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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만의 비밀스러운 꽃 (41)화 (42/113)

41화

별일 아니라는 것처럼 나긋나긋 설명을 마치자, 반응을 보인 건 에쉬가 아니라 우리를 뒤따라오던 카시안이었다. 참았던 웃음을 풉, 뱉어내더니 고개를 푹 숙인 채로 어깨를 들썩거리며 옆에 서 있는 나무를 주먹으로 사정없이 내리쳤다.

저러다가 애먼 나무가 부러지겠다 싶을 정도로.

“……그쪽 웃으라고 한 이야기 아닌데.”

“저놈은 신경 쓰지 마십시오. 그보다 구혼서, 정말입니까?”

“그런 걸로 농담할 내가 아니잖아요? 황제가 직접 자필로 작성한 교지도 있어요. 인장도 확실하고요.”

아무래도 상대가 황제이다 보니 에쉬도 상당히 당황스러운 감정을 숨기지 못했다. 나는 침울해 있는 그의 뺨을 두 손으로 감싸면서 고운 피부를 엄지손가락으로 어루만졌다.

“확실하게 말하지만 나는 그 결혼, 절대 할 생각이 없어요. 조만간 제국에서 온 사절을 만나 확실하게 거절할 거예요. 세상에 여자가 나밖에 없는 것도 아니고, 나는 황후의 재목이 절대 아니니까요.”

세상에 단 하나뿐인 소중한 내 남자만이 나의 전부라고 생각한다. 에쉬가 아닌 그 누구도 내게 그만한 사랑과 행복을 줄 수 없을 것이다. 어머니의 마지막 전언처럼, 나는 그 뜻을 무조건 이뤄낼 거니까.

하지만 그게 만약 나 혼자만의 생각이라면. 그의 입장이 나와 다르다면 우리의 사랑 이야기는 유지될 수 없겠지? 그의 사랑을 의심하는 건 아니지만, 강요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래서 나는 조심스럽게, 그러나 신중하게 그의 복잡해 보이는 눈동자를 주시하면서 물었다.

“에쉬의 생각이 궁금해요. 일단 내 생각은 그렇다는 건데…… 쉽지 않은 싸움이 될지도 몰라요. 칼만 안 들었지, 진짜 미쳤다고 소문난 황제가 어떤 횡포를 부릴지는 아무도 모르잖아요?”

퍽, 퍽, 여전히 배를 잡고 웃느라 눈물까지 뽑아내는 카시안이 불쌍한 나무 하나를 작살내려고 작정했나 보다.

저거 꽤 값이 나가는 나무인데. 에쉬에게 곤란한 일이 생기는 걸 좋아하는 걸까? 미친개라더니 저쪽도 황제 못지않은 정신머리를 가지고 있는 것 같다.

일단 저쪽은 무시하고. 이쪽이 더 중요하니까.

“당신은 그 복잡한 싸움이 싫어서 모든 것을 버리고 내게 돌아온 건데, 또 나로 인해 그 싸움에 휘말리게 하는 것 같아서 솔직히 미안한 감정이 있어요.”

“무슨 뜻입니까, 그 말?”

“당신이 무슨 선택을 하든 원망하지 않겠다는 거예요. 내 진심은 그렇지만, 그 진심이 당신을 다치게 한다면 나는 나를 평생 용서할 수 없을 것 같거든요.”

그가 크게 다쳐 사경을 헤맬 때와 같은 기분을 또 느끼고 싶진 않았다. 마음 같아서는 누구도 해치지 못하는 곳에 숨겨두고 보호하면서 평생 예뻐만 해줘도 모자란데. 

“나는 에쉬에게 전부 떠넘길 생각은 없어요. 내 선에서 할 수 있는 최대한의 노력은 하겠지만, 당신이 감당해야 할 몫도 있기는 할 거예요.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지 생각할 시간이 필요하다면 얼마든지 줄게요.”

말은 이렇게 했으나 표정에서는 솔직함이 드러나 버렸다. 최대한 웃어 보이려고 노력은 했는데 괜히 먹먹해지는 가슴에 눈썹 끝이 절로 축 쳐져 버려서. 내가 생각해도 이상한 표정이 되어버리고 만다.

덕분에 에쉬 역시 나와 같은 얼굴을 하고는 입술을 잘근 씹었다. 복잡한 생각에 사로잡힌 에쉬가 침묵하는 사이, 다 웃어서 홀가분하다는 카시안이 목을 가다듬으며 어깨를 으쓱거렸다.

“흠, 공교롭게도…….”

“끼어들지 마라, 카시안.”

“주군을 다시 제자리에 꽂아 넣으려는 속셈이 훤히 보이는군요. 그래서 어쩌실 겁니까?”

카시안도 나와 같은 생각을 했나 보다. 황제의 의도가 확실해지는 순간이었다. 에쉬 역시 같은 생각이었다는 듯 동요 없이 한숨만 푹 내쉬고는 두 눈을 꾹 감았다.

나는 그의 뺨에서 손바닥을 떼었다. 그러자 에쉬가 내 손목을 덥석 잡아서 살짝 당겨 나를 와락 끌어안았다.

“혹시나 해서 물어보는데, 내가 떠나겠다고 하면 나를 놓아줄 생각이었습니까?”

가까이에서 들려오는 그의 힘없는 목소리에 코끝이 시큰거렸다. 떠나겠다고 한 것도 아닌데, 막상 그가 가버린다 생각하니 방심하고 있던 심장이 얇게 저며져 그 엄청난 통증이 온 신경을 자극했다.

“……그랬겠지요? 그럴 것 같아요. 그리고 난, 시들어버리는 꽃처럼 말라 죽겠죠. 생애 처음으로…… 마음이 허무해지는 것을 느껴보게 될 거고.”

상상만 해도 이렇게 아픈데. 이게 현실이 되는 순간 아마 숨도 못 쉬게 되진 않을지.

절대 깔끔한 이별이 될 수 없을 거다. 그래서 또 미안해진다. 내가 그의 마음을 떠보려는 말을 했다는 사실을 뒤늦게 깨달았으니까.

나는 두 팔로 그의 허리를 감싸 안고 단단한 가슴팍에 더 깊이 얼굴을 파묻었다.

“미안해요, 에쉬. 이래도 싫고 저래도 싫어서 마음에도 없는 소리가 절로 나와요. 그냥 당신하고 평범하게 사랑하고 싶을 뿐인데, 어쩌다가 일이 이렇게 되어버린 걸까요……?”

속상해서 평소 절대 하지 않는 한탄까지 줄줄이 새어 나온다. 무슨 말로도 위로가 되지 않을 거다. 그 한 가지 바라는 일이 왜 이렇게 어려운지.

그의 품이 이렇게나 사랑스러운데. 하늘 아래 나의 운명인 사람은 오로지 그 한 명일 뿐이라고 생각하는데. 왜 이런 시련을 주는 건지. 그저 신이 원망스러울 뿐이다.

“슈아.”

“슬픈 이야기면 나중에요. 지금 좀, 많이 슬퍼서 당신한테 추한 꼴을 보일지도 몰라요.”

“이게 슬픈 이야기인지는 모르겠는데, 지금 불현듯 어머니의 이야기가 떠올라서요. 어머니께서 돌아가시기 전에 나를 불러서 하신 말씀이 있었거든요.”

그의 가족사에 귀가 쫑긋 세워졌다. 그가 먼저 부모님의 이야기를 꺼낸 적이 지금까지 한 번도 없으니까.

“어떤 말씀이요?”

“내 어머니는 아버지와 오래 사랑을 나눈 사이였으나, 신분 차이를 극복하지 못하고 헤어지게 되었다고 했습니다. 그게 아버지를 위한 길이라고 생각했답니다.”

신분 차이. 그의 어머니가 평민이었던 걸까?

“헤어졌어도 서로를 잊지 못해서, 다시 만나게 된 거예요?”

“결과적으로는 그렇습니다. 그랬으니 내가 무사히 태어나게 되었던 거고요.”

그가 왜 이 말을 하는지 이해가 되었다. 방금처럼 후회할 것을 알고도 그런 선택에 마음을 두지 말길 바란다는 뜻.

“그럼 왜, 떠나기로 마음먹었던 거래요?”

“사람 인생이라는 것은 망망대해에 떠다니는 작은 난파선과도 같아서, 어둠이 드리워지기 시작하면 누구나 두려움에 떨기 마련이라고. 어머니도 혹시 당신 때문에 사랑하는 사람이 다칠까 봐 겁이 났었답니다.”

지금의 우리 상황과 비슷한 걸지도 모르겠다. 자신의 선택 하나로 사랑하는 사람을 다치게 하지 않기 위해서 원치 않은 이별을 결심하게 된 것 말이다.

왠지 내가 실수한 것 같아서 의기소침해졌다. 잠시나마 이별을 생각했던 것도, 제대로 싸워보지도 않고 그가 다치는 것이 저어되어 내 마음대로 결론을 지어버려서 너무 미안해졌다.

“우리도, 어떻게 보면 비슷한 상황을 맞이한 거네요.”

“어머니는 당신께서 조금만 더 용기가 있었더라면 서로에게 그만한 상처를 남기진 않았을 거라고, 내게 항상 당부했습니다. 네가 옳다고 생각하는 일은 절대 포기하지 말라고. 한번 손에 넣은 행복을 절대 놓지 말라고.”

그는 지금 어머니의 말을 빌려서 내게 자신의 뜻을 표현하고 있는 거다. 그 어떤 시련을 겪는다 해도 나를 포기할 생각이 없음을. 그것을 증명하듯 내 어깨와 등을 감싸고 있는 그의 팔에 더욱 힘이 가해져서, 솔직히 뼈가 으스러지는 줄 알았다.

다행히 내가 통증을 호소하기 전에 팔을 풀었다. 내게서 떨어지는 그의 체온이 아쉽다고 느껴지던 때, 그가 내 둥근 어깨를 감싸 쥐고 상체를 살짝 숙여 나와 눈높이를 맞췄다.

“지금 이것이 우리의 관계를 위협하는 것이라면, 나는 맞설 겁니다. 비겁하게 숨지 않겠다는 의미기도 합니다. 어차피 내가 떠나가는 거나 죽는 거나, 슈아 당신이 슬퍼지는 건 마찬가지 아니겠습니까?”

“……당신이 내 옆에 존재하지 않는 건 슬픈 일이긴 하지만. 최악의 경우, 당신이 끔찍하게 여기던 그 세계로 다시 뛰어 들어가게 될지도 몰라요.”

“상관없습니다. 내가 편안히 쉴 수 있는 이 귀엽고 아름다운 내 사람만 곁에 있으면 그 어떤 불구덩이 지옥 속이라도 얼마든지 뛰어들 수 있으니까.”

그 누구도 나한테 귀엽다는 말을 하진 않는데. 아름답다는 말보다 귀엽다는 말이 더 가슴을 울렸다. 자그마한 어린 아기한테나 하는 말이라고 생각해서. 내가 그한테는 귀엽게도 보일 수 있구나 싶어 괜히 부끄러워졌다.

“그럼 주군, 정말 돌아갈 겁니까?”

둘만의 세계에 흠뻑 빠져 당장 그에게 키스를 퍼부어야겠다고 생각하던 찰나, 눈치 없는 카시안이 끼어들어 후끈 달아오른 분위기가 찬물을 끼얹은 듯 가라앉아버린다. 에쉬도 방해를 받아 매우 불만스럽다는 표정으로 카시안을 찌릿 노려보았다.

“최악의 경우가 그렇다는 거다. 그럴 일은 없도록 할 거지만. 가고 싶으면 너 혼자 가든가.”

“여긴 너무 평화로워서 좀이 쑤시기는 해도 보는 즐거움은 있어서 말입니다. 주군의 감정기복, 장난 아니게 요동치는 것도 꽤 흥미롭고. 저 아가씨도 그렇고.”

혼자 뭐가 그렇게 재미있는지 키득거리면서 반달로 접은 눈으로 에쉬를 찬찬히 훑는다. 그러다가 그 의미심장한 검붉은 눈동자를 데굴 굴려 나와 눈이 딱 마주쳐서 반사적으로 움찔거렸다.

언제 봐도 저 사람, 좀 무섭긴 하다. 길들여지지 않은 맹수처럼 희번덕거리는 눈빛이라 적당한 거리에서 가볍게 마주치기만 해도 오금이 저렸다.

눈빛만으로도 상대를 제압할 수 있다는 게 이런 사람을 두고 하는 말이겠지?

“그럼 방해꾼은 이만 조용히 떨어지겠습니다. 모처럼 두 분 만의 즐거운 시간 보내십시오, 에쉬포드 님.”

마치 나는 너희가 이제부터 할 일을 알고 있다는 눈웃음을 지어 보이며 묵례를 하더니 순식간에 자취를 감춰서 깜짝 놀랐다. 저 덩치가 저렇게 갑자기 사라질 수 있다니.

“……에쉬포드. 그거 당신 진짜 이름이에요?”

“작년까지만 해도 그랬지요. 지금은 에쉬입니다. 당신이 불러주는 이름이 곧 내 이름이니까.”

가문을 등지면서 이름도 버렸다는 뜻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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