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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만의 비밀스러운 꽃 (50)화 (51/113)

50화

어느 정도 마음이 정리되고 나니 그제야 주변이 눈에 들어왔다. 여기가 그의 어머니의 생가라고 했던가.

반역 누명을 써서 가문이 풍비박산 나버린 그때, 유일하게 살아남았다던 손녀딸은 아직 열 살도 채 되지 않았다고 들었다. 그 어린아이가 가족을 잃고 이곳에서 숨어 지내면서 얼마나 많은 상처를 받았을까.

“에쉬.”

“네?”

“……혹시 내가 당신 이름 불렀다고 목이 간당간당한 건 아니겠죠?”

그의 이름을 자연스럽게 뱉다가 문득 걱정이 되어 손으로 목을 감싸면서 물었다. 그러자 아까보다 조금 서늘하게 식어버린 눈빛의 그가 심드렁하게 대답한다.

“이제 와서? 감히 당신 목에 칼을 들이미는 간 큰 인간이 있을까. 그 전에 내가 가만두지 않습니다.”

이렇게 정색하는 그의 살벌한 기운을 가까이에서 느끼니까 알겠다. 제국에서의 그가 어떤 모습이었을지. 소문이 완전한 거짓은 아니었다는 것도.

조금 뭐, 부풀려진 내용도 있을 것이고. 여성편력이라던가, 양성애자라는 거짓소문 말이다.

“흠, 알겠어요. 그보다 에쉬의 어머니는, 어떤 분이셨어요?”

그는 대답 대신 나를 빤히 내려다보았다. 왜 그러나 싶어서 그의 눈치를 살피는데, 허리를 감고 있던 팔을 내리고 대신 내 손을 잡는다.

“온 김에 어머니께 인사를 드려야겠군요. 어머니께서 그토록 궁금해하던 어여쁜 나의 부인을 소개해야 하니.”

부인이라고 하니까 느낌이 또 묘하다. 그에게서 처음 들어보는 단어이기도 하고 어쩐지 심장이 간질거리는 기분 좋은 느낌이어서.

“당신 어머니 뵙기 전에 단장을 제대로 갖췄어야 했는데. 너무 단출해서 좀 민망하네요.”

“의복을 갖추는 건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 마음이 중요하지요. 당신이 나를 사랑하는 마음을 담은 진심.”

코끝에 살짝 입을 맞추는 그가 나를 데리고 고택 안으로 들어갔다. 묵직한 정문이 부드럽게 열렸고, 내부는 제법 깨끗해 보였다. 사람이 살지 않는 것을 증명하듯 천장 군데군데 거미줄이 있기는 했지만.

“관리를 하고는 있나요?”

“일 년에 네 번 정도. 관리해주는 사람은 따로 있고. 여기가 어머니의 앞으로 남아있는 하나뿐인 가문의 재산이라 하였습니다. 도망 나올 때 당신의 어머니께서 손에 쥐어준 토지문서가 이곳이라고요.”

그가 자연스럽게 나를 2층으로 안내했고, 그의 걸음에는 망설임이 없었다. 마치 이 고택을 잘 알고 있다는 듯.

“그럼 당신이 우리 왕국에서 머물고 있을 때 여기에서 살았던 건가요?”

“아닙니다. 그들이 암살자를 풀었을 때 가장 먼저 찾아온 곳이 여기라는 것을 알아서. 그저 가끔 어머니께 인사를 드리러 찾아오기만 했었습니다.”

“……황궁에서의 삶이, 많이 좋지 않았나요?”

“뭐, 아버지가 싸질러놓은 자식들이 워낙 많아서. 약육강식의 세계를 뼈저리게 느낄 수 있는 곳이라고 하면 설명이 될지 모르겠군요.”

예전에도 그는 아버지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고 했다. 선황에 대한 소문이 사실이라면, 사랑하는 그의 어머니 말고도 수많은 여자와 관계를 맺어 자식을 줄줄이 낳았다는 뜻이다.

왜 그랬을까? 선후가 정부로 남아있는 것을 인정해줄 테니 선황이 자신의 침실을 찾게끔 도와달라고 했을 정도면 꽤 지조 있는 남자였을 텐데.

궁금하긴 하지만 쉽게 물어볼 수 없는 사연이라 그냥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그의 안내에 따라 2층의 어두운 복도를 지나 어느 방 안으로 들어갔다.

“여기가 어머니의 유골함을 모셔둔 곳입니다.”

아주 평범한 방이었다. 오래 되어 낡은 커튼을 비롯해 가구와 장식장들도 전부 백 년 전에 유행했을 법한 디자인이다. 꽤 오래 사람이 살지 않은 별장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었다.

밝은 달빛이 새어 들어오는 아치형의 창문이 정면으로 두 개가 보였고, 그 사이에 놓인 넓은 테이블 위로 평범한 유골함과 작은 명패가 있었다.

“혼자, 계시는 건가요?”

“아버지의 곁에 묻어드리고 싶었지만 황후가 아닌 정부는 황족이 될 수 없다며 반대가 거세더군요. 결국 그 구닥다리 제국법에 따라 본국에 모시게 되었지요.”

“……외로우시겠네요. 많이.”

살아서도 당신의 남자가 될 수 없었는데, 죽어서도 함께할 수 없다면 그것만큼 가슴 아픈 일이 또 있을까. 어쩐지 내가 다 가슴이 아파서 괜히 울컥했다.

‘나라도…… 편히 눈을 감지 못할 것 같아.’

눈시울이 달아오르면서 촉촉하게 젖은 눈꺼풀을 빠르게 팔랑거리며 애써 꾹 참았다. 그러자 그가 내 뺨을 두 손으로 감싸 들어서는 내 표정을 확인하고 입꼬리를 씰룩거렸다.

“슈아. 우는 겁니까?”

그렇지 않아도 요동치는 감정을 참으려고 노력하는 중인데. 그렇게 말하면 겨우 들어간 눈물이 다시 나온단 말이다.

코끝이 시큰거리면서 내 의지를 배반하고 삐져나온 커다란 눈물 한 방울이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정말 울 줄은 몰랐다는 듯 에쉬의 얼굴에 당혹감이 서리면서 재빨리 젖은 뺨을 손가락으로 닦아내 주었다.

“우리가 처음 만났을 때도, 당신은 눈이 새빨갛게 부을 만큼 울고 있었지요. 그 모습을 기억하고 있는데…… 그 얼굴이 겹쳐질 때마다 내 마음이 꽤 아팠습니다.”

“……당신도, 온통 피로 적셔져 괴로워하던 그 모습 보는 거. 내가 얼마나 가슴을 졸였는지 알아요? 어머니도 갑작스럽게 돌아가셨는데, 그때 당신이 살아남지 못했으면 정말…… 어떻게 살아갔을지…….”

지금껏 그에게 이런 일로 투정을 부려본 적이 없었다. 그의 비밀을 알기 전까지만 해도 그가 이만큼 아픈 기억을 가지고 있을 거라고는 상상하지 못했으니까.

이런 마음의 상처를 혼자만 안고, 내게는 꼭꼭 숨긴 그가 너무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끝까지 숨길 생각은 없어 보였지만. 그래도…….

자꾸만 울적해지는 마음을 참지 못하고 그의 품에 답삭 안겼다. 이곳이 그의 어머니를 모신 장소라는 것도 까맣게 잊은 채.

“나는 바라는 거 없어요. 에쉬 당신이 다치지만 않고 건강하게 살아주는 거, 그거면 돼요.”

“꼭 아끼는 자식에게 하는 말과 똑같군요. 내 어머니께서도 그런 말을 종종 하셨습니다. 끝까지 무사히 잘 살아남아 당신의 처음이자 마지막 소원을 이뤄주면 다른 건 아무래도 좋다고 하셨지요.”

세상 모든 어머니의 마음은 다 비슷하다는 것을 느낀다. 그래도 그가 어머니께 사랑받고 자랐다는 사실에 안심이 되었다. 늘 살해의 위협을 받는 자식을 바라보며 얼마나 전전긍긍하셨을까.

“사랑하는 사람이 무탈하길 바라는 건 누구나 마찬가지예요. 아주 당연한 거라고요.”

“인정합니다. 그럼 어머니께 인사도 드렸으니 우리가 얼마나 사랑하는 사이인지 보여드릴 일만 남았군요.”

나를 똑바로 바라보는 에쉬를 동그랗게 뜬 눈으로 바라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보여드릴 일이요?”

촉촉한 눈가를 손가락으로 닦아내며 그를 올려보다가 그의 생각을 읽어버리고 말았다. 시커먼 속내가 고스란히 담긴 그의 눈빛에 심장이 화끈거리고 아랫배가 저릿해진다.

단둘만의 외출이니 당연히 야한 분위기로 흘러도 이상할 건 없다고 여겼다. 다만 장소가 장소이니만큼 그런 생각을 아예 하지 못했었는데. 보여드리겠다는 건 지금 여기에서 일을 치르겠다는 말 아닌가.

따지고 보면 여기가 이제 그의 소유지나 마찬가지다. 우리 가문의 사유지에서도 한 짓을 여기라고 못할 것도 없지. 다만 지금 여기는 그의 어머니께서 잠들어계신 곳이다.

나는 그저 눈만 데굴데굴 굴리며 수줍게 뺨을 붉혔다.

“여기는 좀…….”

“여기가 어때서요? 누군가에게 들킬 걱정을 하지 않아도 되는 곳이니 걱정할 것도 없지 않습니까? 이런 시간을 바라서 속바지도 입지 않고 나온 게 아니었습니까?”

“아, 알고 있었어요?”

허리를 감싸고 있는 그의 손이 옆구리를 타고 내려가 골반을 움켜쥐어 흠칫 놀랐다. 속옷과 얇은 치맛자락이 전부라 그의 온기가 고스란히 느껴지는 것 같아서 목구멍이 바짝 말라왔다.

“말에 오를 때부터 알았습니다. 덕분에 내 중심이 도무지 가라앉을 생각을 하지 않고 있어서 굉장히 힘들었는데. 솔직히 말하자면 당신이 눈물을 보이는 순간에도…… 위험했단 말입니다.”

요야한 미소를 그리는 에쉬의 얼굴에 은은한 달빛이 드리워져 묘한 분위기를 일궈냈다. 항상 금욕적인 느낌의 그가 색정에 젖어 돌변할 때는 언제 봐도 너무나 매력적이다. 평소의 그도 좋지만, 이렇듯 나를 간절히 원할 때면 내가 그만큼 매력적인 여자가 된 것 같아서 크게 설레어버린다.

하지만 역시 장소가 문제다.

“여기 말고…… 다른, 방에서요. 당신 어머니께 너무 실례라서…….”

어렵게 장소 변경을 요청하자, 그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내 뺨에 입을 맞췄다. 아마도 내가 거절할까 봐 마음을 졸였던 모양이다.

“그럼 이쪽으로.”

상기된 표정의 그가 내 손을 잡고 그 방에서 빠져나갔다. 나는 다시 그의 어머니 유골함을 향해 묵례를 하고 속으로 빌었다.

‘부디 당신의 귀한 아들을 끝까지 지켜주세요.’

그 간절한 기도를 제발 들어주시길 바라면서 그의 뒤를 쫓았다. 어두컴컴한 복도의 안쪽으로 거침없이 들어선 그가 조금 떨어진 곳의 방문을 열어 그 안으로 나를 인도했다.

“여기는 생전에 어머니께서 머물던 방이라고 들었습니다. 어렸을 때 어머니께서 이 집의 구조를 직접 그려 일일이 알려주셨거든요.”

그의 말처럼 그 방은 꽤 신분이 높은 이들이 사용한 흔적이 고스란히 남겨져 있었다. 아까 보았던 방에 비해 확실히 더 화려하고 넓고 웅장했다. 저택의 전체적인 보수를 하고 관리만 조금 더 신경 쓰면 휴양을 하기 위한 별장으로 적합해 보인다.

“그래도 다른 곳보다 이곳은 특별히 신경 쓰는 것 같아 보여요. 깨끗하네요.”

“바깥 정원과 이 방만큼은 깨끗이 해달라고 부탁해놓았으니까요. 이런 상황을 염두에 둔 적은 없었으나 나의 선견지명이 아주 빛을 발했다는 생각이 듭니다.”

혹시라도 불청객이 찾아올까 봐 방문을 단단히 잠근 그가 안으로 들어와 뒤에서 나를 와락 끌어안는다. 아까보다 조금 더 가까이에서 그의 거친 숨결이 들려왔고, 나 역시 심장이 크게 뛰면서 점점 더 희열에 들떠버리고 만다.

“준비, 되었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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