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6화
“어째서죠? 아닌 건 아닌 거잖아요.”
“폐하는 그런 종류의 말장난이나 말대꾸를 달가워하진 않으십니다. 나야 재잘재잘 떠드는 당신이 그저 귀엽게 보이지만 폐하는 말보다는 칼이 먼저 나가는 분이시라.”
그저 자신의 위치를 공고히 다지기 위해 무력으로 제압하는 건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라 정말 피를 보는 걸 즐기는 사람인 모양이다. 지난번 에브린이 전해주었던 황제에 대한 흉포한 소문을 반만 믿었는데 그게 전부 진실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를 황후로 삼을 생각을 할 만큼 내게 관심이 있다면서요? 그런데도 내게 칼을 겨눌까요?”
“제가 아는 황제 폐하라면 가능하다고 보는데. 그게 사랑이라기보다는 호기심에 가까운 편인지라. 아마 사랑이라는 감정 자체를 제대로 알지 못하는 것 같기도 하고.”
“……그런 분을 왜 섬기고 있나요? 약점이라도 잡힌 거예요?”
“기어오르지만 않으면 그만한 천국은 없거든요.”
에쉬가 제국을 등지고 온 이유를 조금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파빌리엔처럼 좋은 게 좋은 거라는 생각을 하는 사람이 아니기 때문에. 아니면 황제와 의견 차이가 있어서거나, 황제의 미친 행동을 눈 뜨고 봐줄 수 없어서 일지도 모르고.
“결론은 황제의 구혼서를 내가 무조건 수락해야 모두가 평안할 수 있다는 말이군요.”
“모두를 살리는 길이기도 하고. 적어도 폐하의 총애를 받으면 당신도 아쉬운 것 하나 없이 원하는 모든 것을 가질 수 있을 겁니다. 폐하의 마음만 제대로 휘어잡으면 원하는 대로 복수를 할 기회도 있을 거고.”
들으면 들을수록 파빌리엔이 완전하게 황제의 편은 아닌 것 같았다. 반역을 꾸밀 만큼 제국을 열정적으로 아끼는 것도 아니고.
“폐하를 직접, 뵙고 싶어요. 가능할까요?”
“그렇지 않아도 조만간 건국기념제가 열릴 겁니다. 그때 폐하께서도 정식으로 당신을 초대할 예정이고요. 아마…… 약혼녀로서 참석하게 되겠지만.”
결혼을 기정사실로 하려고 작정한 게 분명하다. 곧 내가 마젠티스 황제의 구혼서를 받았다는 소문이 퍼질 거고.
‘당분간 모임도 티파티도 참석하진 못하겠네.’
왕국이 꽤나 시끄러워질 것을 예상하니 그냥 빨리 본가로 돌아가고 싶어졌다. 그냥 에쉬와 사랑하면서 조용히 살고 싶은 게 욕심이 되어버릴 줄이야.
“초대…… 기꺼이 받아들이겠습니다. 한 가지 부탁이 있다면, 가능한 구혼서에 대한 소문이 퍼지지 않도록 조치 부탁드려요.”
“노력은 해보겠습니다. 부디 당신다운 좋은 결정을 내려주길 바랍니다.”
파빌리엔도 식사를 더는 이어갈 생각이 없다는 듯 자리에서 일어난다.
“아직 식사가 끝나지 않았…….”
“조만간 형님과 함께 넷이서 외식이라도 합시다. 오늘은 저 역시 입맛이 돌지 않는군요.”
그러더니 지체 없이 백작저를 떠났다. 나는 기사들과 함께 철문을 지나 멀어지는 그들을 그저 가만히 바라만 보았다.
‘나다운 좋은 결정이라…….’
파빌리엔이 남기고 간 마지막 말이 어쩐지 마음에 걸렸다. 분명 이 국혼을 종용하기 위해서 내게 협박과 경고를 일삼았는데. 왜 마지막에는 그런 말을 던진 걸까? 나다운 결정이라면 파혼이라는 것을 모르지 않을 텐데.
“너도 생각이 복잡하겠구나. 상황이 만만치 않아.”
내 어깨를 손으로 가볍게 토닥거려준 아버지가 나를 향해 안쓰러운 얼굴을 보이신다. 나는 그런 아버지에게 설핏 미소를 그리며 눈썹을 휙 들어 올렸다.
“솔직히 아직 실감이 나질 않아요. 진짜 같지도 않고. 뭘 어떻게 해야 할지도 모르겠어요.”
“원하지 않는 자리라면 억지로 가지지 않아도 된다. 아무리 황제라 해도 자신의 속국이자 당신 어머니의 고향인 우리 왕국을 쉽게 건드리진 못할 거다.”
아버지가 이렇게까지 말씀하시는 걸 보면 국혼을 달갑게 여기지 않으시는 것 같다. 첫째 언니와 국혼이 오갔을 때는 대의를 위해서 당연히 해야 할 일이라고 하셨는데. 아마 언니의 배우자가 될 왕세자를 오래 봐와서 괜찮겠다고 여긴 걸 수도 있고.
“황제가 사람 죽이는 일에 죄책감을 느끼지 못하는 사람이라는데…… 무턱대고 구혼서를 반려할 수는 없겠지요. 아마 국왕 전하께서도 곤란해하실 거예요.”
“선택은 너의 몫이니 네가 어느 결정을 내리든 나는 너를 지지한다. 그러니 부담 갖지 말고 네가 행복해질 수 있는 선택을 하거라. 네 어머니의 유언처럼.”
……새삼 어머니가 아버지의 어떤 모습에 반했는지 알 것 같았다. 그리고 아버지에게서 에쉬의 모습이 겹쳐 보여 가슴이 설레어 버렸다. 처음으로 아버지가 근사하게 보여서 조금 부끄러워지기도 했고.
“네. 그럴게요.”
아버지도 자기가 말하고 쑥스러웠는지 머쓱해하며 저택 안으로 먼저 들어가셨다. 가문의 후계를 이어받으면 아버지와 평생 함께 살 수 있는데. 아버지를 혼자 두고 떠나면 얼마나 적적해하실까?
“그 녀석, 벌써 돌아갔습니까?”
파빌리엔이 갔다는 이야기를 들었는지 에쉬가 바로 달려 나왔다. 마침 보고 싶었는데. 어쩜 이렇게 내 마음을 잘 알아주는지.
“준비한 음식이 별로였나 봐요. 급하게 준비한 거라 미흡하긴 했지만요.”
“입이 짧은 편이기도 하고, 먹는 걸 즐기는 녀석이 아닌지라. 백작저에서 제공하는 음식은 어느 것 하나 트집 잡을 곳이 없을 만큼 완벽합니다. 그러니 마음 쓰지 마세요.”
혹시라도 내가 대접을 제대로 못한 것 때문에 침울해할까 봐 걱정이라는 듯 나를 위로해줄 말을 고르며 조곤조곤 풀어냈다. 그런 그가 너무 예뻐서 당장 키스를 해주고 싶었다.
여기가 수도라서 아쉬울 뿐.
“에쉬는 식사 다 했어요?”
“네. 카시안도 무려 세 접시나 해치웠습니다. 덩치에 맞게 잘 먹는 편이라서 백작저의 식료품을 거덜 내는 거 아닌지 모르겠군요.”
“손님이 잘 드시면 나야 좋죠. 그럼 우리 둘이서 잠깐 티타임 가질까요?”
“좋습니다. 그 차, 또 마시고 싶었는데. 잘되었군요.”
에브린도 외출 중이라 오롯이 둘만의 시간을 보낼 수 있어서 그저 기뻤다. 파빌리엔과 나눴던 이야기도 해야 하고.
우리는 응접실로 들어가 함께 카모마일을 즐겼다. 그도 꽤 입에 잘 맞는지 표정이 한결 편해졌다.
“이런 차라면 매일 마셔도 그립겠군요. 차를 즐기던 편은 아니었는데 차에 대한 편견이 절로 없어질 정도입니다.”
“차는 찻잎을 고르는 것부터 우리는 것까지 그 과정에 따라 맛이 달라지거든요. 차는 어머니가 정말 잘 우리셨어요. 아직은 실력이 부족해서 그 맛이 나진 않네요.”
“연륜이라는 건 무시 못 한다고 하지요. 하지만 나는 이 차도 정말 매일 마시고 싶을 만큼 아주 맛있습니다. 언젠가는 슈아의 어머니가 우려낸 차보다 더 맛있는 차를 맛볼 수 있겠군요. 이거, 기대되는데요?”
매우 신난 기분이 그의 표정에 고스란히 드러난다. 너무 좋아하는 게 눈에 보여서 이 분위기를 망치고 싶지 않았으나, 그도 분명 내가 먼저 말을 꺼내주길 기다리고 있을 터.
“파빌리엔이 조만간 넷이서 외식을 하자고 제안했어요.”
“……넷이서?”
“네, 저와 브링 그리고 당신이랑요. 무슨 생각인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당신과 상의해보겠다고 했어요.”
“식사야 어렵지 않지만. 왠지 놀랍군요. 녀석이 먼저 나와 식사를 제안할 줄이야.”
에쉬가 파빌리엔을 대하는 태도는 딱 그거였다. 천둥벌거숭이의 목줄을 꽉 쥐고 있는 느낌. 항상 사고만 치고 다니는 남동생이 또 무슨 계략을 꾸밀지 걱정하는 표정이 잠깐 드러났다.
“에쉬 당신이 그 대단한 능력을 가지고 고작 백작령 하나 유지하겠다고 덤벼드는 것을 안타까워하더라고요. 아까운 인재라면서.”
“…….”
“그리고 황제 폐하께서 우리의 관계를 다 알고 있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신을 제 자리에 다시 앉히는 것도, 나를 황후로 맞이하는 일에도 번복은 없을 거래요. 만약 내가 거절하면 폐하께서 당신의 목숨을 위협할지도 모른다고요.”
차분하게 들은 이야기를 곱씹으며 설명하는데 은근히 화가 치밀었다. 왜 그의 주변에 있는 사람들은 그를 못살게 구는 건지.
“다른 사람도 아니고 에쉬 당신이니까 직접 물어볼게요. 당신이 겪어본 황제라는 사람, 어떤 사람이에요?”
잔인한 질문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그 질문으로 인해 그가 떠올리고 싶지 않은 기억을 억지로 상기시키고 있다는 사실도.
가슴이 아프지만 일이 이렇게 된 이상 그도 피할 수는 없을 거다. 황제가 걸어온 싸움을 피하지 않겠다고 장담했으므로.
“어떤, 사람이냐 묻는다면……. 정확히 파악하진 못해서 확실하진 않지만, 확실히 과거에 내가 알던 모습과 요즘 들리는 소문과는 판이한 차이가 있긴 합니다.”
“권력을 손에 넣은 뒤로 변한 걸까요?”
“모르겠습니다. 숨겨왔던 본성일 수도 있고.”
진짜 모르는 건지. 말하기 싫은 건지.
그러다가 카시안의 존재가 수면 위로 떠올랐다. 에쉬보다는 그의 곁에 늘 붙어있었다던 카시안이라면 더 이성적으로 설명해줄 수 있지 않을까 싶은 생각이 들었다. 게다가 최근까지 제국에 있었다고 했으니 에쉬가 모르는 이야기도 알고 있지 않을까?
“혹시 카시안 좀 만나볼 수 있을까요?”
“저 불렀습니까?”
에쉬가 불쾌해하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물었는데, 갑자기 열린 창문 안으로 무언가가 휙 들어와 심장이 덜컹거릴 정도로 너무 놀랐다. 그 무언가는 덩치에 어울리지 않게 날렵함을 자랑하는 카시안이었다.
비범하네. 버젓이 있는 문을 놔두고 창문으로 출입이라니.
“……어디, 있었길래 이렇게 바로 들어와요?”
“저야 항상 주군의 곁을 지키고 있으니 주군이 있는 곳이라면 바로 근처에 머물고 있지요. 마침 흥미로운 이야기가 들리길래 관심이 생기기도 했고.”
“어떤 점이 흥미로워요?”
“황제 놈이 나의 주군 목숨을 위협할지도 모른다는 말?”
그의 검붉은 눈동자에 깃든 살벌한 살기가 위협적으로 일렁거려 어깨가 파르르 떨렸다. 에쉬를 만나기 전까지는 이런 소름 돋는 살기를 마주할 기회가 아예 없었다. 최근 들어 몇 번 경험을 해 본 결과, 웬만하면 정면으로 마주하지 말아야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무시무시한 공포심이 피어올랐다.
이런 기운을 에쉬는 매일 느끼고 살았던 걸까?
새삼 그가 대단한 정신력의 소유자구나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