게 제공되는 제복을 두 벌 준비시켰다. 그리고 다음 날, 카시안과 에쉬를 내 호위 기사로 변장시키고 내가 탄 마차를 뒤따르도록 했다.

혹시라도 카시안과 같은 위치의 역할을 맡게 되어 불쾌해하면 어쩌나 걱정했는데, 그는 그저 나를 호위하게 되어 영광이라며 굉장히 마음에 들어 했다. 카시안과 같은 옷을 입고 나란히 말 위에 올라탄 걸 보니 확실히 카시안의 덩치가 엄청 크다는 것을 새삼 깨달았다. 미모는 우리 에쉬가 더 근사하지만.

든든한 호위 기사 둘과 함께 왕궁으로 향하니 뿌듯해진다. 카시안이 헛짓거리라도 하면 에쉬가 제어해줄 테니 걱정은 없고.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마르엘 영애.”

왕궁으로 들어선 마차가 멈추고 에쉬의 에스코트를 받아 내리자마자 이미 와있던 언니의 수석 시녀가 나를 맞이했다. 그 소문을 들었는지 전처럼 내게 살가운 미소를 보여주지 않아서 섭섭하긴 했다.

그 마음을 이해하지 못하는 건 아니지만. 수석 시녀와 함께 온 시녀 무리 역시 시선을 내리깐 채 나와 눈을 마주칠 생각도 하지 않았다.

“……안내해주렴.”

“예. 이쪽으로.”

어쩐지 조금 현실이 와 닿는 것 같기는 하다. 에브린이 걱정했던 것이 이런 분위기겠지. 지금껏 누구도 내게 이런 태도를 보인 적이 없었으니 말이다.

나는 두 손을 꼭 맞잡고 허리를 꼿꼿이 세운 채로 수석 시녀를 따라 익숙한 왕비궁으로 향했다. 그리고 응접실로 들어가 자리에 앉아서 그 거북한 분위기를 애써 무시하며 언니가 오기만을 기다렸다.

“왕비 전하께서 도착하셨습니다.”

문밖에서 들려오는 시종의 목소리에 심장이 불편하게 뛰었다. 예전에는 친근하게 느껴졌던 이들의 목소리가 조금 날카로워진 것 같다. 기분 탓이 아니라고 확신한 건, 응접실 내부를 지키고 있는 시종 시녀들의 기운이 불편하다는 듯 카시안의 좁아진 미간이 당최 펴질 생각을 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돌아가자마자 소화제부터 챙겨 먹어야겠어.’

아무것도 먹은 게 없는데 벌써 얹힌 기분이다. 곧 문이 열렸고,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언제나 그랬듯 아주 정중하게 예를 갖춰 인사를 했다.

“오셨습니까, 왕비 전하.”

“슈아. 어서 오렴. 수도에 온 지 꽤 되었다면서 먼저 나를 찾아와주지 않아 조금 섭섭했어.”

들어오자마자 빠른 걸음으로 내게 다가와 내 두 손을 꼭 잡아주는 첫째 언니가 환한 미소로 나를 맞이해주었다. 할머니를 꼭 빼닮은 외모의 첫째 언니는 굉장히 우아하고 고상한 분위기가 몸에 배어 있었다.

할머니가 공작가문의 사람이었기 때문에 왕실 교육을 받고 자랐다 들었다. 그런 할머니께 걸음마를 할 때부터 예절교육을 받았으니 오죽할까.

다행히 첫째 언니가 나를 평소와 다름없이 대하여 묵직하던 가슴이 조금은 풀어졌다.

“일찍 전하를 찾아뵈었어야 했는데, 제가 경황이 없었네요. 그간 평안하셨습니까?”

“나야 항상 별일 없지. 어서 앉아. 내가 이번에 선물 받은 꽃차가 있어서 너와 함께 마시고 싶었단다.”

인사한 미소로 의자에 착석하는 언니가 표정을 싹 굳히더니 응접실 내부에 있던 시종시녀들을 슥 둘러보았다. 그러자 알아서 줄줄이 밖으로 나갔고, 응접실에는 왕궁 기사들과 나와 언니, 그리고 나를 호위하는 에쉬와 카시안이 전부였다.

나는 에쉬가 내어주는 의자에 앉고 소리 없이 크게 숨을 들이마셨다가 내쉬었다.

“일단 전하께 죄송하다는 말씀부터 드릴게요.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은 없어요. 저 때문에 전하께서도 곤란해진 것, 사죄드려요.”

“네가 이유 없이 그런 일을 저지를 아이가 아니라는 걸 잘 안다. 널 혼내려고, 네게 사죄를 받기 위해서 너를 부른 것이 아니야. 난 정말 차를 대접하고 싶어서 입궁하라고 했던 것뿐이거든.”

내가 첫째 언니를 가깝게 생각하지 못하는 이유 중 하나가 항상 저런 식으로 마음을 편안하게 먹게 만든 뒤에 방심하면 정곡을 찔러 공격하는 성향 때문이다. 혼내기 전에 일단 타일러서 자신을 의지하게 만들어 술술 불게 하는 방식.

당하는 입장에서는 매우 달갑지 않았다. 성향이 전혀 다른 두 언니가 자주 싸운 이유기도 했고.

저 미소에 속으면 안 된다. 그렇게 마음먹고 긴장을 늦추지는 않았다.

곧 수석 시녀가 차를 준비해주었고, 언니가 직접 차를 우려 주었다.

“장미꽃차라고. 피부에 아주 좋은 효능이 담겨있다고 해. 거기에 벚꽃잎이 섞여서 굉장히 부드러운 향을 가지고 있지. 오늘 아침에 마젠티스 황제께서 보내온 선물이란다.”

느낌이 좋지 않다. 황제의 선물이라는 것을 강조하는 언니의 말투도, 내게 황제가 보낸 귀한 차를 내어주는 것도. 무엇보다 황제에 대해 거론을 하는 목소리에 호의가 가득 담겨있었다.

“이런 귀한 차를, 제가 마셔도 될지 모르겠습니다.”

“곧 황후가 될 귀한 몸이니 충분히 자격이 있다고 생각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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