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2화
대체 누가 황제인 그를 죽이려는 걸까? 대리인을 세우고 몰래 황궁을 나왔다던 에쉬를. 그럼 범인은 현재 제국의 황제 역할을 하고 있는 대리인이 에쉬가 아니라는 걸 아는 측근이지 않을까?
“그래. 어쩔 수 없군.”
결국 에쉬가 옷을 갈아입고 내 드레스와 속옷을 챙겨 입힌 뒤에 아쉬움을 뒤로하고 저택을 빠져나와야 했다. 카시안은 이미 제 할 말만 하고는 바로 사라져버려서 위치 확인도 불가능했다.
아까 왔을 때와 바깥 공기가 조금 다른 건 기분 탓일까? 어쩐지 공기 중에 피 냄새가 가득 배어있는 것 같았다.
우리는 아무 이야기도 하지 않고 말 위에 올라 그 자리를 벗어났다. 시야에서 멀어지는 고택이 참으로 외롭게 느껴져 기분이 묘하게 가라앉는다.
“에쉬.”
“네?”
“누가 당신을 노리는지 알고 있는 거예요?”
정면에서 시선을 떼지 않던 그가 나와 눈을 마주치고는 희미하게 미소를 짓는다. 굳은 표정을 억지로 풀어보려는 표정이라서 가슴이 조금 따끔거렸다.
“충성심이 대단한 녀석들이라 아직 누가 배후인지는 밝혀내지 못했습니다. 그저 의심만 하고 있을 뿐.”
“설마 파빌리엔은, 아니겠지요?”
그런 생각은 해본 적 없다는 듯 둥그렇게 뜬 눈을 빠르게 팔랑거린다. 워낙 둘 사이가 원숭이와 개처럼 사이가 너무 좋지 않아서 혹시나 하고 물어본 건데, 에쉬가 픽 웃더니 고개를 가로로 저었다.
“그 녀석은 워낙 겁도 많고, 저 없이는 혼자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갓난아이와도 같습니다. 그런 대담한 짓을 저지르겠다는 생각 자체가 머릿속에 존재하지 않을 겁니다.”
“동생을 믿어요?”
“믿는 건 아니지만 나보다 어머니를 더 사랑해서, 어머니의 유언을 져버리는 일은 절대 하지 않을 겁니다.”
그만큼 순수한 남자였나 싶다. 저번에도 형과 싸울 생각은 조금도 없다고 하긴 했었지. 에쉬를 맹목적으로 애정하던 레이니드 역시 에쉬를 해치는 일에 가담하지 않았을 거라고 믿는다.
“그럼 새 황제는요? 당신이 대리인으로 둔 사람. 나한테 구혼서도 보냈잖아요.”
“그놈이라면 암살자를 보내지 않고 직접 제 손으로 처리하고도 남을 놈이라.”
황제가 변태에 미치광이라는 건 에쉬로 인해서만 나온 소문이 아닌 게 분명하다. 대리인으로 세워진 그 사람도 에쉬보다 더하면 더했지 못하진 않겠다고 생각하니 또다시 오싹 소름이 돋아났다.
“그 대리인, 누구인지 물어봐도 돼요?”
“평범한 사람은 아닙니다. 피도 눈물도 없는 괴물이지요.”
딱 거기까지만 말하고 에쉬는 다시 말을 모는 일에 집중했다. 그래서 나도 더는 질문하지 않고 그의 가슴팍에 힘없이 늘어진 몸을 기대어 눈을 감았다.
한 가지 분명한 건, 앞으로도 에쉬와 평범한 사랑을 하는 건 불가능하다는 거다. 그가 걱정했던 것이 이런 거겠지. 자신 때문에 내가 위험에 빠지게 될까 봐.
하지만 같이 살고 같이 죽기로 했으니까. 에쉬가 먼저 자신의 손을 절대 놓지 말라고 했으니, 이제 와 그가 나를 놓고 가버리진 않겠지.
나는 그의 옷깃을 손으로 꼭 잡아 쥐며 아주 작은 목소리로 부탁했다.
“뭐든 좋으니까…… 절대 당신 손을 놓지 않을 테니까 당신도 절대 나를 포기하지 말아요. 끝까지.”
그때부터 바짝 굳어있던 그의 몸이 말랑하게 풀어지면서 다시금 여유로운 미소를 되찾았다. 내가 확신을 주지 않아서 불안해했음을 알게 되어 여전히 귀여운 남자라는 생각에 웃음이 절로 났다.
저택으로 돌아오자 현관 밖에서 초조하게 나를 기다린 유모가 길길이 날뛰었다.
“금방 오신다고 하셨잖습니까! 수도는 본가보다 더 위험한 곳이라는 것을 잊으신 건 아니시겠지요?!”
“아는 분 추모를 하고 왔어. 나도 이렇게까지 시간이 걸릴 줄은 몰랐고. 그보다 무슨 일 있어, 유모?”
아예 거짓말은 아니기도 했고, 내 몰골이 워낙 엉망이라 다행히 유모가 내 말을 믿는 것 같았다.
“아무튼 어서 들어오세요. 백작께서 찾으십니다.”
“아버지가?”
“저분과 단둘이 외출을 했다는 이야기에 길길이 날뛰시면서 당장 찾아오라고 하셨습니다. 얼마나 무서웠는지 아십니까? 백작께서 그렇게 화내시는 건 처음 보았습니다.”
유모가 눈짓으로 에쉬를 가리키며 가슴이 떨린다는 듯 손바닥으로 쓸어내린다.
저택이 한바탕 뒤집어지긴 했나보다. 구혼서가 도착한 이때에, 그것도 야밤에 남자와 단둘이 외출을 했으니 아버지 입장에서는 걱정하실만하지. 하지만 이 찝찝한 느낌을 안고 아버지를 뵙기가 조금 그런데.
에쉬의 도움으로 말에서 내린 뒤에 그를 힐끔 쳐다보자, 사용인에게 말고삐를 건네고 나와 나란히 서서 내 손을 꼭 쥐었다.
“가시지요, 슈아. 그렇지 않아도 백작께 드릴 말씀도 있는데 잘 되었습니다.”
“……아버지한테 할 말이 있는 건 그렇다 치는데. 그 전에 나한테도 먼저 상의 좀 하고 말하면 안 돼요?”
그가 대략 어떤 말을 할지 예상은 하고 있지만, 나만 빼놓고 아버지하고 둘이서만 의기투합하는 것 같아서 영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의 모든 것을 내가 먼저 알고 싶은 욕심이 있다는 것을 모르는 걸까?
뾰로통한 나를 보고 그저 기분 좋게 웃기만 하는 그가 고개를 숙여 내 귓가에 대고 작게 속삭였다.
“백작께서도 우리의 관계가 불안하게 느껴지지 않겠습니까? 아버지로서 딸의 미래가 흔들리면 그만큼 속상한 건 없을 테지요. 그래서 내가 당신을 포기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못 박아둘 생각입니다.”
“좋네요. 아주 좋은 생각이라고 생각해요. 그런 거라면 나도 옆에서 힘을 보태겠어요.”
그제야 나는 아주 만족스럽게 미소를 지으며 그의 에스코트를 받으며 당당하게 저택 안으로 들어섰다.
에쉬와 함께 2층 계단으로 올라가는 우리의 모습을 보는 사용인들의 표정이 참으로 가관이다. 아마 내일 아침이면 에쉬에 대한 소문이 걷잡을 수 없이 퍼지겠지. 그렇지 않아도 낯선 남자가 나와 함께 와서 저택에 머무는 것을 의아해하던데.
차라리 이게 나을 수도 있지. 구혼서에 대한 소문이 퍼진다 해도 내게 연인이 따로 있었다는 사실이 드러나면 제국 귀족들이 먼저 반대를 표할 수도 있을 거다.
황후의 자리에 오르려면 일단 무조건 순결해야 하니까.
여차하면 에쉬와의 관계도 숨기지 않을 것이다. 우리의 사랑을 무기로 쓰는 건 달갑지 않지만.
“이제 오십니까, 아가씨?”
복도에서 나를 발견한 집사가 황급히 내게 달려와 묵례를 한다. 평소와 다르게 진땀을 빼고 있는 걸 보니 아버지께서 단단히 화가 나신 것 같았다.
“아버지는?”
“서재에 계십니다.”
“그래. 일단 집사는 물러가고 2층에 아무도 얼씬거리지 못하게 해줘.”
“예, 아가씨.”
집사가 아래로 내려가는 것을 확인하고 나서야 나는 호흡을 고르고 비장한 얼굴로 아버지가 계신 서재 문 앞에서 노크를 했다. 대답이 있을 줄 알았는데 갑자기 문이 벌컥 열리면서 아버지가 나타나 깜짝 놀랐다.
“……이제 들어오는 거냐.”
“네. 저를 찾으신다고 해서 바로 올라오는 길이에요.”
“들어오너라.”
내 옆에 에쉬가 당당히 서 있어서 표정 관리를 하시는 게 눈에 다 보인다. 사실 문이 열리자마자 보인 아버지의 얼굴에서 모두 드러났었다. 옛날부터 아버지가 우리 세 자매를 앉혀놓고 항상 당부하시던 말씀이, 남자는 짐승이라 절대 믿으면 안 된다는 거였으니까.
아마 이 상황을 예상해보자면, 유모에게 내 행방을 묻고 나와 에쉬가 단둘이서 자주 외출을 했었다는 사실을 들어서 단단히 화가 나신 것이 분명하다. 아주 잠깐, 에쉬를 쳐다보는 눈빛이 매서웠으니.
나는 에쉬의 손을 꽉 잡고 그와 시선을 주고받은 뒤에 서재 안으로 들어갔다. 어두운 밤인 만큼 조금 어둑한 분위기에 침묵이 이어져서 더 긴장이 되었다.
아버지가 앉으신 소파의 맞은편 자리에 나와 에쉬가 앉았고, 아버지께서 먼저 말을 꺼낼 때까지 얌전하게 기다렸다. 그런 우리를 샅샅이 살피시는 아버지의 눈빛이 따끔하긴 했다.
“밤중에 어딜 다녀온 길인지 설명해봐라.”
역시, 내 생각이 맞았다. 오래전 언니들에게도 결혼이 확정되기도 전에 배우자든 배우자가 아니든 깊은 관계를 맺지 말라던 아버지의 충고가 떠올라 양심이 콕콕 찔렸다. 지난번 수도로 가실 때에도 에쉬를 경계하였으니까.
제발 얼굴이 빨갛게 변하지 않았길 바라면서 최대한 태연하게 대답했다.
“에쉬의 돌아가신 어머니 유골함을 모셔둔 곳이 왕국에 있다고 들어서요. 함께 다녀오는 길입니다.”
“제국에서 왔다 하지 않았나? 네 어머니의 유해가 왜 이곳에 있는 거지?”
아버지는 에쉬가 제국 사람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던 걸까? 에쉬도 당황한 기색 없이 아버지의 물음에 차분히 답을 건넸다.
“사실 제 어머니가 비엔트 왕국인이었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그에 관해서 백작께 드릴 말씀이 있어서 슈아와 함께 온 겁니다.”
“그래. 편안하게 말해보도록.”
“저, 슈아와의 결혼, 포기 못합니다.”
뜬금없이 과정은 생략하고 결론만 뱉어내는 그를, 나도 아버지도 놀란 눈을 하고 쳐다보기만 했다. 난데없이 뒤통수를 한 대 가격당한 기분이었다. 그의 진심을 재차 확인하는 것은 좋았지만, 아버지가 얼마나 어이없게 느끼실지.
“……우리 슈아에게 제국의 황제께서 구혼서를 보내왔다는 이야기를 듣지 않았는가.”
“백작께서는 당신의 따님이 황후가 되길 바라십니까?”
아버지의 표정이 너무 적나라해서 내가 더 민망하다. 대체 이 미친 사람이 무슨 망발을 지껄이는 건지 모르겠다는 표정이라서.
나는 그저 입을 꾹 다물고 두 사람의 대화에 끼어들지 않았다. 에쉬가 아버지께도 자신의 비밀을 전부 털어놓으려는 의도가 다분했으니까.
그리고 내 생각은 정확히 맞아떨어졌다.
“사실, 최근 마젠티스 제국의 황제로 즉위한 마젠티스 8세가 바로 접니다. 아바마마의 유언을 받들어 황위를 쟁취했고, 또 제 목숨을 살려준 슈아와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돌아왔던 겁니다.”
“……농담이라면 재미없네.”
에쉬는 자신의 말을 믿어주지 않을 거라고 예상했다는 듯 허리춤에 찬 검을 풀어 테이블 위에 내려놓았다. 그리고 손잡이의 보석 중 붉은색을 띠는 루비를 톡, 톡, 톡 세 번 두드렸다. 나 역시 처음 보는 상황이라 그 루비에 집중을 했고, 그 보석이 점점 붉은 빛을 뿜어내는 신기한 장면을 목격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