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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만의 비밀스러운 꽃 (45)화 (46/113)

45화

직사각형의 테이블 가장자리에 앉은 파빌리엔이 자리에서 일어나 내가 앉을 맞은편 자리의 의자를 빼주었다. 굳이 나를 상대로 저렇게 하지 않아도 되는데, 아무래도 우리 아버지 앞이라서 그런지 매너를 갖춘 태도를 보였다.

“고마워요.”

“천만의 말씀.”

그가 여동생에게 했던 행동이 떠올라서 자꾸 웃음이 나오려는 걸 꾹 참았다.

“브링도 같이 만났으면 좋았을 텐데. 아쉽게도 오늘 부모님과 저녁 식사를 하고 온다고 해서 자리에 없네요.”

“그렇지 않아도 그 브레이튼 백작 영애께 식사를 한번 대접할 생각은 있습니다. 지난번에 민폐를 끼친 일이 있다 보니 회포도 좀 풀 겸.”

“좋은 레스토랑 추천해드릴게요. 두 분이서 오붓하게 식사하세요.”

“가능한 넷이서 어떻습니까?”

“넷이요?”

“형님도 같이.”

또 에쉬를 흔들고 싶어서 저러는 걸까? 아니면 지난번 카시안의 말처럼 그를 복귀시키고 싶어서 설득하려고?

어느 쪽이든 달갑지 않았다. 에쉬는 제국보다 이곳에서의 생활이 더 좋다고 했다. 그가 원하지 않는 일을 하라고 억지로 등 떠밀고 싶은 생각은 조금도 없고.

“그건 에쉬와 상의해볼게요. 일단 식사부터 하시죠.”

곧 집사가 준비한 식사를 하나씩 내왔고, 우리 세 사람은 조용하게 식사를 시작했다.

식사 도중 간간이 제국과 왕국의 교섭에 관한 문제를 아버지가 꺼내면, 파빌리엔은 대수롭지 않게 응수했다. 그게 아주 자연스러워서 조금 놀랍기도 하다.

‘성격이 좀 걸걸하고 제멋대로라 무지할 줄 알았는데 의외네.’

고위 귀족이라서 교육을 다 받기는 했나 보다. 외교라는 게 정말 쉽지 않은 일인데 파빌리엔은 곤란한 기색 하나 없이 되받아쳤다.

“일단 저희 황제 폐하께서는 비엔트 왕국에서 원한다면 군사 지원을 아끼지 않겠다는 뜻을 밝히셨습니다. 역병으로 인해 피해를 입은 만큼 보상도 충분히 지원해줄 예정이라 하셨고요.”

“크게 바라는 건 없습니다. 저희가 원하는 건 국정을 이끌어나갈 수 있는 인재입니다.”

“……귀한 따님의 배우자로 낙점한 제 형님이 욕심나십니까?”

“마음 같아서는 끌어들이고 싶지만, 국정에 참여하는 건 크게 관심이 없다는 뜻을 미리 밝혔기 때문에 강요할 생각은 없습니다.”

예상하던 대답이 아니라는 듯 파빌리엔이 아버지와 나를 번갈아 쳐다보더니 작게 웃음을 터트렸다.

“확실히, 따님이 백작을 닮은 거였군요. 형님만큼 대단한 인재를 고작 영지 하나 꾸려나가는 일에 낭비할 생각이라니.”

비아냥거리는 것 같아서 미간이 절로 구겨진다. 아버지는 인정한다는 듯 고개를 주억거리며 동조하셨다.

나도 알지만. 본인이 배우고 싶어서 배운 건 아닐 텐데. 원했다면 제국을 떠나지 않았을 거고. 그런데 왜 에쉬가 선택한 일을 존중해주지 않는 거지? 에쉬를 대신할 인재가 없다면 문제겠지만, 그것도 아닌 것 같은데.

파빌리엔은 한숨을 푹 내쉬며 포크를 내려두고 와인을 한 모금 음미했다. 그 붉은 와인에 시선을 고정한 채 다시 말을 이었다.

“형님께는 엉망이 된 왕국 하나를 재건할 수 있는 능력이 있습니다. 단지 여자 하나에 미쳐서 아버지의 유언도 배신하고 도망친 사람인데, 한 번 배신했던 사람이 두 번을 못할까…….”

그건 경고에 가까웠다. 누가 형제들 아니랄까 봐 여동생 레이니드하고 똑같이 이간질이라니.

“이 자리에서 에쉬의 이야기가 나오는 건 왜죠? 우리가 할 이야기는 따로 있지 않았던가요?”

왠지 화가 나서 속이 부글부글 끓어오른다. 다른 무엇보다 에쉬에 대해서 좋지 않은 이야기를 들을 때면 이상하게 머리 꼭대기에서 뜨거운 김이 폴폴 새어 나오는 기분이었다. 에쉬도 에쉬 나름의 고충이 있고 말 못 할 사정이라는 게 있는 건데. 왜 그걸 자신의 잣대로 생각하고 단정 지어 에쉬를 나쁜 사람으로 몰아가려는 건지.

나는 일부러 탁 소리가 나도록 포크를 내려놓고 냅킨으로 입가를 정리했다. 입맛도 뚝 떨어져서 더는 식사를 이어가고 싶지 않았다. 사절을 대함에 있어 예의가 없는 행동이긴 해도, 상대방이 예의를 와인과 함께 후루룩 마셔버렸으니 굳이 예법을 갖추지 않아도 되겠다고 생각했다.

어머니의 가르침에서 어긋나지만. 애꿎은 에쉬를 볼모로 나를 흔들어놓는 저 얄미운 상대는 예외다.

“제가 뵙길 청했음에도 이곳까지 직접 찾아오겠다고 한 이유가 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목적이 뭔지 솔직하게 말해주시길 바라요.”

“……목적이라. 글쎄요. 별다른 건 없고, 나는 그저 하나의 지령을 받아 비엔트 왕국에 왔을 뿐입니다.”

“그 구혼서 말인가요? 다른 사람은 몰라도 파빌리엔 당신은 내 대답을 알고 있지 않나요?”

“황제 폐하께서도 알고 계십니다. 당신과 형님의 관계.”

의자 등받이에 등을 기대고 팔짱을 낀 파빌리엔은 마치 내 반응을 살피기 위해서 떠보는 것 같았다. 분명 에쉬의 가문이 황제와 깊은 관계가 있음을 안다. 그러니 에쉬의 여자에 대해서 모르진 않겠지.

“그래서요?”

“알고 있는데도 굳이 당신을 콕 집어 구혼서를 직접 작성하셨습니다. 폐하는 진심입니다.”

“솔직히 당신도 알고 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황제 폐하께서 구혼서를 작성한 이유, 에쉬를 다시 끌고 가기 위함이 아닌지요?”

“그것도 맞고, 폐하께서 당신에게 특별한 마음이 있다는 것도 맞습니다.”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믿어야 할지 모르겠다. 에쉬는 그렇다 치는데 왜 굳이 나를?

“이해가 안 돼요. 나를 황후의 자리에 앉혀놓으면 에쉬가 당신들의 제안을 받아들일 거라고 생각하는 건가요?”

“당신이 황후가 되는 것과 형님이 자신의 원래 직위에 복직되는 것과는 별개입니다. 만약 당신이 황후의 자리를 거절하면, 형님의 목숨이 어떻게 될지 장담할 수 없습니다. 아, 물론 내가 아니라 황제 폐하께서 결정하실 일이지만요.”

“……그거 협박인가요?”

“좋을 대로 생각하시길.”

정말 마음 같아서는 저 괘씸한 파빌리엔에게 와인 병을 날려버리고 싶었다. 에쉬의 말대로 차마 혀를 자르진 못하겠고.

그 미친 황제가 욕심도 많은가 보네. 충성스러웠던 신하를 되돌려 받지 못할 바에는 차라리 죽이겠다는 건가. 아니면 에쉬에게 악감정이 있어서?

그 어느 쪽이든 달갑지 않다. 나 때문에 에쉬가 위험해지는 건 아닐지 걱정도 되고.

“그럼 파빌리엔, 당신의 개인적인 생각은요? 내가 황후가 되어도 당신은 아무렇지도 않게 나를 황후 취급 해줄 건가요?”

파빌리엔의 두 눈동자에 호기심이 가득 인다. 아까는 태연하게 업무를 진행하듯 술술 뱉어내더니, 이제는 조금 고민하며 말을 고르고 있었다.

“흐음, 그거 꽤 흥미로운 질문이군요. 왜 그런 걸 물어보는 겁니까? 혹시 이제 형님이 좀 싫증 나서 연인을 바꿔볼 생각이 있기라도?”

저 요망한 주둥이를 꿰매버리고 싶은 걸 꾹 참고 최대한 환하게 웃어주었다.

“자꾸 헛소리하면 에쉬 말대로 나이프 들고 미친 척하고 공격할 수도 있어요. 아, 혹시 알고 있어요? 지금 여기 에쉬의 호위 기사라던 카시안이 와있는 거?”

순간 파빌리엔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어버리면서 안색이 새파랗게 질려버린다. 아마 카시안과도 잘 아는 사이 같았다. 저렇게나 겁내는 걸 보면 카시안이 정말 대단한 검술 실력을 가지고 있나 보다.

오늘 처음으로 카시안이 든든하게 느껴지는 순간이었다.

“다시 본론으로 돌아가서, 당신의 생각을 듣고 싶어요. 내가 황후의 자리에 올라도 괜찮은 사람이라고 생각하나요? 만약 이 상태로 내가 황후가 되면 어떤 사달이 날지, 생각해본 적은 있고요?”

입이 쓰다는 듯 얼굴을 잔뜩 구긴 파빌리엔이 입맛을 다시며 테이블에 팔꿈치를 얹고 삐딱하게 턱을 괸다. 아까의 정중한 태도를 유지할 생각이 전혀 없는 것 같았다.

아버지는 그저 그런 파빌리엔과 나의 대화를 귀로만 담고 와인잔을 기울이셨다. 아마도 끼어들 수 없는 대화라서 상황을 파악해보려고 노력하시는 중일 것이다.

나는 다시 자세를 고쳐 앉으며 파빌리엔의 대답을 기다렸다. 과연 이번에는 어떤 답을 내놓을지.

“확실히 당신에게 이상적인 황후 폐하를 기대할 수는 없겠지만. 유능하신 황제 폐하께서 당신의 부족한 부분을 전부 메꿔줄 테니 그건 걱정 없겠습니다.”

“……솔직한 대답은 고맙지만 내 질문의 답은 아닌 것 같은데요.”

“뭐, 나의 생각을 물어봤자……. 나는 황제 폐하와 척을 질 생각은 없어서요. 사랑을 위해 당신을 보호하고 싶은 마음도 크지만, 그랬다가는 우리 둘의 목숨을 비롯해 당신의 소중한 이들도 전부 명을 달리할 겁니다.”

파빌리엔은 황제를 무서워하는구나. 에쉬는 딱히 어려워하는 것 같지도 않던데. 가진 능력의 차이일까? 아니면 에쉬도 사실 황제가 두려운데 티를 내지 않고 있는 건?

“나 하나를 얻자고 왕국 하나를 쓸어버리는 건 일도 아니라는 뜻인가요? 그럼 아까 왕국에 지원을 아끼지 않겠다는 것도 그 구혼서에 대한 답의 여부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는 뜻이고?”

“아마 지금 황제 폐하라면 충분히 가능성이 크겠지요? 지금 폐하의 모든 관심은 당신에게 쏠려있으니.”

등줄기를 타고 식은땀이 흐른다. 그 미친 사람의 관심 따위 받고 싶지 않건만.

“폐하께서도, 나를 본 적이 있나요?”

“제가 기억하기로는 없습니다. 대충 제가 그려드린 당신 초상화 정도로만 알고 계시지요.”

“그림도 그릴 줄 알아요?”

“이래 봬도 손재주가 남달라서. 대충 그렸는데도 콩깍지가 제대로 쓰이셔서는 하루에도 수십 번 그 앞에 서서 혼자 감상을 하십니다.”

나를 본 적도 없으면서 내게 진심이라고? 대체 그 말을 어떻게 믿으라는 건지. 초상화에 반할 수도 있는 건가? 그 초상화를 어떻게 그렸는지 몰라도, 그럼 실제로 보면 실망해서 내게 관심이 떨어질 수도?

“생각보다 내가 마음에 들지 아니하면 구혼서를 번복할 가능성도 있겠군요.”

그때 픽 웃는 파빌리엔이 괴고 있던 손으로 턱을 매만지며 거만한 표정으로 나를 내려다보았다. 그 눈빛이 아까와 달리 꽤 진지했다.

“한 가지 충고하겠는데, 폐하의 말씀과 결정에 웬만하면 토를 달지 않는 것이 좋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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