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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만의 비밀스러운 꽃 (48)화 (49/113)

48화

나는 어깨를 으쓱거리며 별일 아니라는 듯 말을 이었다.

“현재 모든 모임의 주된 이야기가 마젠티스 제국에서 벌어지는 황자의 난에 관련된 거예요. 새로 즉위한 황제의 신상 정도는 귀족이라면 대부분 잘 알고 있을걸요?”

“……그, 그것이…….”

“화낼 생각은 없어요. 내게 나이를 속일만한 이유가 있었겠지요. 정체를 숨기기 위해서일 수도 있겠고, 나와 적당한 나이 차이를 원해서일 수도 있겠고?”

그가 안절부절못하며 아주 큰 죄를 지은 사람처럼 잔뜩 기가 죽어있었다. 이해는 된다. 내게 절대 거짓말을 하지 않겠다고 다짐했던 과거가 있으니까. 결혼을 하고 나서 솔직하게 털어놓으면 내가 어쩌지 못할 거라고 생각했을 수도 있고.

나는 별일 아니라는 듯 그의 단단한 팔뚝을 슬쩍 어루만지면서 빙그레 웃었다.

“뭐, 스물일곱이면 우리 첫째 언니하고 나이가 같네요. 예전에는 첫째 언니 정도면 굉장히 어른이라고 생각했는데, 다 커서 보니까 그렇게 큰 나이 차이로 느껴지지 않더라고요.”

“……미안합니다, 슈아. 일부러 속인 건 아니었습니다.”

“나이가 중요한가요? 그 정도는 귀엽게 넘어갈 수 있어요. 그거 말고 또 있다면 좀 섭섭할 것 같지만요.”

“절대, 어…… 절대 다른 거짓말을 한 적 없습니다. 수습할 수 있는 범위 밖의 거짓말은 할 생각도 하지 않았고요. 정말입니다.”

다급하게 해명하는 그의 표정이 아주 절실해 보였다. 믿어주지 않으면 당장 이 자리에서 결백을 어떻게든 증명해 보이겠다는 느낌이다. 저러다가 기겁할 일을 치를까 봐 걱정되어서 나는 고개를 힘차게 휘저으며 그의 두 손을 꼭 잡아주었다.

“지금껏 당신이 내게 얼마나 솔직했는지 잘 알아요. 그랬기 때문에 고작 나이 하나 속였다고 당신을 원망하거나 미워하진 않는다고요. 설마 내 말 믿어주지 않는 거예요?”

“……내게, 실망했을까 봐. 마음이 쓰여서 그렇습니다.”

“그 정도로 실망 안 해요. 난 당신이 내게 그 이외의 다른 거짓말을 하지 않았다는 거, 믿고 있어요. 그리고 당신이 내게 말해주지 못한 비밀들. 그렇게 겁나지도 않아요. 전부 받아들일 마음의 준비가 되었다는 뜻이에요.”

내 눈에 진실만을 담았다는 뜻으로 그를 똑바로 마주 보았다. 다행히 불안하게 흔들리던 연갈색 눈동자가 서서히 안정을 되찾아가는 게 눈에 보여서 안심이 되었다.

만족스러워서 활짝 미소를 짓는 내게 그가 고개를 숙여와 짧게 입을 맞췄다. 정말 긴장했었는지 살짝 닿은 그의 입술이 제법 차가웠다.

“저 가보고 싶은 곳이 있습니다.”

갑자기 뜬금없는 말에 조금 어리둥절했다.

“가보고 싶은 곳이요?”

“일전에 이 왕국 내에서 머물렀던 적이 있었다고 말했었지요. 그때 가끔 해가 진 밤에 찾아갔던 곳이었습니다. 내 어머니와 깊은 관계가 있는 장소이기도 하고, 당신에게 꼭 보여주고 싶습니다.”

“아……. 지금요?”

“네. 꼭 지금이어야 합니다.”

식사도 마쳤겠다, 티타임도 끝냈고 저녁 약속은 더 없으니까 외출을 해도 상관없을 거다.

“얼마나 걸리는데요?”

“마차를 타고 가면 금방입니다. 아니면 말을 타고 가도 되고.”

말이라고 하니 또 지난 숲속에서의 정사가 떠올라서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 꽤 힘들긴 했어도 그거 꽤 색다른 쾌락이긴 했지.

“그, 그럴까요? 마차보단 말이 움직이기 쉽겠어요. 그럼 일단 외출준비를 하고 내려올게요.”

설레는 마음을 안고 저택으로 돌아가 외출용 드레스 중에서 가장 단출한 것으로 갈아입고 검은 망토를 둘렀다. 바라는 건 아닌데 혹시 또 그런 분위기로 흐를지 몰라서 잠깐 고민하다가 속바지는 입지 않기로 했다.

멀쩡한 속바지가 또 너덜너덜 찢기면 아까우니까.

그러다가도 내가 어쩌다가 이런 생각까지 하게 되었나 싶어 픽 웃으며 방을 나와 1층으로 내려갔다. 현관을 나서자 외출 준비를 이미 마친 에쉬가 말을 준비해 기다리고 있었다.

“여기는 2인용 마구가 구비되어 있더군요. 안전하게 다녀올 수 있을 것 같아서 안심했습니다. 어서 타세요, 슈아.”

아주 조금 아쉬웠으나 티를 내지 않으려고 애를 썼다. 내가 너무 앞서나갔나 싶고. 너무 밝히는 여자로 보일 것 같아서 걱정도 되고. 이럴 줄 알았으면 그냥 속바지를 챙겨 입을걸.

아무렇지도 않게 에쉬의 도움을 받아 옆 안장에 올랐고, 에쉬도 바로 뒤에 올라탄다. 속바지를 입지 않아서 맨살이 들러붙으니까 느낌이 이상했다.

“카시안은요?”

“그놈은 왜 찾으십니까?”

“당신이 다니는 곳이라면 어디든 따라간다고 했잖아요. 그런데 안 보여서 물어본 거예요.”

“눈에 띄지 않게 잘 쫓아다니라고 했으니 걱정 마십시오. 그놈에게 너무 관심 주면…… 왠지 내가 개만도 못한 것 같아서 속상해지려고 합니다.”

“아이참, 그러지 말아요. 그래 봐야 당신을 향한 관심에 비하면 새끼손톱만큼도 되지 않으니까.”

진심이라는 것을 알아서 나는 그저 웃으며 그의 팔뚝을 가볍게 손바닥으로 내리쳤다. 저번에 파빌리엔한테도 질투하더니. 다른 사람도 아니고 가족보다 더 붙어 다니는 카시안한테도 질투를 할 줄이야.

정말 의외로 귀여운 점이 너무 많아서 탈이다. 다행히 내 말이 꽤 마음에 들었는지 그의 입꼬리가 씰룩거렸고, 지체 없이 말을 출발시켰다.

늦은 밤이어도 수도의 길거리에는 아직 사람이 꽤 많았다. 우리 영지는 이 시간에 거리를 돌아다니는 사람이 거의 없는데.

“조금 달리겠습니다. 불안하면 내게 안겨요.”

나는 바로 그의 허리에 팔을 감고 가슴팍에 폭 안겼다. 말이 빠르게 달리면 그만큼 흔들려서 어쩔 수 없었다.

생각보다 꽤 오래 달린 말이 속도를 늦췄고, 주변을 둘러보니 수도와 멀리 떨어진 아주 한적한 숲길로 진입했다.

“여기 뭐 하는 데예요?”

“도착하면 알려드리겠습니다.”

“……여기, 사유지 같은데.”

저 멀리 오솔길 사이에 굳게 닫힌 철문 하나가 보였다. 달빛에 비치는 작은 나무판에 안으로 들어가지 말라는 경고문구가 적혀있었다. 그럼 사유지라는 뜻인데, 에쉬는 대수롭지 않게 말을 세우고 내리더니 그 철문을 그냥 열어버리고 말고삐를 잡아 안으로 들어갔다.

“에, 에쉬?”

“괜찮습니다. 나와 당신은 여기 들어갈 수 있는 자격이 있으니까요.”

뭘까? 에쉬의 개인 소유지인 건가? 왕국민이 아닌 이가 땅을 소유할 수는 없을 텐데?

내가 알고 있는 사실과 지금 이 상황이 너무 판이해서 혼란스럽다. 설마 이게 그 상식을 뛰어넘은 그의 비밀일까?

왠지 긴장이 되어 말갈기를 쥔 손에 땀이 배었다. 좁은 오솔길을 따라 더 깊숙하게 들어가자 아까 에쉬가 열었던 철문에 비해 초라하고 작은 집 한 채가 떡하니 보였다.

오래된 고택이라 약간 허름하고 사람의 손을 많이 타지 않았다는 듯 건물 외벽이 전부 넝쿨에 뒤덮인 채다. 그럼에도 바닥의 풀은 정리된 걸로 보아서 관리하는 이가 있긴 한가 보다.

‘에쉬가 이 왕국에 머물 때 있었던 곳일까?’

그가 말을 세웠고, 나는 그의 도움을 받아 말에서 내린 뒤에도 주위를 둘러보느라 여념이 없었다. 폐가는 아닌 것 같은데. 사람이 머물지 않는지 온기가 전혀 느껴지지 않는 장소라 소름이 오스스 돋아났다.

“숨어 지내기에는 참 좋은 곳이네요. 인적도 드물고.”

“그래서 내 어머니가 이곳에서 아무에게도 들키지 않고 살아갈 수 있었다고 했습니다. 어머니의 유언으로 이곳에 어머니의 유골함을 모시기도 했고요.”

“……에쉬의 어머니요?”

이게 대체 무슨 소린지. 에쉬의 어머니가 우리 왕국 사람이었어?

동시에 지난 티파티에서 들었던 이야기들이 다시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가면서 온몸이 얼어붙는 기분이었다. 설마, 아니겠지. 설마. 그럴 리가 없어. 말도 안 돼…….

얼굴에 핏기가 싹 가시면서 목구멍이 꽉 막혀 그 어떤 말도 나오지가 않았다. 나와 다르게 평온한 얼굴을 하고 고택을 슥 둘러본 에쉬가 머쓱하다는 듯 머리를 긁적거렸다.

“들은 이야기가 있을 테니 눈치를 챘을지도 모르겠지만. 생각한 그대로일 겁니다. 내 어머니가 이 비엔트 왕국 출신이고, 외조부께서 반역누명을 써 어머니 혼자 겨우 빠져나와 이곳에서 숨어 지냈다고 했습니다.”

“……그, 그…….”

“함께 도망친 유모와 이곳에서 살다가 이대로는 못살겠다 싶어서 제국으로 건너왔다더군요. 이런저런 일을 하면서 돈을 모았는데 운 좋게 황궁 하녀의 자리를 소개받아 들어갔고, 그곳에서 아버지를 만나게 된 겁니다.”

번개를 맞으면 이런 기분일까. 머릿속이 뒤죽박죽 엉망진창으로 변하면서 새하얀 백지로 변하기까지 그렇게 오래 걸리진 않았다. 떡 벌어진 입은 다물어지지도 않았고, 손가락 하나 까딱하기도 어려울 만큼 신경과 근육들이 소실되어버린 기분이었다.

내가 굉장히 동요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는지 그가 나를 두 팔로 조심히 끌어안아 주며 목덜미에 코를 박는다.

“사랑하던 남자가 국혼을 하게 되면서 그저 한 남자의 정부로 남고 싶지 않아 버렸다고 했습니다. 떠나려고 마음먹었는데, 당시 황후가 붙잡았다더군요. 당신의 침소에 들지 않는 아버지를 잘 설득해주면 두 사람의 관계를 눈감아주겠다고 말입니다.”

……이거 황실의 비화인 거 아닐까? 내가 들어도 되는 거야?

“그렇게 해서 나와 파빌리엔이 태어나게 되었고, 아버지는 황후의 태생이 아닌 내게 황위를 물려줄 생각을 가지고 있었답니다. 그걸 알게 된 형님들이 계략을 꾸며 아버지를 독살했고, 나는 살기 위해 도망쳤을 뿐입니다.”

“진짜…… 이번에, 황제로 즉위했다던 3황자가…… 당신이에요?”

나오지도 않는 목소리를 쥐어짜서 겨우 질문을 던졌다. 그는 잠시 침묵하다가 고개를 들어 나와 눈을 마주치면서 이 상황과 어울리지 않는 예쁜 미소를 그렸다.

“네. 당신이 소문으로 들었다던 그 미치광이 황제가 저 맞습니다.”

오싹, 등골을 휘어 감는 서늘한 한기에 몸이 절로 떨렸다. 그의 어떤 비밀도 감당할 수 있다고 자신만만했는데, 설마 이런 엄청난 비밀을 숨기고 있을 줄이야.

아무 생각도 할 수가 없었다. 머릿속엔 방금 그가 했던 말만 계속 맴돌고 있었다. 에쉬와 황제. 당연히 서로 다른 사람이라고만 생각했기 때문에 내 머릿속에서 그 두 사람이 같은 사람으로 섞이는 건, 물과 기름이 섞이는 것만큼 어려운 일이었다.

저 다정한 눈빛으로 자기를 미치광이 황제라고 소개하다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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