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7화
“카시안도 마젠티스 황제 폐하를 잘 알고 있어요?”
“힘 좀 생겼다고 깝치는 놈이라서. 유일하게 제어할 수 있는 주군께서 떠난 뒤로 더 설치고 다니는 것 같더군요. 그래도 한때는 제법 귀여웠는데.”
혼잣말처럼 중얼거리는 카시안이 오래된 추억을 곱씹듯 실실 웃는다. 제국의 황제를 마치 귀여운 어린 조카를 대하는 것처럼 보여서 의아해졌다. 파빌리엔은 그 황제를 무서워하는 것 같았는데.
진짜 능력 차이일까? 알면 알수록 미궁에 빠지는 기분이다. 게다가 감히 황제를 놈이라고 하다니.
“황제 폐하의 연치가 어떻게 되는지, 알고 있나요?”
“주군과 같습니다. 주군과 깊은 인연이 있는 사람이기도 하고.”
“깊은 인연?”
“이미 꺼진 촛불에 새로운 불꽃을 얹어준 이가 바로 주군이거든요.”
황위가 계속 바뀌면서 황자의 난이 벌어진 건 알고 있다. 그 위기에 에쉬가 뛰어들어 구해주었으니 새 생명을 살려냈다는 뜻이겠지.
그런데 에쉬와 동갑이라는 사실이 굉장히 거슬렸다. 지난 티파티 때 얼핏 들었던 기억에 의하면 황제는 올해로 스물일곱이라고 했는데. 틀린 소문이었던 걸까? 아니면 에쉬가 설마, 나이를 속였다거나?
나이를 속인 게 큰 문제는 아니지만, 에쉬가 거짓말을 한 거면 좀 속상해질 것 같다. 나와 나이 차이가 많이 나서 일부러 줄인 거라면 귀여운 거짓말이긴 한데.
‘아아, 머리 아프다.’
오늘 너무 신경을 썼더니 머리가 지끈 쑤시는 느낌이다. 내가 관자놀이를 꾹꾹 누르며 미간을 잔뜩 좁히자, 카시안이 당당하게 에쉬 옆에 풀썩 주저앉아 손을 가볍게 휘저었다.
“파빌리엔 님의 말에 너무 신경 쓸 필요 없습니다. 황제 놈이 약간 정신 나간 놈이긴 해도 주군한테는 꼼짝 못할걸요? 그보다 저도 차 한 잔 주시면 안 됩니까? 맛이 어떤지 궁금해져서.”
“입에 맞을지는 모르겠지만 얼마든지요.”
사용인을 불러 찻잔을 하나 더 챙겨와 차를 새로 우려 카시안에게 내주었다. 손가락이 얼마나 굵고 크던지, 찻잔 손잡이에 손가락이 들어가질 않아서 그냥 들고 후루룩 마셔버려서 깜짝 놀랐다.
“바로 우린 물이라 뜨거울 텐데…….”
“풉……!”
“……괜찮아요?”
“으, 미리 말 좀 해주면 어디가 덧납니까? 정말 너무 하는군요. 아가씨.”
아니, 찻물에 뜨거운 김이 모락모락 피어나는데 그걸 한 번에 전부 입에 털어 넣는 사람이 잘못한 거 아닌가? 왜 나를 원망하는 건데?
타박하는 그가 얄미워서 나는 어이없다는 듯 코웃음을 치며 두 눈을 치떴다.
“어린아이도 그렇게 김이 나면 후후 불면서 마셔요. 뜨거운 물로 우리는 차가 당연히 뜨겁다는 건 상식 아닌가요?”
입술을 불퉁하게 내밀면서 조곤조곤 따졌더니 카시안이 딴짓을 하며 목을 가다듬고 눈동자를 굴린다. 진짜 뜨거웠는지 얼얼한 입속을 식히려고 손부채질을 하면서.
차에 대해서 모르면 그럴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어 조금 미안하기도 하고. 그래서 유리잔에 미지근한 물을 담아 건네주었다.
“찬물은 아니지만 목을 식힐 수 있을 거예요. 드세요.”
그러자 이번에는 의심스럽게 나를 흘겨보면서 유리잔을 기울여 혀끝으로 물 온도를 가늠하고는 안심하고 마셨다.
확실히 에쉬나 파빌리엔과 다르게 귀족의 예법에 대해서는 아예 배우지 않은 모양이다. 푹신한 소파에 등을 완전히 기대고 편안하게 퍼져있는 자유분방한 태도를 가진 사람을 가까이에서 마주하는 건 처음이라 적응이 되질 않았다. 에쉬는 카시안의 행동에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고 만족스럽게 차를 즐겼고.
“에쉬.”
“네, 슈아.”
“내가 구혼서를 받은 것에 에쉬가 별다른 문제를 느끼지 못하는 건, 카시안이 말한 대로 황제가 무섭지 않아서예요?”
그에 대한 대답은 카시안에게서 나왔다.
“주군이 황제를 무서워하는 건, 사자가 토끼에게 겁을 먹은 거나 마찬가지입니다. 아마 그놈이 아가씨를 황후로 맞이하려는 것도 주군이 보고 싶어서 일지도. 좀, 주군을 아버지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거든요.”
“아버지……?”
“곁에 있을 때는 몰랐는데, 막상 떨어지고 나니 불안해하는 모습을 보였습니다. 부모에게서 떨어진 아이처럼.”
정말일까? 에쉬도 반박하지 않는 걸 보면 거짓말은 아닐 건데. 대체 뭘 믿고 저렇게 당당한 건지도 잘 모르겠고.
이상하게 나만 불안하고 신경 쓰는 것 같아서 억울하다. 두 사람의 말만 들으면 걱정할 것이 하나도 없는데. 상식적으로는 절대 쉬운 일이 아니라서 혼란스럽기만 하다.
‘그래. 혼자 고민한다고 바뀌는 건 없을 거고. 아직 닥치지 않은 일에 너무 마음 쓰지 말자.’
어차피 벌어진 일이고 번복은 없을 거라고 했다. 언젠가는 끝이 보이겠지. 문제가 생기면 그때 고민하면 될 거고. 어차피 문제라고 해봐야 거기서 거기일 테니.
그렇게 마음을 먹으며 차를 한 모금 마셨다. 어쩐지 조금은 홀가분해진 기분을 만끽하는데, 달콤한 시선이 느껴져 시선을 들자 에쉬와 눈이 딱 마주쳤다.
평소보다 더 곱게 반짝거리는 그 연갈색 눈동자에 심장이 간질거렸다.
“왜요……?”
“고민을 내려놓은 것처럼 보여서요. 이제 좀 홀가분해졌습니까?”
“……내 생각도 읽어요?”
“표정에 다 보입니다. 당신의 생각을 읽을 수 있다면 당신을 더 위로할 수 있을 테니 좋겠지만, 그런 능력이 없어 매우 아쉽군요.”
그가 요염하게 미소를 지어 보여서 심장박동이 더욱 거세지고 만다. 왜인지 모르게 아랫배가 뜨거워지면서 다리 사이에 묘한 느낌이 흘러 허벅지를 꼭 맞붙이며 모른 척 차를 한 모금 더 마셨다.
‘둘만 있는 자리가 아니면 저런 표정은 하지 말라고 부탁해야겠어.’
몸의 반응이 너무 정직한 것도 문제라는 것을 알았다. 쓸데없이 아무 데서나 이렇게 동요해버리면 대체 어쩌자는 거냐고. 정숙하지 못하게.
“슈아. 어디 불편합니까?”
“아, 아니에요. 차 한 잔 더 드릴까요?”
“그렇지 않아도 아쉬웠는데. 그럼 부탁드리겠습니다.”
“저도 한잔 더.”
그렇게 뜨거운 공격을 당하고도 당당하게 자신의 찻잔을 내 앞에 내미는 카시안이 생글생글 웃는다. 성격이 원래 솔직하고 뒤끝이 없는 건지.
덩치 큰 두 남자가 뜨거운 물을 담은 티팟에서 시선을 떼지 못하며 얌전히 기다리는 모습에 결국 웃음이 터져버리고 말았다.
‘귀여워. 식사 기다리는 강아지 같잖아?’
늘 혼자 티타임을 즐겼었는데, 이렇게 같이 차를 나눠서 마시니 뭔가 더 풍족해진 것 같고 즐거웠다. 간혹 카시안이 예상하지 못한 행동을 하는 것도 보다 보니 재미있었고.
“슈아! 나 왔어!”
그때 응접실 밖이 분주해졌다. 곧 에브린의 우렁찬 목소리와 함께 문이 활짝 열렸다. 흐뭇하게 웃는 에브린이 머리카락을 귀 뒤로 꽂으면서 우리 쪽으로 다가왔다.
“어서 와, 브링. 좋은 시간 보냈어?”
“늘 그렇듯 잔소리지 뭐. 티타임 중이야? 나도 우리 슈아가 우려 준 맛있는 차 한 잔 얻어먹을 수 있을까?”
“물론이지.”
에브린이 바로 내 옆에 착석하자, 카시안이 굉장히 흥미롭게 에브린을 빤히 쳐다본다. 대놓고 티 나게 쳐다보는 것 같아서 에브린의 얼굴에 뭐가 묻었나 싶었는데 그건 또 아니어서 고개를 갸웃거렸다.
“왜 그래요, 카시안? 브링에게 할 말 있어요?”
“아가씨하고는 또 완전히 다른 성향이라 신기해서 그렇습니다. 절대 어울리지 않은 조합인데 또 그게 잘 어우러지는 걸 보면 사람 하기 나름이라는 말을 믿을 수밖에 없고.”
“에쉬랑 당신도 마찬가지인데요? 에쉬하고 파빌리엔은 눈만 마주쳐도 싸우는데 그쪽 둘은 싸우지 않잖아요.”
“형제와 남이 같습니까? 그리고 주군이 나를 사람 취급을 하지 않아서 무시하는 거지, 두 분처럼 친구 사이는 아닌지라.”
에쉬가 카시안을 미친개라고 하더니. 그냥 반쯤 농담인 줄 알았는데 진심이었구나.
나는 못 들은 척 네 번째 차를 우려 에브린에게 한잔 내어주었다. 아주 흡족해하는 에브린이 오늘 있었던 일을 조잘조잘 떠드는 내내, 카시안의 시선은 에브린에게서 떨어질 생각을 하지 않았다.
설마 브링에게 반한 걸까? 그게 아니고서야 저런 눈빛을 하고 저런 표정으로 이성을 쳐다보는 게 설명되진 않는데. 에브린은 아직 눈치채지 못한 것 같고.
‘그럼 조금 안타깝네. 카시안은 에브린이 좋아하는 이상형과 너무 거리가 멀어서.’
뭔가 애달픈 짝사랑을 가까이에서 보고 있노라니 너무 안타깝다. 아니었으면 좋겠는데.
그렇게 애매모호한 분위기 속에서 티파티를 마치고 에브린은 쉬겠다며 방으로 올라갔고, 나와 에쉬는 산책하러 정원으로 나왔다. 사용인들에게 보이지 않을 먼 곳에서부터는 나란히 손을 맞잡고 그 주위만 거닐었다.
“우리 뭔가 비밀연애 하는 느낌이네요. 그죠?”
“올해 안으로는 비밀연애를 하지 않아도 되게끔 정리를 해야겠지요. 당신이 내 여자라고 떳떳하게 말할 수 있는 날이 곧 올 겁니다.”
“정말 올해 안에 해결돼요?”
“평범한 삶을 포기하면 더 빠르게 해결될 거고. 그 대신 당신에게 숨기고 싶었던 나의 비밀을…… 당신이 전부 알게 되면 어떤 반응일지, 솔직히 겁이 나는 건 어쩔 수 없군요.”
그가 자조를 담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들어 하늘을 올려다본다. 심적으로 힘들 때 하늘을 올려다보는 그의 버릇을 이제는 안다. 그래서 나도 가슴이 답답할 때 하늘을 보는 버릇이 생겨버렸다.
그와 함께 서서 어두운 군청색 물감 위에 보석 가루를 흩뿌려놓은 것처럼 아름답게 반짝거리는 새하얀 별들을 눈에 새겼다. 무수히 많은 저 별들만큼, 내 머릿속도 복잡한 건 매한가지다.
내게 숨기고 싶은 비밀이 뭘까? 대체 뭐길래 그가 겁을 먹고 있는 걸까? 황제도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이.
“뭐가 그렇게 무서운데요?”
“내 주위에서 벌어진 일들은 대부분 상식으로 설명되지 않아서요.”
“흐음……. 당신이 내게 나이를 속인 걸 들킨 것보다 더 겁나는 거예요?”
평온하게 하늘을 올려다보던 그의 눈동자가 불안하게 흔들리는 것을 보았다. 그러더니 고개만 돌려서 둥그렇게 뜬 눈으로 나를 보는데, 그걸 어떻게 알았느냐는 물음이 담겨있었다. 너무 놀라서 말도 나오지 않는지 파르르 떨리는 입술을 달싹거리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