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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만의 비밀스러운 꽃 (53)화 (54/113)

53화

“우와, 에쉬. 진짜 빛이 나는 거예요?”

“말했듯 카시안이 차고 있는 그 검과 계약으로 맺어진 특별한 검입니다. 이건 대대로 황제에게만 내려오는 검으로, 황제가 사용하는 진짜 인장을 이 안에 숨겨둘 수 있거든요.”

그 말을 증명하듯 보석이 쩍 갈라지며 양쪽으로 벌어졌고, 그 안에 담긴 투박한 반지가 나왔다. 에쉬는 그 반지를 꺼내 아버지 앞에 내려놓았다.

“직접 확인해보십시오. 대대로 마젠티스 황제가 사용하는 인장은 특수마법으로 가공하여 보랏빛을 띱니다. 마르지 않는 특수잉크가 담겨있어서 그대로 찍으면, 평범한 사람이 절대 위조할 수 없는 색을 띠지요.”

반지를 집어 든 아버지의 손이 파르르 떨리고 있었다. 유심히 살피는가 싶더니 갑자기 자리에서 일어나 지난번 황제에게서 온 구혼서를 찾아 들고 와서는 인장을 다시 확인해보셨다.

그리고 에쉬가 마지막으로 쐐기를 박았다.

“그 구혼서는 진짜가 될 수 없습니다. 아바마마께서 돌아가신 이후로 사용된 인장은 제 아버지와 황태자를 죽인 형님이 만들어낸 가짜거든요.”

“……그래. 보라색. 그랬었지. 4년 전, 제국의 황제가 보내왔던 공문의 인장도 늘 신비로운 보라색이었다. 그전에도.”

혼잣말처럼 중얼거리고는 구혼서를 펼쳐 테이블에 내려놓는다. 그 아래 찍힌 황제의 인장은 누가 봐도 선명한 붉은색이었다.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았는데 그런 사연이 있었군. 말하지 않았으면 전혀 눈치채지 못했을 거고.”

“과거에 황제의 인장을 사용해 거짓 문서를 보냈던 전적이 있었다 하여 마젠티스 1세께서 직접 제작에 관여하셨다지요. 대대로 황제가 될 이에게만 이 검에 대한 비밀을 구두로 보전하였습니다.”

그럼 지금 사용하는 인장은 가짜라는 것. 아마 처음 황위를 찬탈했던 2황자가 인장을 찾지 못해 새로 제작했을 가능성이 크다. 그렇다면 저 문서 역시 효력을 발휘할 수 없다는 것일 터.

잘하면 구혼서 자체를 없던 일로 만들 수 있다. 그렇게 생각하니 심장이 빠르게 뛰면서 온몸에 피가 도는 게 느껴졌다.

그러나 나와 다르게 아버지는 혼란스럽다는 듯 눈동자를 바삐 움직이고는 에쉬의 눈치를 살피기 시작했다. 그럴 만하지. 나도 처음에 그가 황제라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같은 기분이었으니.

에쉬는 이해한다는 듯 부드럽게 웃으며 다시 인장을 제자리에 넣고 쩍 갈라진 루비를 손가락으로 세 번 똑같이 건드렸다. 그러자 감쪽같이 하나로 합쳐졌다.

“백작께서 저를 어려워하실 일은 없습니다. 그저 전처럼 대해주십시오. 저는 그게 편합니다.”

“……크흠. 그럼 이 구혼서는 대체, 어떻게 된 겁니까?”

“말씀드린 대로 슈아와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서, 백작께 약속했던 것을 저버리지 않기 위해 저의 대리인을 그 자리에 앉혀두었습니다. 아마 제가 꼭 맡아서 해결해야 할 일이 있기 때문에 이런 장난을 저지른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대리인?”

“믿을만한 상대입니다.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언제는 뭐 피도 눈물도 없는 괴물이라며. 그런데 믿을만한 상대라는 건 너무 어울리지 않는 거 아닌가?

하고 싶은 말은 많았지만 그저 침묵을 유지했다. 아버지를 불안하게 만들고 싶진 않았기 때문이다.

“그럼, 당신께서 직접 이 구혼서를 무효화시키겠다는 의미입니까?”

“그럴 생각입니다. 다 정리했다고 생각했던 저의 불찰로 백작과 슈아를 혼란스럽게 만든 점, 깊이 반성하고 있습니다.”

원래 사람 일이라는 게 다 그렇긴 하지. 갑자기 치솟은 불길을 다 잡았다고 생각하지만, 어디선가 작은 불씨가 다시금 살아난다.

나는 그런 상황을 에브린에게서 많이 보았다. 그래서 에브린의 입버릇이 ‘사람 일은 뜻대로 되지 않아.’가 되어버렸고.

그때마다 내가 늘 에브린의 손을 꼭 붙잡고 하는 말이 있었다. 지금 이 자리에서, 모든 것을 자신의 탓으로 돌리는 에쉬에게도 통하길 바라면서 그의 손을 꼭 잡아주었다.

“에쉬. 모든 일이 내 뜻대로 되지 않는 것처럼, 내 뜻대로 되기 위해서는 그만한 노력이 필요한 법이에요. 과거의 일은 털어버리고 앞으로의 일에 집중하고 고민해요. 나하고 같이.”

지금껏 그가 내게 말하지 못하고 혼자 속으로만 끙끙 앓았던 것을 이제는 안다. 내가 몰랐으면 하는 부분을 알게 될까 봐 전전긍긍했던 것도.

솔직히 말해서 나는 그가 그렇게 큰 비밀을 안고 있을 줄은 몰랐다. 기껏해야 귀족의 사생아이거나 버려진 후계자 정도로만 여겼다. 황족일 거라고는 전혀 예상 못했다. 그건 소설에서나 나올 법한 일이라고 생각했으니까.

“당신이 내민 손, 절대 놓치지 않겠다고 했던 말 진심이에요. 그 어떤 일이 있어도 이 마음을 지킬 거예요.”

“슈아…….”

이 자리에 아버지가 계시지 않았더라면 당장 키스라도 퍼붓고 싶었다. 그도 마찬가지라는 듯 환희에 가득 찬 눈동자가 유난히 빛나고 있었다. 대신 내 손등에 입을 맞추고 아주 경건하게 고개를 끄덕거렸다.

“당신을 어머니께 처음 보여드리고 그 앞에서 굳게 맹세도 했습니다. 내 목숨을 다해서라도 꼭 지켜낼 거라고.”

맞잡은 손에서 강한 의지가 느껴졌다. 괜히 코끝이 찡해져서 다시 눈물이 나오려는 걸 꾹 참았다.

“나는 항상 당신과 함께 있을 거예요, 에쉬. 앞으로 계속.”

그가 피 칠갑을 하고 내게 나타났던 그날부터 운명의 수레바퀴가 굴러가기 시작한 거다. 끊어지지 않을 빨간 실이 그와 내게 연결되어 있으니, 목숨이 다하는 날까지 절대 끊어지지 않을 것이다.

그의 결심에 아버지는 꽤 흡족해하셨고, 한편으로는 에쉬의 정체 때문에 대하기가 조금 껄끄럽다는 듯 눈도 마주치지 못했다. 에쉬는 아버지를 대하는 태도가 전과 동일했지만.

그날 이후. 예상했던 일은 벌어졌다. 나와 에쉬의 관계가 사용인들 사이에 입방아로 오르기 시작했고, 그것이 다른 귀족가에도 퍼지는 건 순식간이었다.

닷새쯤 지난 이후에 브레이튼 백작저에 다녀온 에브린이 내게 꿀밤을 먹여주려는 행동을 보이며 타박을 하더라.

“으이구, 진짜. 내가 못 살아. 어머니가 물어보더라. 황제 폐하의 구혼서를 받자마자 홧김에 평민 남자 하나를 옆구리에 채워 넣은 그 미친 짓이 사실이냐고!”

마침 에쉬와 곁다리로 카시안까지 셋이 앉아서 티타임을 즐기고 있을 때여서 나는 그저 빙긋 웃으며 에브린을 맞이했다.

“어서 와서 앉기나 해. 너 다 알고 있으면서 그런다? 예상 못했던 건 아니잖아?”

“그건 그렇지만…….”

“설마 부인께 죄다 털어놓은 건 아니지?”

“얘가 날 뭘로 보고! 나 입 무거운 거 알면서?!”

입술을 삐죽 내민 에브린이 에쉬를 한번 흘겨보고는 바람이 날리도록 소파에 털썩 주저앉는다. 여전히 에쉬에게 불평불만이 많아 보이는 건, 역시 에쉬 때문에 내가 어이없는 소문에 휘말렸기 때문이겠지.

에브린이 이미 처음부터 에쉬의 정체를 알고 있었음을 고백한 건, 에쉬가 아버지께 자신의 정체에 대해서 전부 털어놓은 그 다음 날이었다.

[나 마젠티스 황제 폐하께 구혼서를 받았어.]

[……그래?]

[……구혼서 받았다니까?]

평소 같았으면 그 말을 듣고 길길이 날뛰어야 정상인데, 너무 태연하게 받아들여서 수상했다. 그래서 반나절이 넘도록 계속 추궁하니 못이기는 척 털어놓았다.

[사실 그날 파빌리엔이 와인에 취해 줄줄 불어서 알고는 있었지. 만약 누설하면 목숨이 위험할지도 모른다고 해서 입 다물고 있었던 거야. 일부러 숨긴 건 아니었다고.]

에브린이 왜 나더러 에쉬의 정체를 계속 파헤쳐보라고 했는지 이제 이해가 되었다. 에쉬가 알고 있는 만큼 자기도 다 안다는 뉘앙스를 흘렸던 이유도.

여태 나한테까지 숨긴 에브린이 얄미웠지만, 남의 비밀을 함부로 누설하지 않았던 건 칭찬할 만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항상 대부분의 사건은 입방정으로 시작되는 법이니.

“그래서 백작 부인께 뭐라고 얘기했어?”

“나도 잘 모르겠다고 답변했지. 내가 세상에서 가장 생각을 모르겠다고 여기는 사람 중 하나가 바로 우리 슈아라고. 농담 아니고 진짜야. 상황이 이해는 되는데, 대체 무슨 생각으로 그러는 거야?”

에브린이 못 들은 척 차를 음미하는 에쉬를 힐끔 쳐다보다가, 자신을 빤히 보는 카시안을 쳐다보고 어색하게 웃었다. 카시안은 여전히 흥미로운 작은 동물을 보듯 에브린에게서 시선을 놓질 않고 있었다.

솔직히 나는 지난번에 피를 뒤집어쓰고도 너무 멀쩡한 카시안의 모습을 본 이후라서 그런지, 전처럼 편한 상대는 아니게 되었다. 대하기가 약간 껄끄러워진 부분이 없지 않다. 그래서인지는 몰라도 내가 느끼기엔 에브린을 마치 맛있는 먹잇감으로 보는 것 같아서 괜히 심장이 벌렁거렸다.

괜히 티 내면 카시안이 상처받을까 봐 애써 아무렇지 않다는 듯 에브린을 향해 빙긋 웃었다.

“내가 뭐 일부러 소문낸 것도 아니고. 별생각은 없어. 그냥 파혼당할 가능성을 더 부각하게 시키기 위한 방책이랄까.”

“뭐 하러 네 이미지 깎아내리면서 그렇게까지 해? 그냥 저 남자가 자기 자리 찾아가면 해결되는 문제잖아.”

“……내가 별로 원하지 않는 방법이라. 에쉬를 맹수 우리에 등 떠밀 생각은 없어.”

이기적인 생각이라는 것, 잘 알고 있다. 하지만 다른 건 몰라도 그가 행복해질 수 있다면 무슨 짓이든 할 거다. 그의 목숨이 걸린 일이라면 더더욱.

아마 평생 암살의 그늘에서 벗어날 수 없겠지. 그가 만일 황궁으로 돌아간다면 그야말로 적진에 뛰어드는 것과 마찬가지라서.

또한 내가 그와 떨어지고 싶은 생각이 조금도 없다. 죽더라도 함께 죽는다면, 아버지께는 죄송하지만 차라리 그게 나으니까.

한참 에브린을 흥미롭게 쳐다보던 카시안이 후루룩 차를 마시더니 무언가 생각났다는 듯 품속에서 작은 쪽지 하나를 꺼내 에쉬에게 넘긴다.

“오늘 새벽에 이거 파빌리엔 님이 주군께 전해달라고 하더라고요. 아까 집사에게 받아놓고 깜박했습니다.”

“집사에게 받았다고?”

“파빌리엔 님 호위 기사 한 명이 왔다 갔었거든요. 아침 일찍.”

무슨 일이 있는 건가 싶어서 마음이 불안해진다. 에쉬 역시 떨떠름한 표정으로 쪽지를 받아 내용을 살폈다.

“……제국으로 빨리 돌아가 봐야 할 일이 생겨서 오늘 바로 출발한다는군요. 약속했던 식사를 하지 못할 것 같다고 합니다.”

“그런가요? 큰일이 있는 건 아닐지.”

“온다간다 쪽지 같은 걸 보내는 녀석이 아닌데. 별다른 내용도 적히지 않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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