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화
이건 고문에 가까웠다. 그렇다고 아픈 건 아니지만, 너무 과했다. 전율이 너무 자주 찾아와 아무것도 생각할 수가 없었다. 머릿속은 백지가 되어버렸고, 거세게 휘젓는 쾌락만이 남아있는 것 같았다.
뼈마디가 전부 욱신거려 이리저리 피해 보려고 해도 그에게 완전히 묶여버린 채라 어쩔 수 없이 고스란히 받아내만 했다.
“꽉 잡아요.”
순간 허공에 살짝 떴다. 발끝이 분명 땅에서 떨어지는 것을 느꼈다.
“하아, 슈아. 아름다운 내 사랑. 이렇게나 나를 기쁘게 받아들여 주니 참으로 영광이 아닐 수가 없습니다.”
“흣!”
“슈아. 키스해줄래요?”
쾌감에 취해서 크게 흔들리는 시야에 그의 미소가 얼핏 보이는 것 같았다. 정신을 차릴 수도 없어서 그의 요구를 행동으로 옮기는 일이 거의 불가능했다.
결국 그가 입술을 맞추어 부드럽게 키스를 퍼부었다. 서로의 혀가 얽히니 왜 이렇게 야하던지.
사방에서 쾌락을 있는 대로 퍼붓는 느낌이었다. 시야가 소멸되어 정신이 혼미해진다. 절로 터지는 교성은 입술을 막아내는 그의 목구멍으로 흘러 들어갔고, 점차 짜릿한 쾌감이 증폭하여 전율이 담긴 육체는 제멋대로 흔들렸다.
차곡차곡 쌓였던 짜릿한 쾌락이 최고조에 도달하여 더는 머물 곳이 없을 때. 그 위험한 순간의 결말은 지금껏 경험해본 것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강력한 최후를 맞이하였다.
숨을 쉴 수도, 비명을 지를 수도 없을 만큼 온몸이 욱신거리는 그런 쾌감. 나는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강렬한 자극에 진저리를 쳤다.
“하아, 굉장하군요. 이렇게 소름이 끼칠 만큼 무서움을 느낀 게 얼마 만인지.”
말은 그렇게 하면서 굉장히 기쁨을 담아 웃음을 흘린다. 아까의 난폭했던 짐승은 사라졌는지 해맑은 미소를 보이는 에쉬의 얼굴에는 평소와 다름없이 상냥함이 깃들어있었다.
“우리 슈아는 아직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한 것 같군요. 어땠습니까? 내가 준 벌, 마음에 들었는지?”
“……벌, 이었나요?”
“내가 줄 수 있는 최고의 벌이었지요.”
목덜미와 귓불에 쪽 입을 맞추고는 얼굴 구석구석에도 수없이 뽀뽀를 퍼붓는다. 하늘을 뚫어버릴 기세로 치솟았던 쾌락이 천천히 내려앉으면서 그의 말을 다시 곱씹을 수 있었다.
벌이라니. 이건 벌이라고 할 수 없는, 전혀 다른 성질의 행위였다. 결과적으로 내가 받은 건 세상 그 무엇으로도 느껴본 적 없는 최고의 쾌락이었으니까.
온몸을 쥐어짜는 듯한 저릿함이 기분 좋다고 생각된 건 처음이었다. 그제야 한쪽으로 지탱하고 있는 다리가 아프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가 아쉬운 한숨을 뱉어내며 내게서 아예 빠져나가 버렸다.
“내일 또 아프게 할 수는 없으니. 오늘도 참아야겠습니다. 당신도 나도.”
내가 아쉬워하는 것을 안다는 듯 빙그레 웃는 그의 표정에 괜히 수줍어졌다. 그냥 이어서 했더라도 원망하진 않았을 텐데. 그러다가도 그렇게 큰 절정의 파도를 맛보았음에도 아직 아쉬워하는 스스로가 민망하여 얼굴이 절로 발개지고 만다.
그가 들고 있던 다리를 놓아주었고, 두 다리로 바닥에 섰는데 그대로 다리가 꺾여서 휘청거렸다. 아마 에쉬가 붙잡아주지 않았으면 넘어졌을지도.
“조금만 참아요. 그래도 옷가지를 버리고 갈 수는 없으니.”
벽에 등을 기대게 해 준 에쉬가 주변을 정리하는 도중에도 다리는 하염없이 떨렸다.
바닥에 떨어져 있는 내 속옷과 구두를 한 손에 든 그가 나를 두 팔로 가볍게 안아 들어 예배당을 벗어났다. 생각해보니 지금은 사용하지 않는 빈 곳이라고 해도 과거에는 신을 모시던 고귀한 예배당이었는데.
괜히 민망하여 얼굴이 벌게졌으나 에쉬는 그것이 자신 때문인 줄 아는 듯 흐뭇하게 웃기만 했다. 원인제공은 그이니 오해해도 딱히 상관없다 여겼다.
나는 얌전히 그의 품에 안겨 저택 안으로 들어왔다. 그리고 2층의 내 방이 아닌 자신이 배정받은 손님방으로 향했다.
“2층으로 가도 되는데.”
“아직은 백작께 우리의 관계를 전부 털어놓을 수는 없잖습니까? 특히나 이번 구혼 건으로 심경이 복잡하실 테니 더는 힘들게 해드리진 말아야겠지요.”
그래서 더 얼굴이 화끈거렸다. 사실 그 구혼서, 방금까지 새까맣게 잊고 있었기 때문에.
수도의 저택이 좋은 점은 각자 욕실에서 물을 퍼 올릴 수 있는 수도장치가 아주 잘 되어있다는 거다. 비록 차가운 물이긴 해도 욕실 안에서 물을 데울 수 있어서 사용인들의 도움 없이도 목욕이 가능하다는 점.
그게 지금 상황에서 아주 반가운 일이라는 것을 뒤늦게 깨달았다. 이런 엉망인 몰골을 저택의 하녀들에게 보일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
그의 방 욕실에서 물을 받아 데울 때까지, 나는 피곤한 몸을 그에게 기대고 나른하게 퍼져버렸다. 아까의 정사에 너무 큰 기력을 소진해서 도무지 채워질 생각을 하지 않았다.
“잠옷을 챙겨오겠습니다. 먼저 욕조에 들어가서 쉬고 있어요.”
“빨리 다녀와요.”
그가 내 드레스 탈의를 먼저 해준 뒤에 욕실을 나갔고, 나는 손만 가볍게 흔들어주었다.
에쉬가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진 것을 확인하고, 몸에 힘을 쭉 뺀 채로 그를 기다렸다.
“르슈아.”
욕실 문 앞에서 시선이 느껴져 고개를 돌렸는데, 그새 다녀왔는지 에쉬가 벽에 삐딱하게 기대 선 채 팔짱을 끼고 나를 불렀다.
에쉬는 맞는데. 행동이 내가 아는 에쉬답지 않아서 조금 의아해졌다. 내가 아는 그라면 생글생글 사람 좋은 미소를 그리면서 들어와 나를 꼭 안아주고도 남는 사람이다. 잠시 떨어지는 것조차 아쉬워서.
무엇보다 저 미소. 입꼬리는 예쁘게 휘어 올라갔으나 눈이 웃고 있질 않았다. 그래서 그런지 갑자기 소름이 돋았다.
“에쉬……?”
나는 그를 향해 어색하게 웃으면서 훤히 드러난 알몸을 팔로 가렸다. 저렇게 멀리 떨어져 나를 흥미롭게 지켜보는 그의 눈빛이 굉장히 낯설게만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꿈을 꾸는 건가 싶다. 혹시 아까 물이 데워지던 사이에 그의 품에서 잠이 들었던 건 아닐까?
‘하지만 방금 피부로 느낀 그의 흔적은 꿈이라고 할 수 없을 만큼 생생했는데.’
아무리 꿈이라도 에쉬의 거리감이 느껴지는 태도는 조금 상처다. 대체 왜 저러나 싶어서 불만을 담은 눈으로 그와 시선을 똑바로 마주치는데, 뭔가 위화감이 느껴졌다.
“……당신, 누구예요?”
다른 건 속일 수 있어도 눈동자는 거짓말을 하지 못한다. 확실한 건, 내가 아는 에쉬가 아니었다. 아주 흡사한 외모라서 내가 에쉬와의 친밀한 관계를 맺지 않았더라면 아주 미묘하게 다른 분위기를 감지하진 못했을 거다.
뒤늦게 그것을 깨닫고 나니 확실히 달라 보인다. 게다가 내 물음에도 그는 조금도 동요하지 않은 채 그저 한쪽 입꼬리만 삐딱하게 끌어올렸다.
‘이중인격, 뭐 그런 걸까?’
하지만 근 일 년간, 비록 떨어진 시간도 길었으나 누구에게도 에쉬의 다른 성향에 대한 이야기는 듣지 못했다. 이중인격이면 행동양상이 다를 텐데, 그걸 유모나 집사 또는 타인의 변화에 민감한 기사들이 알아채지 못할 리는 없을 거고.
더 혼란스러워진 상황에서 혹시 내게 이상한 해코지를 할까 봐 도망갈 위치를 파악하고 있는 사이. 그가 갑자기 셔츠의 단추를 위에서부터 하나씩 아주 천천히 풀어내기 시작했다.
“소, 소리 지를 겁니다. 가까이 오기만 해봐요. 당신 목숨도 보장 못해요.”
그러거나 말거나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는 그가 첫 번째 단추를 풀어내고 이어서 두 번째 단추를 푼다. 그러더니 벽에서 몸을 떼고 한 걸음, 한 걸음 느린 걸음으로 다가왔다.
물론 나도 그가 한 발씩 가까워질 때마다 뒤로 물러났다.
‘……어?’
조금씩 가까워지면서 한 개씩 풀리는 단추 사이로 얼핏 목걸이 줄이 보였다. 은색의 가느다란 줄에 매달린 파란색의 나비모양 펜던트.
그 목걸이를 보자마자 까맣게 잊고 있던 기억 하나가 저편에서 순식간에 끌려 나왔다.
[이거 내 어머니의 유품이에요. 이제 내 거지만, 꼭 무사히 돌아와서 다시 내 목에 걸어주었으면 좋겠어요.]
[이렇게 귀한 것을…….]
[그만큼 당신을 좋아해요, 에쉬. 꼭 당신과 행복해지고 싶어요.]
그가 대의를 치르고자 나를 잠시 떠나가겠다고 했던 날, 내 진심을 고백하며 그에게 목걸이를 건네주었었다. 내 어머니의 눈동자를 닮은 파란 나비라서 어머니가 돌아가신 이후부터 그때까지 항상 목에 걸고 다니던 거였다.
그가 진짜 돌아온 이후에는 그저 그가 돌아왔다는 사실만으로 너무 기뻐서 목걸이의 존재를 새까맣게 잊고만 있었다.
‘에쉬가 저 목걸이를 하고 있던 적이 있었던가?’
펜던트가 큰 편이라서 그에게 안길 때 느껴졌을 거다. 하지만 그가 돌아와 첫날밤을 치렀을 때도 저 목걸이를 착용하고 있지는 않았었다.
그냥 장난치는 건지. 하지만 내게 장난을 칠 사람은 아닌데. 갑자기 저 목걸이는 왜 걸고 나타난 걸까?
“당신, 누구냐니까?”
“서운하군요. 우리 초면도 아닌데.”
말투를 들으니 더 확실했다. 내가 아는 그 ‘에쉬’가 아니라는 것이. 확실히 달랐다. 억양도, 부드럽게 귀에 착착 감기는 에쉬의 어투와 다르게 감정 없는 딱딱한 말투까지.
침착하게 마음을 가라앉히고 그를 살피니 이상한 곳이 한두 군데가 아니었다. 일단 그의 턱선에 깊게 남아있던 자상의 흔적이 눈앞의 이 사람에게는 없다. 그리고 그가 한 몸처럼 늘 지니고 있는 그 황금색 검도 없고.
무엇보다 아까 이 남자가 나를 불렀을 때, 애칭이 아닌 이름으로 불렀다. 내게 애칭을 허락받은 뒤로는 단 한 번도 이름으로 부른 적이 없던 사람인데.
‘그런데 초면이 아니라고? 대체 뭐지, 이 사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