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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만의 비밀스러운 꽃 (49)화 (50/113)

49화

“저, 정말……? 방금 그 말…….”

“정확히 말하자면 현재 나는 그 황위를 대리인에게 넘기고 모든 것을 청산할 생각으로 그곳에서 도망친 겁니다. 엄밀히 말해 지금은 황족도 귀족도 아닌 평민이나 마찬가지고요.”

“황족…… 파빌리엔도 황족……. 형제…… 어, 그럼 레이니드가 황녀…….”

“내가 황좌를 쟁취했던 건 원해서가 아니라 부모님의 복수를 위해서였고, 나를 위협하는 이들을 제거하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래야 당신과 안락한 새 삶을 살아갈 수 있겠다고 여겼으니까요.”

배시시 웃으며 내 머리카락을 귀 뒤로 꽂아주는 그의 손길은 언제나처럼 부드러웠다. 당혹감에 말도 제대로 나오지 않는 내가 그저 귀엽다는 듯 이마에 가볍게 입을 맞추는 행동도 평소와 다름이 없었다.

“그런데 여전히 나를 쫓는 이들이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이 삶을 유지하는 것도 어렵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당신을…… 나의 소중한 사람을 위험에 노출시킨 미안함도 있고.”

그냥 적이 많은 가문이겠거니 생각했는데. 귀족이어서가 아니라 그가 황제였기 때문에, 아직 살아있는 형제들이 그의 목숨을 노리고 있다는 뜻이다.

‘꿈은 아니겠지? 이게 꿈이라면 너무 긴 꿈을 꾸고 있는 것 같은데.’

나는 손가락으로 뺨을 살짝 꼬집어보았다.

“아.”

통증이 생생하다. 내 허리를 한 팔로 감싸 안고 있는 그의 단단한 하체와 작열하는 온기도.

“다른 사람을 통해서 알게 되는 것보다는 내가 직접 털어놓고 싶었는데. 아무래도 충격이 큰 것 같군요. 괜찮습니까, 슈아?”

그의 물음에 나는 단호하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절대 괜찮지 않았으니까.

귀족과 황족은 엄연히 큰 차이가 있다. 더군다나 그냥 황족도 아니고 여러 왕국을 발아래 두고 있는 최고의 권력자 황제.

그가 관리한다던 그 목장이 제국이었던 거구나. 카시안이 주군이라고 했던 건, 그저 주인이라 주군이 아니고 그가 황제였기 때문에.

숨겨져 있던 퍼즐 조각 하나를 찾아 끼워 맞추니 다른 퍼즐이 서서히 제자리를 찾아가기 시작했다.

2년 전에 그와 파빌리엔이 왕국에 머물렀던 건, 그 황자의 난을 피하기 위해 어머니의 조국에 숨어있던 것. 그를 반쯤 주검으로 만든 이들은 그의 형제들이 보낸 암살자들. 그동안 파빌리엔이 꺼냈던 의미심장한 말들. 간혹 에쉬에게서 보았던 비범한 카리스마.

이제야 그 모든 것이 설명된다. 그의 허리춤에 존재하는 화려한 검만으로도 충분히 의심해볼 만했는데. 내가 너무 순진하게 1차원적으로만 생각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이해할 수 없는 건, 그가 나와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복수를 하고 돌아왔다는 거다.

‘그게, 가능한 일인 거야?’

황좌라는 게 사랑을 위해서 포기할 수 있는 거였던가. 모든 것을 다 얻을 수 있는 자리인데. 아무나 가질 수도 없고 그렇다고 종이를 구겨서 버리는 것처럼 쉽게 놓을 수도 없건만.

“왜, 그런 무모한 짓을 했어요?”

“어떤 게 무모합니까?”

“황제의 자리까지 포기하고 내게 돌아온 것 말이에요. 아, 다른 뜻이 아니라…… 황제의 자리를 유지하고 지금처럼 내게 구혼서를 보내왔다면 나는 군말 없이 받아들였을 건데. 물론 황후의 자리를 원하는 건 아니고…….”

내가 지금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건지도 모르겠다. 할 말을 정리해서 차분하게 말해야 한다는 것을 아는데, 지금 내 상황이 그렇게 여유롭지 못하다 보니.

그럼에도 불구하고 에쉬는 그저 좋다는 듯 내 얼굴을 만지작거리면서 대수롭지 않게 설명했다.

“내 어머니는 나의 행복을 바라셨습니다. 황실은 나와 당신 어머니의 유언처럼 그저 행복을 바랄 수 없는 곳입니다. 그리고 당신이 그토록 소중히 여기는 가문과 영지를, 내 멋대로 져버리게 만들고 싶지 않았습니다.”

“……단지, 그거뿐이에요?”

“나는 내 사랑을 지키겠다고 마음먹었습니다. 그 사랑을 갖기 위해 모든 것을 버려야 한다면 얼마든지 그럴 생각이 있었고요.”

보통 사람이면 할 수 없는 결정인데. 그가 범상치 않은 사람이라는 걸 알았지만, 설마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

미소를 잃지 않던 그가 갑자기 울적한 표정을 지어서 흠칫 놀랐다.

“왜, 왜 그래요?”

“당신이 내게 거리감을 느끼는 것 같아서 조금 서운해지는군요. 이러려고 털어놓은 게 아닌데. 그냥 나를 당신이 알던 원래의 에쉬로 생각하면 안 되는 겁니까?”

그게 그렇게 마음처럼 쉬운 일이 아님을 알고도 저러는 거겠지. 그 역시 이해는 하지만 속상한 건 어쩔 수 없다는 듯 아랫입술을 불퉁하게 내밀며 중얼거렸다.

“날 어려워하면 굉장히 상처가 될 것 같은데. 나의 어여쁜 슈아와 오순도순 행복하게 살고 싶다는 마음이 욕심이라고는 생각 안 했습니다만.”

“……솔직히 부담스러운 건 사실이에요. 이제 호칭도 어떻게 불러야 할지 모르겠고. 당신이 숨긴 비밀을 받아들이긴 하겠지만, 그것과 별개로 상식을 따져보면…….”

“강요하는 건 아니지만 웬만하면 우리 사이에 그런 거 따지지 맙시다. 그럼 내가 한 짓이 헛짓거리가 되는 것 같잖습니까. 그저, 다 죽이면 모든 일이 잘 해결될 줄 알아서 그리했던 건데.”

그런 무시무시한 말을 너무 아무렇지도 않게 뱉어내는 것도 그가 그저 평범한 사람은 아니었다는 증거지. 나는 두 눈을 질끈 감고 떨리는 숨을 천천히 골랐다.

에쉬도 쉽게 말을 꺼내기 어려웠을 거다. 밝히지 못하고 꼭꼭 숨길 수밖에 없던 이유도 이런 내 반응 때문이었겠지. 황제를 무서워하지 않았던 것도 그가 진짜 황제이기 때문이고.

게다가 지난번, 에브린과 파빌리엔을 이어주려고 했을 때 그가 했던 말이 기억났다. 나의 소중한 친구가 그 위험천만한 곳에서 목숨을 위협받는 건 원치 않는다고 했지. 파빌리엔이 황족이기 때문에 그랬던 거구나.

그리고 나 역시 그 위험한 곳에 끌어들이고 싶지 않아서 모든 것을 버린 걸 테고.

이럴 때 나는 대체 어떻게 해야 하는 걸까?

“슈아.”

심란한 고민에 빠져있는 내 귓가에 그의 달콤한 목소리가 스며들었다. 솔직히 그가 애정을 넘치도록 담아낸 목소리로 내 이름을 부르는 것만으로도 온몸이 녹아내리는 기분이긴 하다.

차라리 그의 비밀을 모르고 있었던 때가 더 좋았던 것 같아. 가끔은 모르는 게 약일 때도 있다더니, 그게 이런 경우를 두고 하는 말이겠지.

아쉬움의 한숨을 푹 내쉬며 천천히 눈을 떴는데, 그의 얼굴이 코앞에 드리워지더니 입술 위로 말랑한 감촉이 느껴졌다. 가볍게 포개진 그의 입술은 아까처럼 차갑지 않았다. 오히려 너무 뜨거워서 데일 것만 같았다.

쪽, 쪽, 부드럽게 짧은 입맞춤 이후에 내 아랫입술을 가볍게 물어 혀끝으로 간질이듯 살살 문질렀다. 찌릿한 자극에 스르르 벌어진 입술 사이로 두툼한 혀가 밀려들어와 아찔한 키스를 퍼붓는다.

“으응, 흐……!”

평소와는 조금 다르게 거친 키스였다. 관계 직전의 흥분된 상태에서 욕망에 취한 그 느낌. 전신에 퍼진 열기가 집중된 곳은 그가 내게 크나큰 기쁨을 안겨줄 수 있는 하체였다.

몸이 그를 원하고 있었다. 간질간질, 그의 손길을 기다리는 듯 애가 타는 황홀함에 젖어 들고 만다.

과연 그가 아닌 다른 남자가 내게 이런 기분을 만끽하게 해줄 수 있을까?

당장에라도 나를 집어삼킬 것처럼 격렬하게 빨고 핥던 그의 입술이 떨어져 나갔다. 아쉬움에 다시 그의 입술을 좇아 까치발을 세우다가 정신이 번쩍 들었다.

아주 만족스럽다는 듯 가지런한 치열이 드러날 만큼 환하게 웃는 그의 표정 때문에.

“키스로 드러난 당신의 감정은 참 솔직한데. 문제는 이 귀여운 머릿속에 가득한 쓸데없는 생각들이겠군요. 너무 일찍 털어놓은 건 아닌지 후회도 되고.”

커다란 손이 머리를 쓸어내려 두피가 간질거린다. 여전히 좋아. 그가 너무 사랑스러워. 그가 없이는 도저히 혼자 살아가지 못할 거라는 걸 너무 잘 알아.

그래서 조금 화가 났다. 감당할 수 없는 혼란에 빠트린 그가 얄미워서.

“당신이 내 입장 되어보면 내 기분 알 거예요. 정말 너무해. 어떻게 그런 엄청난 비밀을 숨길 수가 있어요?!”

“아마 슈아 당신도 내 입장이 되어보면 왜 숨길 수밖에 없었는지 이해할 수 있을 겁니다. 더군다나 내가 미친 변태 황제라고 소문이 자자하다는데, 내가 그 미친 변태 황제라고 당당하게 말할 수 있었겠습니까?”

“……그건 그렇지만, 그 비밀을 알기 전과 후의 차이가 너무 크잖아요. 대체 나더러 어떻게 하라고 이런…….”

“쉿. 그만.”

그가 검지를 세워 내 입술 위에 대고 꾹 눌렀다. 불만을 표출하지도 못하게 하는 행동에 더 아랫입술을 불퉁하게 내밀자, 나와 이마를 맞댄 그가 눈을 감고 숨을 길게 천천히 흘렸다.

“내가 왜 내 어머니에 대한 이야기를 꺼냈는지 아직도 모르겠습니까? 당신이 내 어머니의 전철을 밟지 않길 바라는 마음에 털어놓은 겁니다. 후회할 선택을 하지 말라는 뜻에서.”

두 손으로 내 뺨을 감싸 쥐어 어루만지는 애틋한 손길에 심장이 촉촉이 적셔지는 것 같았다.

“나는 아버지처럼 내가 사랑하는 여자를 절대 놓칠 생각이 없습니다. 황제로서 당신과의 혼인을 동의받지 못한다면 그 황제의 자리도 내겐 의미 없어요. 당신과 평생 함께할 수만 있다면 그곳이 내 자리라고 생각했습니다.”

“……선황께서는 당신께 황위를 물려주고 싶었다면서요.”

“그래서 또 다른 나에게 물려주고 왔잖습니까. 알아서 잘할 줄 알았는데 생각만큼 유능한 녀석이 아닌 것 같아서 실망스럽지만요.”

그에게 또 다른 형제가 있는 걸까? 카시안이 전해주었던 지금 황제 대리를 하고 있는 사람에게도 꽤 문제가 많아 보이는데.

“아무튼 내 비밀을 듣고도 나를 향한 당신의 진심이 변하지 않는다면, 애써 멀어지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구혼서 따위도 신경 쓰지 않아도 됩니다. 내가 해결할 문제니 당신은 그저 그 마음만 잘 지켜주길 바라요.”

“하지만…….”

“부탁입니다, 슈아. 제발.”

얼마나 간절한지. 그러지 못하겠다는 말이 차마 나오질 않았다. 그보다 나 역시 그를 포기하지 못할 것 같았고.

당장 이렇다 할 결정을 내릴 수는 없을 거다. 쉽게 답이 나올 문제도 아니고.

“……노력, 해볼게요.”

지금 여기에서 내가 할 수 있는 말은 이거뿐이다. 내게도 생각할 시간은 필요하고. 모든 일이 항상 예상했던 대로 흘러가진 않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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