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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만의 비밀스러운 꽃 (44)화 (45/113)

44화

아무래도 뭔가 조짐이 좋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내게서 눈을 떼지 않는 그 묘한 연갈색 눈동자를 경계하면서 욕조를 사이에 두고 그와 반대편 쪽으로 슬금슬금 자리를 옮겼다.

“당신은 내가 초면이 아닐지 몰라도 나는 당신 같은 사람은 처음 봐요. 에쉬 아니잖아요, 당신? 아니면 에쉬의 가면을 쓴 에쉬의 또 다른 인격이라도 되나요?”

“이거 참, 상처로군요. 왜 그렇게 거리를 두고 도망가려는 겁니까? 나는 당신을 해칠 생각이 조금도 없는데.”

“내가 아는 에쉬가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어요. 낯선 사람이 남의 욕실에 함부로 침범하니 거리를 두는 것뿐이에요. 솔직히 말해요. 당신, 진짜 정체가 뭐예요?”

그는 대답 대신 가지런한 치아가 드러날 정도로 환하게 웃었다. 그 미소가 이상하게 소름이 끼쳐 나도 모르게 숨을 들이켜고 바로 욕실 입구를 향해 도망치듯 달렸다.

그러나.

“슈아?”

“헉!”

욕실 입구를 빠져나가던 그 찰나에 내 앞을 가로막고 선 에쉬와 딱 맞닥뜨렸고, 나는 짧은 비명을 지르며 그 자리에 얼음처럼 우뚝 서버렸다. 심장이 얼마나 놀랐는지 아주 잠깐 멈추었던 것 같았다.

그도 나만큼 놀란 표정으로 어리둥절해 하며 한 손에 든 내 잠옷과 속옷들을 화장대 위에 놓고서는 내 얼어붙은 손을 꼭 잡아 쥐었다.

“얼굴이 창백해요, 슈아. 손도 차갑고. 무슨 일 있었습니까?”

손으로 느껴지는 온기는 언제나처럼 따뜻했다. 걱정스러운 눈으로 나를 내려다보는 연갈색 눈동자가 부드럽게 흔들리는 반응도. 얼굴의 상처도, 허리춤에 매달린 그 검도 전부 내가 아는 에쉬의 모습 그 자체였다.

‘아까 그 사람은 아니야. 확실히.’

잔뜩 긴장했던 근육이 한순간 풀리면서 그대로 바닥에 주저앉고 말았다. 얼마나 놀랐던지 머리도 지끈지끈 쑤시고 눈앞이 어지러워졌다.

“슈아, 왜 그래요? 응? 주치의를 부를까요?”

“괜찮아요. 긴장이 풀려서 그래요. 욕실 안에서…… 이상한 걸 봐서 그래요.”

“이상한 거?”

그가 심각한 얼굴로 벌떡 일어나 욕실 입구에 서서 안쪽을 둘러보았다. 나는 그가 자신의 도플갱어와 마주치면 어떤 기분일지 걱정이 되었다.

“안에 아무것도 없는데. 무엇을 본 겁니까?”

“……아무도 없다고요?”

욕실에는 창문도 없고 숨을 공간도 없다. 완벽한 밀실이라 빠져나갈 곳도 없다는 뜻이다. 그런데 없다니. 분명 누군가가 욕실로 들어와서 나와 대화도 나누었는데?

믿을 수가 없어서 후들후들 떨리는 다리로 겨우 일어나 그의 팔에 찰싹 들러붙어 안쪽을 눈으로 살폈다. 정말 욕조에서 모락모락 피어나는 수증기 이외에는 그 어떤 움직임도, 사람도 보이지 않았다.

“……내가 꿈을, 진짜 꿈을 꾼 걸까요?”

“무엇을 봤는데 그러는 겁니까?”

“당신이요. 당신을 닮은, 아주 똑같은 사람이 들어왔었는데…….”

그러자 에쉬가 가볍게 웃음을 터트리며 내 뺨을 손으로 가볍게 어루만지고는 이마에 입을 맞췄다.

“잠깐 떨어진 사이에 내가 그렇게 보고 싶었습니까? 많이 피곤하긴 했었군요. 헛것을 보다니. 빨리 씻고 자야겠습니다.”

그러더니 아주 빠르게 의복을 탈의한 뒤, 나와 사이좋게 욕조 안으로 들어가 씻는 일에 집중하였다.

따뜻한 물속에 함께 몸을 담가 그의 단단한 품속에 거의 엎드리다시피 안겨 숨을 골랐다. 그의 평온한 심장 소리를 들으며 찰박거리는 물소리와 부드러운 손길을 느끼면서.

웃기게도 조금 아까 겪었던 상황과 온도 차이가 너무 심하게 달라서 아직도 머리가 혼란스럽다.

‘그게 정말 꿈이었을까? 유령의 장난?’

간혹 허약해질 때 유령이 나타나는 걸 보았다는 이야기를 듣긴 했지만. 그냥 장난으로 하는 말인 줄 알았다. 이렇게 직접 내가 겪고 나니 그저 겁주려는 말이 아니라는 걸 새삼 실감했다.

너무 사실적이었다. 보통 유령은 다리가 없다던데, 내가 본 그 남자는 아주 멀쩡한 사람처럼 보였다. 아주 작정하고 유혹하면 홀랑 넘어갈 정도로 섹시하기도 했고.

에쉬가 알면 분명 기분 나빠할 테니까. 그건 입 다물고 있어야지.

“아참, 에쉬. 내가 준 목걸이 가지고 있나요?”

문득 아까 본 유령의 목에 걸려있던 어머니의 유품인 나비 목걸이가 떠올랐다. 그래서 고개만 살짝 들어 그를 올려다보고 물었는데, 그도 딴생각에 잠겨있었는지 나를 멀뚱히 쳐다보기만 한다.

“목걸이……?”

뒤늦게 생각났다는 듯 동그랗게 떠진 눈을 이리저리 바삐 굴리는 걸 보니, 여지없이 잊고 있던 것이 분명했다.

“설마, 버렸어요? 그거 우리 어머니 유품인데?”

“아, 아닙니다. 그럴 리가요. 잃어버릴까 봐 분명 잘 보관한다고 넣어두었습니다. 그런데…….”

아마 자신이 보관한 그 날을 더듬더듬 떠올리는 것 같았다. 그러더니 두 눈을 질끈 감고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 보관 장소가 나의 본가라서 참, 이런 실수를 다 할 줄이야……. 완전 나의 불찰입니다. 그 중요한 걸 지금까지 잊고 있었다니.”

“잊어버리지만 않으면 돼요. 어디 있는지는 알고 있으니까 찾아오면 되죠. 어차피 조만간 한번은 제국에 가야 할 일이 생길지도 모르니까요.”

이번에 제국의 사절과 대화가 통하지 않으면 그땐 그 황제를 직접 만나보는 수밖에 없을 거다. 그 잔학무도한 황제가 어떻게 나올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뭐든 부딪쳐봐야 하니까.

다행히 그날 이후로 그 유령은 보이지 않았다. 솔직히 또 나타나서 에쉬의 행세를 할까 봐 걱정이 되는 건 사실이었다. 그래서 에쉬의 눈을 빤히 들여다보는 버릇이 생기기도 했고.

그때마다 그는 아주 기분 좋게 웃으며 주변을 살피고 아무도 없을 때 짧은 입맞춤을 건넸다.

“아침부터 그렇게 애틋한 시선을 보내니 오늘 하루도 꽤 더디게 흐르겠습니다. 밤까지 어떻게 기다릴지.”

덕분에 나도 밤이 기다려지긴 했지만.

그날 점심 식사 이후에 왕궁 기사가 서찰을 들고 왔다. 그 서찰을 받아본 아버지께서 말없이 내게 서찰을 건넸다.

“왜요? 안 좋은 소식이에요?”

“직접 보거라.”

괜히 긴장되어 손바닥에 땀이 살짝 배었다. 왕실 인장이 찍힌 서찰은 쉽게 받을 수 없는 거라서.

서찰에는 내가 신청한 제국 사절단과의 대면을 허락하겠다는 것과, 사절 대표가 우리 백작저로 직접 찾아오겠다고 적혀있었다. 그것도 오늘 저녁 식사 시간에.

“……아버지. 원래 사절단이 귀족가에 방문도 하나요?”

“글쎄.”

“만찬을 준비하라고 일러야겠네요. 아주 특별하게.”

서찰 하나로 별의별 생각이 다 들었다. 황제가 원하는 여자라서 더 깍듯이 모시려고 이러는 건가 싶고. 아니면 내가 이 혼인을 물릴 예상을 하고 설득하기 위해 오는 걸 수도 있겠고.

그리고 그날 저녁, 서서히 해가 지기 시작해서 붉은 노을이 하늘을 물들 때. 백작저의 정원을 가로질러 들어오는 사절단의 선두에 선 남자를 보자마자 경악했다.

‘저 사람이야? 제국의 사절이라는 남자가?’

말을 탄 다섯 명의 남자. 제국 황실 기사 제복을 입은 네 명의 남자와 그들의 호위를 받는 한 남자가 어깨에 닿은 회색 머리카락을 휘날리며 다가왔다. 그 남자의 파란 눈동자가 정확히 나와 시선을 맞추었다. 내 놀란 표정이 꽤 마음에 들었는지 아주 흡족하게 웃기까지.

그가 우리 앞에서 말을 세우고 가볍게 뛰어내려서는 굉장히 당당하게 다가와 내 앞에 섰다.

“조만간 싫어도 또 만나게 될 거라고 했었지요. 기억합니까?”

“……파빌리엔, 당신이었어요? 제국 사절이라는 사람?”

“어쩌다 보니.”

어깨를 으쓱거리며 살살 눈웃음을 지어 보이던 파빌리엔이 내 뒤에 서 있는 에쉬를 쳐다보며 순식간에 정색했다. 바로 표정을 풀긴 했지만.

그리고 아버지는 나와 제국의 사절인 파빌리엔이 자연스럽게 대화하는 것을 듣고 옆에서 굉장히 놀라하셨다.

“르슈아. 이분과 면식이 있었던 게냐?”

“에쉬의 남동생이에요. 지난번에 아버지께서 수도에 가 계시는 동안 방문했던 적이 있거든요.”

묻고 싶은 말은 많지만 참는다는 듯 고개만 끄덕거리셨다. 에쉬의 남동생이라는 부분에서 굉장히 놀라신 것 같았다.

놀랄 만도 하지. 외교 사절은 아무나 할 수 없는 일이고, 에쉬가 만약 그대로 가주가 되었더라면 이 자리에 있는 건 파빌리엔이 아니라 에쉬였을 테니.

“저희 가문에 방문해주신 것을 환영합니다. 일단 안으로 모시겠습니다. 그런데…… 혼자 오신 겁니까? 원래 사절은 혼자 다니지 않는다고 들었는데요.”

“사람이 많으면 번거롭고. 번거로운 건 딱 질색이라 정예만 따르라 했습니다. 이들은 신경 쓰지 않아도 됩니다. 편하게 대하세요.”

그를 따라온 황실 기사 네 명은 조금의 흐트러짐도 없이 군기가 바짝 들어있었다. 숨은 쉬고 있는지 궁금할 정도로 목각인형처럼 서 있어서 살벌하게 느껴지기도 하고.

그래도 아는 사람이라 조금은 안심이 되었다. 그렇지 않아도 낯선 사람을 상대하는 것만큼 어려운 건 없는데, 제국의 황제 대리로 온 낯선 사람이라면 더 신경이 쓰였을 테니.

저택 밖에 나와 있는 모든 사용인이 길을 터주고, 그 사이로 파빌리엔을 안내했다. 그리고 식당으로 들어갔을 때에 에쉬는 안으로 들어오지 못했다. 귀족의 만찬에는 귀족이 아닌 사람이 참석할 수 없기 때문이었다.

“에쉬. 가서 식사 꼭 하고 와요. 내가 잘 해결할 테니까 걱정 말고요.”

“그러겠습니다. 그래도 다른 사람이 아니라 상대가 저 녀석이라서 그런지 마음이 불안하진 않군요. 쓸데없는 말을 하면 나이프로 녀석의 혀를 잘라내 버리십시오.”

웃으면서 저런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그것도 식당에 들어간 파빌리엔도 들으라는 식으로 크게 말해서 나는 그저 어색하게 웃는 것밖에 할 수가 없었다. 하여간 정말 형제의 사이가 이렇게 좋지 않아서야.

한편으로는 파빌리엔도 분명 나를 좋아한다 해놓고 황제와 결혼하라고 등 떠밀려 온 지금 이 상황도 조금 웃겼다. 대체 무슨 생각인지 저 머릿속을 한번 염탐해보고 싶기도 하고.

에쉬가 내게 가볍게 묵례를 하고 돌아서서 완전히 모습이 사라질 때까지, 나는 그의 뒷모습을 끝까지 지켜봐 주었다. 그런 뒤에 숨을 몇 번 고르고 허리를 꼿꼿이 세워 침착하게 식당 안으로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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